“타는 수레와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운반이 어려워서 바닷가 사람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새우와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지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이나 주고 사야 되며, 영남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한탄한다. 그가 살던 조선 왕조 시대의 우리나라는 그 문화적 역량과 물산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도로와 수레가 발전하지 않은 나라였다. 




연암 박지원 , <열하일기>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 원인으로 국토에 산지가 많아 수레가 다닐 길을 닦기 어려웠다는 점, 수레의 동력이라 할 말과 소가 부족했다는 점, 국방상의 이유로 (적의 침입을 어렵게 하려고!) 일부러 길을 닦지 않았다는 점 등이 지적되지만 박지원에 따르면 죄다 핑계다. “결국 수레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닦지 않은 것이지 수레를 쓰게 되면 왜 길을 만들지 않겠는가.” 하물며 삼국시대 우리나라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수레를 이용할 줄 알았던 나라였지 않은가. 결국 한 왕조가 망하고 나라를 잃고 그 나라를 다시 찾은 우여곡절 뒤에도 우리의 ‘도로’는 여전히 형편이 없었고 그나마 있던 도로망도 전쟁통에 쑥밭이 되고 말았다. 그 위를 다닐 ‘수레’ 또한 자취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51년 전란 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 영업을 허가한 일이 있었다. 이 요금이 얼마였을까?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값보다 더 비쌌던 셈이다. 걸린 시간은? 모르긴 해도 하루 안에 끊으면 성공적인 여행이었으리라. 그 형편은 1960년대 다 가도록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 부산을 오간다는 것은 으레 기차를 통해서였고 서울 부산을 자동차로 오간다는 것은 일종의 몽상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수도 서울과 한국 최대의 항구도시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구상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64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각양각색의 차들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바라보는 대통령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언젠가는 꼬불꼬불 고갯길과 차들이 나란히 오가다 보면 어깨 부딪치기 십상인, 좁아터진 도로를 걷어치우고 아우토반처럼 곧고 빠른 길을 만들어 보리라 생각을 했을 테지만 그는 그 사실을 꽤 오랜 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었다. 1967년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안에까지도 고속도로 건설은 빠져 있었다. 그러나 역시 그의 특기는 '은인자중'하다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비로소 빛을 본 것은 1967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때였다. 당시 건설부에서 일한 김의원 전 국토개발연구원장의 회고. “1967년 4월 말, 청와대가 느닷없이 김용희 국토계획국장을 호출했다. ‘국토계획에 포함시킬 사업을 빨리 적어 내라’는 것이었다. 김 국장은 생각나는 대로 4대강 개발, 10대항 개발, 고속도로 건설 등을 메모에 갈겨썼고, 며칠 후 대통령 선거 유세장에서 메모 내용이 그대로 공약으로 발표됐다.” (한겨레2010.4.16 한겨레21 806호 기사 중) 하지만 일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박정희 대통령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의뢰해 1965년 11월부터 1966년 6월에 걸쳐 한국의 교통 실태를 조사하도록 한 바 있었던 것이다. (동 기사 중) 

 

 IBRD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나친 철도 의존도를 줄이고 3300킬로미터 정도의 도로망을 확충할 것, 그리고 서울과 강릉, 목포와 포항을 잇는 국토 횡단 도로의 건설을 추천했다. 남북으로는 그나마 철도가 연결돼 있으니 동서를 잇는 도로를 만들라는 것. 그러나 막상 대통령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결단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토종단도로였다. 




▲ 1.21 사건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는 소나무 (출처 : 위키백과)


 

경부고속도로.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428킬로미터의 대장정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68년 2월 1일이었다. 그런데 그 열흘 전에는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실패한 1.21 사건이 터졌다.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인심은 흉흉했고 대통령 자신의 심기도 불편했을 터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한다. 연설은 희망과 장밋빛 미래를 담기보다는 살기에 가까운 비장함으로 점철됐다. “그들이 우리를 침략해 봤자 6.25 때와 같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대한민국도 아니고 그때와 같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우리 60만 국군도 아니라는 것을 공산집단들은 확실히 인식을 해야 될 것입니다.” 연설의 태반은 ‘김일성 도당’에 대한 분노와 그들의 도전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오기로 채워졌다. 그 연설을 조금 더 들어보자. “적이 전쟁을 도발해 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격을 해야 할 그런 태세를 갖추면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추진하는 이 건설 사업을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국민들은 한쪽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건설을 추진해 나가는 싸우면서 건설을 하는 그런 국민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이는 고속도로 건설 기공 축하 연설이 아니라 고속도로 건설 전투에 나선 사령관의 공격 개시 명령에 가깝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말로 일종의 전투였는지도 모른다. 아우토반을 처음 보았던 독일 방문길에 그가 만났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만리타향에서 외국인들이 싫어하는 일거리를 도맡아 하며 가난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듯이. 자신은 바닥을 박박 기면서도 자식만큼은 가르치고 말겠다고 이를 갈아붙이며 등짐을 지던 많은 한국인들이 빈곤에 맞선 전사였듯이. 박정희 대통령 역시 당시의 많은 한국인들처럼 전의에 불타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모가지를 따러’ 서울 시내 한복판에 특수부대를 보낸 북한의 콧대를 꺾고, 자신이 꿈꾸는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다짐으로 주먹을 부르쥐었을 것이다. 고속도로를 짓겠다고 하니 “그 위를 달린 차는 있소?”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외국인들에게 “봤소 임자?” 하면서 씨익 웃어 주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428킬로미터의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건설 전쟁’으로 우리 역사에 남게 된다.




▲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쟁 치고는 애초에 가망이 별로 없는 전쟁이었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느냐.”는 반대론이 막강했던 데다 돈도 장비고 기술도 인력도 모두 부족했다. 당장 공사를 시작하기 전 돈이 얼마나 들 것인가의 문제조차 답하는 사람마다 다 달랐다. 건설부는 650억원을 잡았고, 서울시는 그 1/3도 안되는 180억원, 재무부의 주판은 280억원을 놓았고 육본 공병감실은 490억원을 제시했다.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해 본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이 꺼내든 액수는 380억이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중용(?)을 택했다. 들쭉날쭉한 예상 가운데 중간치였던 현대건설이 제시한 비용에 예비비 30억을 얹어 430억원을 공사비로 책정했다. 그 해 국가 예산의 23.6 퍼센트였다. 공사 구간은 서울-수원, 수원-대전, 대전-대구, 대구- 부산의 4개 구간으로 나뉘었고 현대건설을 비롯한 16개 기업이 참여했다. 그리고 건설 ‘전쟁’에 걸맞게 군 공병단도 대거 투입됐다. 서울과 부산, 한강에서 시작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줄기를 따라 남해에 이르는 기나긴 도로를 창조하는 대역사의 시작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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