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홍수가 났을 때 모래 주머니를 든 인민해방군 장병들이 몸으로 넘치는 물을 막아서던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북한에서도 비슷한 소식이 들린다. 모든 건설 현장에는 북한군이 투입되어야 하고 군대가 아니면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개 후진 사회에서 군대란 그 사회의 역량이 총 집결된 집단이며 가장 선진적인 동시에 국가의 결정에 따라 가장 쉽게 동원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뚫겠다고 결심하던 시기의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7년 11월 육군본부 조달감실 검사과장 윤영호 대령이 청와대 호출을 받는다.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나온 공병통이었던 그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육군 공병대를 투입하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공사비가 많이 절감될 것이고 공사 진척도 빨라질 것 같은데 말이야” (월간조선 2011년 1월호) 윤영호 대령도 맞장구를 친다.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리고 육군 공병대는 경부고속도로에 대거 투입된다. 육군 제1201 건설공병단 220공병대대가 차출돼 건설 현장에 뛰어들었고 수원-대전 구간에는 1202공병단에서 건설공병 1개 대대, 대전-부산 구간에는 1203 건설공병단에서 1개 대대가 경부고속도로 전투(?)에 참전한다. 뿐만 아니라 현역 위관급 장교들이 ‘감독관’ 임무를 띠고 각지에 파견되어 공사에 참여한 민간회사 사원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다. 글자 그대로 군ㆍ관ㆍ민이 총동원된 총력전이 펼쳐진 것이다. 



▲공사현장(출처: 한국도로공사 http://www.ex.co.kr/)



공사는 곧 전투였다. 납기일은 일종의 점령해야 할 고지였고 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지휘관의 굳건한 의지만으로는 고지는 점령되지 않는다. 결국 그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아등바등 험난한 난관을 뚫고 돌격해야 하는 건 말단 병사들, 즉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휴일은 꿈도 꾸지 못하고 하루 19시간씩 작업하며 기계를 대신했다. 모자라는 불도저를 위해 수백 개의 삽이 춤을 추었고 난공사의 경우 15㎞ 공사하는 데 1500명이 투입됐다. 군대의 미덕인 신속함은 공사기간 단축 노력으로 이어졌다. 겨울의 꽁공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가며 작업을 했다니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으리라. 그 아득한 과정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난코스로 꼽히던 곳이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옥천면(출처: 비지트코리아 http://bit.ly/YC9kqK)



언젠가 건설교통부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이라는 걸 내놓은 적이 있다. 이른바 드라이브하기 좋고 풍광이 괜찮은 길을 총망라했다는 자료였는데 경부고속도로 가운데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 설명인즉슨 “터널과 교각을 설치하여 자연파괴를 최소화 함으로서 친환경 도로건설의 표본이 되었으며 수려한 주변경관과 구조물의 아름다운 조화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간으로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명소”라는 것인데 금강1교에서 4교까지의 구간,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충북 옥천 쪽에 위치한 길이었다.


지금은 ‘수려한 주변경관’과 ‘친환경 도로건설의 표본’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길’로 소개되지만 1970년 무렵의 이 코스는 흡사 지옥으로 향하는 길처럼 끔찍하고 괴로운 길이었다. ‘친환경 도로 건설’이란 산을 깎아내는 대신 터널이나 다리로 길을 이었다는 뜻이었다. 실컷 파 들어가다가 흙이 무너지는 경우도 흔했고 강 위에 설치한 가교가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강 휴게소 남쪽 25킬로미터 지점의 당재터널 공사는 최악 가운데 으뜸이었다. 이 지역의 지반은 토사로 된 퇴적층이었는데 발파 작업을 할 때마다 토사가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이 시지포스의 도로(徒勞)같은 도로(道路) 작업 끝에 사람의 목숨도 여럿 날아갔다.



 

▲공사현장(출처: 한국도로공사 http://www.ex.co.kr/)



사람 목숨과 공사비를 한정없이 삼키는 괴물처럼 버티고 선 이 ‘터널’ 앞에서 노동자들은 엉뚱한 집착에 빠져들었다. 이 모든 것은 터널 입구에 버티고 선 거대한 느티나무의 신령이 노한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편안히 잘 살고 있던 땅을 파헤치고 산을 뭉개니 신령님이 분개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던 중 느티나무를 베어내야 하는 날이 왔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어느 나무라고 그 허리에 톱을 들이대겠는가. 결국 나선 것은 군인이었다.


무궁화 두 개의 서슬이 느티나무 신령과 맞섰다. 국군 중령은 휘하 병력에 명령을 내리고 노동자들을 다그쳐 느티나무 제거 작전을 개시했다. 당연히 나무는 힘없이 쓰러졌고 신령도 별 수 없다 싶었는데 다음날 중령이 뜻밖의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에 많은 작업자들이 일손을 팽개치고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이 터널 구간에서만 낙반 사고가 13번이 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개통식은 1970년 7월 7일로 아예 못이 박혀 있었다. 건설부 장관 이한림은 펄펄 뛰었다. 이 구간을 맡은 정주영 회장도 눈에 불을 켜고 아예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발파만 하면 와르르 태산이 무너지는 데엔 도리가 없었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조강 시멘트였다. 일반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쳐 봐야 마르기도 전에 무너지니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생산량도 적은 조강 시멘트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르기만을 기다리는 1주일의 시간을 12시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정주영 회장은 현장에서 190킬로미터 떨어진 단양의 시멘트 공장의 생산 라인을 통째로 바꾸는 초강수를 써서 조강 시멘트를 생산했고 그걸 수백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시쳇말로 ‘갖다바름’으로서 공사를 완공한다. 그때 정주영 회장이 한 말은 “주판을 엎어라.”였다. 이것 저것 재다가는 죽도 밥도 안되겠으니 손해 볼 때 보고 나가 떨어질 때 나가 떨어지더라도 일단 고지부터 점령하자는 돌격령이었고 총동원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부고속도로 구간 전체에서 일관되게 지켜진 지침이기도 했다. 



▲ 개통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그 혹독한 시험대를 넘어서서 경부고속도로는 3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완성된다.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난공사 지역이었던 금강휴게소 인근에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죽어간 77명의 노동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했다. “실제 사망자는 77명이 훨씬 넘는다..... 숱하게 죽었다. 한 구간이 약 10㎞이다. 하루에 1000명 넘게 투입됐다. 지금은 제대로 된 장비가 있지만 그때는 거의 다 사람 손으로 했다. 사망자는 770명일 수도 있고 890명일 수도 있다.”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파견된 육군 및 건설부 출신 공사 감독관들의 모임인 ‘77회’ 총무를 지냈던 이성규씨의 말이다. (2010년 2월 주간경향 연간기획 중)



▲(출처: 한국도로공사http://www.ex.co.kr/)



그들의 땀방울과 핏방울이 아롱진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렇게 연설하게 된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국민들이 과연 얼마만한 민족적인 저력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국민이 얼마만한 민족으로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민족의 능력을 이 고속도로를 통해서 한번 테스트 해보자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로서 이뤄진 하나의 민족적인 대 예술 작품이다. 나는 이렇게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사진출처: 한국도로공사http://www.ex.co.kr/)



해외 전문가들의 충고를 듣지 않은 상태에서,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부족한 돈과 장비를 사람의 손발로 메워 가며 강행한 공사였으며 건설 비용에 맞먹는 사후 유지 비용을 들여야 했던, ‘날림’의 오명으로부터도 전적으로 자유롭지는 못한 공사였다. 그러나 그 공사에 자신의 굵은 땀방울과 피 같은 열정을 바친 이들의 자긍심은 존중 받아 마땅하며, 기억해야 할 우리의 정신적 유산이다. 전쟁 후 북한의 위협에 전전긍긍하고 가난의 위세에 몸을 움츠려야 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뭔가를 이뤄 놓았다는 성취감만큼 필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는 말썽 많고 탈도 많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보게 되는 우리 경제 성장사의 맏아들 같은 존재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