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땅에 대한 집착의 역사는 그 유서와 내력이 웅숭깊고 방대하다. 더 넓은 땅을 위하여 수없는 전쟁이 일어났고 “단 한 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데 때로 그 땅을 넓히기 위한 전쟁의 상대는 ‘자연’이기도 했다. 바다를 메우고 호수를 흙으로 덮어 땅을 만들고 싶었던 ‘간척’의 역사 또한 유구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그 흔적이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간척 사업이 공식적으로, 그리고 국가적 사업으로 행해진 것은 고려 시대였다. 몽골의 파도와 같은 공세에 밀려 강화도로 피난 갔던 고려 조정은 식량 부족에 직면했다. 남부 곡창 지대에서 세미(稅米)를 실어 나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원래 강화도 인구에다가 육지로부터 피난 온 사람들까지 더해진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강화도 땅은 너무 좁았다. 고려 고종 25년이었던 1248년 강화도 연안을 간척하여 농지를 확보하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이 간척 사업은 이후로도 몇 차례 반복되어 강화도의 지도를 바꾼다. 

 



▲강화도(출처: 구글맵 http://maps.google.co.kr)



오늘날 강화도의 지도를 보면 고구마처럼 뭉툭한 모양이다. 하지만 13세기만 해도 강화도는 우리가 서해안의 지형을 두고 지리 시간에 배운 바,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이었다. 들고 나고가 끝이 없는 반도와 만의 연속, 그리고 그 일대에 점점이 박힌 섬들까지. 오늘날의 강화도는 700년에 걸친 부단한 간척의 결과였다. 


그 시대의 간척 사업은 그야말로 인간의 살덩이 같은 노고와 하염없는 시간의 투입의 산물이었다. 갯벌에 통나무를 박아 토사가 쌓여 제방 구실을 할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다가 배후지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간척이었으니 그야말로 ‘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이 산을 옮김)에 필적하는 자연과의 싸움이자 공존이었다. 한 뼘의 갯벌이 새로 생겨야 비로소 한 뼘의 농토가 생기는 이치였기에 바다의 갯벌과 인간의 땅은 나란히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하고 나아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들이밀면서 한국에서의 간척 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바다보다 낮은 땅 네덜란드로부터 간척 기술을 배워 온 일본은 조선의 바다를 메우고 흙과 바위를 쏟아 붓는 대규모 간척 사업을 벌였다. 그렇게 넓힌 농토에서 나는 쌀을 군량미로 쓰겠다는 심산이었고 넓어진 항구를 통해 대륙 침략의 길을 닦겠노라는 의도였다. 


1917~38년에 걸쳐 일제는 총 12만 3,458m, 농지 1정보당 3.02m에 해당하는 방조제를 축조했으며, 오늘날 ‘지평선이 아스라하게 보이는 유일한 곳’ 호남평야의 상당 부분은 이 과정을 통해 이뤄진 간척농지이다. 간척은 갯벌이 있고 리아스식 해안이 있는 서해안에서 활발했는데 전남 강진에서도 그 실상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남 강진읍에서 칠량쪽으로 나가다 보면 군동 하신마을과 ‘합섬’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이 ‘합섬’은 원래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올라 있던 섬이었다. 이 섬을 둘러쌌던 바다와 갯벌은 간척 사업으로 사라졌고 오늘날은 그 이름으로만 왕년에 자신이 섬이었음을 알리고 있을 뿐, 논바닥 가운데 솟아오른 야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간척 사업 이전의 계화도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생선 비린내를 찾는 고양이처럼 간척이 가능한 지역을 찾던 일본인들이 전쟁 말엽 주목했던 곳이 전북 부안이었다. 부안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떠 있던 계화도를 잇는 방조제를 착공한 것이 1944년이었다. 일제는 섬진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여 그 물로 간척지의 농업용수를 충당하고 낙차를 이용한 수력 발전까지 가동할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일본이 곧 패망하면서 계획은 한낱 꿈으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인들이 착공했던 댐은 20년 동안 산골짝의 흉물로 남아 있었다. 이 댐을 다시 짓고 간척지를 이용, 국토를 넓히겠다는 야심에 다시금 불을 지핀 것은 박정희 정권 당시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때였다. 


“정부는 61년 칠보발전소와 섬진강댐 건설 착수와 함께 계화도 간척사업을 한데 묶어 동진강지역 종합개발 수리간척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사업에 대한 건교부와 농림부 관련 공무원들의 대부분은 사업성공 여부에 회의를 가져 시행에 고개를 저었다. (중략) 특히 그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간척사업의 선진국 네덜란드의 용역사도 타당성 조사보고서에 공사불가능 판정을 내렸을 정도였다.” (새전북신문 2003년 11월 11일) 


그러나 댐 건설은 강행됐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발휘된 것은 좋았으나 졸지에 차오르는 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섬진강변 주민들의 슬픔은 지극히 안된 일이었다. 집들은 제대로 철거되지도 않은 채 물에 잠겼고 주민들은 인근 부대 막사에서 살거나 움막을 지어야 했고 학생들은 학교를 잃고 나무 그늘에서 수업을 해야 했다. 댐과 간척지에 투입된 사람들은 국토건설단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그들은 전국에서 잡혀온 부랑자와 깡패들이었다. 아무 법적 근거 없이 부랑자와 깡패라는 이유로 강제로 삽을 들어야 했고 감독들이 총을 차고 공사를 지휘하는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할 용감한 시골 사람들은 드물었다. 


국토건설단원을 비롯한 근로자들의 피해도 컸다. 특히 바다에 둑을 쌓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작업이었던 간척지 공사는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난공사였다. 1차 방조제 준공 직전 급류에 상당 부분이 쓸려 나간 순간은 실로 아득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돌망태기에 돌을 담아 광산에서 쓰는 트롤리에 담아서는 계곡물처럼 빠르게 흐르는 바닷물에 쏟아붓기를 멈추지 않은 끝에 1966년 1차 방조제가 완성됐다. 그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 김원용 할아버지의 증언은 자못 긍지에 차 있다. 


“불가능하다는 일을 해낸 거야. 해양청과 수시로 무전으로 통화를 하면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철수하고 나가면 다시 흙을 쏟아 붓고 하기를 반복하는데, 바닷물이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쏟아 부은 흙의 3분지 1은 쓸려 나가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지만 그래도 계속하니까 메워지더라구. 지금도 지나다 보면 마음이 뿌듯해.” (오마이뉴스 2009.12.16) 



 

▲섬을 잇는 계화도 간척지(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렇게 만들어진 땅이 여의도의 10배가 된다는 계화도 간척지였다. 그리고 이 넓지만 황량한 땅에 처음 이주한 사람들은 바로 섬진강댐으로 수몰된 2700여 세대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방조제는 완성됐고 평야는 눈 앞에 드러났지만 그건 소금 평야였다.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평생 바다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은 그 소금 평야를 파헤치며 방조제의 영향으로 바뀐 환경 속에서 사라져 가는 조개와 백합을 캐며 생존을 이어갔다. 그들은 고향 섬진강 상류에서 끌어온 물로 소금기를 없애며 한때 바다였던 땅을 옥토로 바꾸어 나갔다. 어떤 이는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이주권을 푼돈에 팔아 넘기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계화도는 끝내 육지가 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쌀 ‘계화미’의 산지가 된다. 


1978년 세워진 계화도 간척 준공 기념탑에는 노산 이은상이 쓴 헌사가 새겨져 있다. “‘서해의 조수가 밀려들면 파도소리만 요란하고 조수가 물러나면 아낙네들 조개 줍던 여기가 오늘은 씨 뿌리고 김 매고 벼 향기 무르익은 양지옥토로 바뀌어질 줄 어느 뉘가 알았으랴. 이것은 박 정희 대통령의 특별분부를 받들어 우리 지식, 우리 기술 강인한 의지와 끈기로 불모지 갯벌을 이와 같이 개척해 놓은 것이다. 이 어찌 민족의 자랑스런 업적이 아니겠는가.”


이 헌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기본적으로 갯벌은 불모지가 아니었다. 갯벌은 못 쓰는 뻘밭이 아니라 바다의 숨구멍이요 온갖 해양자원의 요람이요 원래 계화도에 살던 사람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바다를 육지로 바꿔 놓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분부’ 때문이라기보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공사에 몸을 던져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 산골짝에서 실려와 소금밭을 일궈야 했던 농민들, 갯벌을 잃고 바다에만 삶을 매달아야 했던 계화도 원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