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강은 인간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집트부터 중국까지 세계 고대 문명들이 큰 강을 끼고 발전한 것은 유치원생도 아는 상식이다. 강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먹을 물을 떠오는 곳이었고 고기를 잡는 무대였으며 그 유역에 펼쳐진 너른 평야는 인간에게 더 많은 생산력을 지니도록 하는 1등 공신이었다. 이후 역사가 발전하고 인간의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강에는 여러 목적들이 더해진다. 그 중의 하나는 교통로로서의 강이다. 아등바등 고개 넘고 산을 넘어야 하는 육로에 비하면 강 하류에서 배를 띄우면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노 저어 가는 뱃길은 일종의 유람길과도 같았던 것이다. 우리 국토의 허리를 가르는 한강을 살펴 보자.




▲ 우리나라 강 지도 (출처: 국토포털 http://www.land.go.kr)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서 흘러 드는 강이다. 남한강의 수원은 태백산 근처고 북한강의 발원지는 금강산 근처다. 그 강이 흘러흘러 오늘날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지나는 한강에 이르는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오늘날의 노량진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르면 남한강 쪽으로는 충주 단양을 거쳐 영월까지도 갈 수 있었고 (바로 비운의 단종 임금이 귀양간 경로다) 북한강을 따라가면 강원도 북부 내륙 깊숙이 빠져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북한강의 지류 가운데 소양강이 있었다. 강원도 인제에서 발원하여 춘천에서 북한강과 합쳐지는 이 강은 4천만의 애창곡 <소양강 처녀>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다. 백발노인부터 아직 풋내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해 저문~~ 소야앙강에~~를 들으면 어깨가 움씰 거리는 이 ‘국민가요’는 실상 그리 역사가 오래지 않다. 그리고 그 ‘소양강 처녀’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 살아 있다. 



▲ 소양강처녀상(출처: 코레일 http://www.korail.com)



박상용 저 <노래로 세상 엿보기>에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 이 작가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온 처지였다. 그 씩씩함에 마음이 끌린 이들이 레슨도 해 주었는데 제대로 레슨비도 내지 못하는 이 처녀는 스승이자 선배님들을 고향인 소양강 상류로 초대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소양강에 뜬 섬으로 뱃놀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나는 등의 에피소드를 겪은 후 작사가 반야월이 자신의 느낌을 가사로 만들었고 그것이 <소양강 처녀>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1969년 발표되어 공전의 히트곡이 됐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노래의 주인공 윤기순은 그 후 30여 년간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다가 몇 년 전에야 “그리워서 애만 태우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던 무렵, 소양강에는 산을 허물고 물길을 바꾸는 대공사가 펼쳐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지하철 1호선과 더불어 3대 토목공사의 하나로 불리는 소양강 댐 공사가 그것이다. 



▲수풍댐(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MediaPop)



양강 댐에 대한 아이디어는 일찍부터 나왔다. 이미 1957년경부터 한국전력은 소양강에 수력 발전용 댐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는 분단의 비극에서부터 유래한다. 해방 전후 한반도의 전력 공급의 1/3은 압록강 유역에 건설된 수풍댐 수력 발전소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평안북도 삭주군 구곡면 수풍동에서부터 안동성 관전현 갈자구(碣子溝)까지 약 900m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이 수풍댐은 그 높이가 106.4m, 체적 311만㎥에 이르렀고 총 70만㎾(10만㎾×7)의 수력발전량을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댐이었다. (중앙일보 2010.8.6 서울대 박태균 교수) 그런데 해방 이후 분단이 고착화하면서 미 군정이 전기료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북은 전기를 끊어 버렸다. 그 이후 아득바득 건설한 화력발전소들도 전쟁에 잿더미가 된 게 대부분이었던지라 한국의 전력 사정은 지극히 오랫동안 깜깜했다. 어떻게든 발전소를 지어 제한송전 시대를 끝맺은 것이 1964년이었으니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전력 사정이 안 좋아 평양 시내에도 툭하면 정전이 된다는 북한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지만 아무튼 그 즈음의 전력 생산량은 북한에 비해서도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다 보니 한강 상류 소양강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저기에 댐을 짓는다면.....” 


그러나 언감생심이었다. 공사비만 해도 수백억이 들 것이 뻔한데 그 비용을 무슨 재원으로 조달한단 말인가. 서울 인구가 340만 명이고 전국 인구는 2,900여 만 명, 서울 시내버스 요금이 그 해 60% 인상되어 8원이던 시절이었다. (건설저널 2001.7 격동의 반세기 중)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당시 한창 독립 깃발 올리던 아프리카 국가들과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섬진강댐(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MediaPop)



그런 사정 하에서 드라이브를 건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된 섬진강 댐 공사에 착수함과 거의 동시에 정부는 일본공영에 소양강 댐 설계 용역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도 엄두가 안 났다. 섬진강 댐의 저수량은 1억 3천만 톤 정도였지만 소양강댐은 그 몇십배 규모였다. 어찌 어찌 해보려고 해도 아득하게만 보이는 공사였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길은 엉뚱한 곳에서 트였다. “1965년 대일 청구권 문제 해결이 담긴 한일(韓日)기본조약이 조인됐다. 일본이 한국에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무상으로 지불하고, 경제협력으로 정부와 민간에 각각 2억 달러와 1억 달러를 차관해 준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정부는 대일 청구금 중 일부를 소양강댐 건설에 투입하기로 했다.”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드디어 댐 공사의 중요한 물꼬가 터진 것이다.


본격적인 건설 이전 중대한 문제 하나를 결정해야 했다. 댐을 어떻게 무엇으로 지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앞서 언급한 수풍댐을 건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일본 굴지의 토건회사이자 애초의 소양강 댐 설계자였던 일본공영은 시멘트 콘크리트 댐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 일본 회사의 기술자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경력과 규모의 건설사 대표 하나가 그에 반기를 들었다. “아닙니다. 콘크리트 댐보다는 사력댐 (모래 자갈 등을 원료로 하여 건설한 댐)이 더 낫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주영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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