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를 기억하시는지. 싸움을 해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물고 할퀴고 정도를 되풀이하던 유인원 무리 가운데 하나가 짐승의 정강이 뼈를 주워 든다. 그리고 그 정강이뼈로 누군가를 후려치자 그는 맥없이 고꾸라져 버리고 정강이 뼈를 치켜든 유인원의 집단은 승리를 맛본다. 그 도구를 하늘로 던졌을 때 영화는 수억 달러의 돈이 들어간 최첨단 우주비행선으로 오버랩 된다. 인간이 도구를 쓰기 시작한 이래의 수백만 년의 시간을 영화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결국 정강이 뼈는, 정강이 뼈를 든 손은 ‘영장류’에서 ‘인류’로 나아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음을 표현했다고나 할까. 



 

 

▲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틸 컷(출처: 네이버 영화 http://bit.ly/11PEGhj)



그렇듯 인간은 도구를 쓰면서 비약적인 발전의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는 그로부터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즉 아프리카의 원숭이에서 조금 벗어난 별종의 생물이 돌 깨서 만든 타제석기 (요즘은 뗀석기라고 부른다)를 쓴 이래 그 후예들은 수백만 년 동안 또는 수십만 년 동안 고만고만한 석기를 사용해 왔던 것이다. 그를 좀 더 예리하게 갈아 만든 석기를 사용한 이른바 신석기 시대는 1만년 전에나 겨우 시작됐고 청동기와 철기는 더욱 그보다 더욱 짧다. 그 가운데 철기의 발명은 인류 역사의 또 하나의 획을 긋는다.

 

원소명 Fe, 기호 26번인 철은 가장 안정적인 원자핵을 갖고 있고, 지구의 지각에서는 산소와 규소, 알루미늄 다음으로 많은 원소이며 지구 무게의 약 35%를 차지한다고 한다. 철은 청동기보다 녹는점이 높았다. 즉 철의 발견은 더욱 더 발전된 야금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철기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중동 지역의 힛타이트 왕국에서는 제련된 철이 은(銀)의 40배 가격으로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철기 제련 방법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 상리 출토 철기 및 청동기(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러나 인간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으랴. 철기는 급속도로 유포되어 청동기를 압도했다. 일단 구리보다 단단했고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인류 문명의 본격적인 발전은 철기 시대의 도래와 때를 같이 한다. 철기로 된 도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했으며 더 우세한 기술로 만들어진 철기 무기와 갑옷들은 그를 갖추지 못한 세력을 격멸하고 정복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 철기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족속들은 절치부심 더 강력한 철기에 골몰했고 그러면서 철기는 점점 더 발전했다. 언젠가 방영됐던 드라마 <주몽>에서 등장한 ‘철검’의 의미를 기억해 보면 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철의 생산지는 곧 각축의 현장이었고 동시에 번영의 초석이었다. 고구려가 오늘날 중국의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요동이 철의 주요한 산지였기 때문이다. 끝내 요동의 주인이 된 고구려는 기병과 말을 전부 쇠로 감싼 개마무사(鎧馬武士)들의 중기병 집단을 운용하는 동북아시아 최강의 무력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찍이 철이 많이 나서 당시 중국인, 왜인들까지 몰려들어 철을 샀고 철기가 화폐처럼 쓰이기도 했다는 변한 지역 (낙동강 이서)은 이후 가야와 신라의 무력 기반이 되기도 했다. 병사들의 온몸과 말까지 감싼 철기는 상대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만 명의 병사들을 철기로 무장시켰던 철 생산력은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에서 오히려 둔화된다. 특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던 조선 시대에서 광업은 견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1430년(세종 12년) 무렵 전국에는 66개의 철광과 17개의 제련소가 있었지만 철광석 채광활동은 농한기에도 규제됐다. 구리채광은 1423년(세종 5년)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진됐지만 그래셤의 법칙이 적용된 동전이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유통되지 않으면서 화폐주조도 1445년(세종27년) 막을 내렸다. 구리 채광은 무기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했다.”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http://blog.hankyung.com/raj99/19126467 중) 야금 장인들의 수와 활동 또한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으니 제철 기술이 발전할 여지는 매우 적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기에 비해서는 광공업이 활성화되기는 하지만 조선의 제철 기술은 여전히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비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신미양요 때 광성진 전투였다. 조선군의 대포가 미군의 함포에 댈 것이 못되었고 광성진을 흠씬 포격한 미군은 이윽고 상륙하여 성벽을 기어오른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조선군들은 용감히 맞서 싸운다.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황현의 <매천야록> 중) 이는 미국측의 기록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다.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백 여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엘버트 가스텔) 


그런데 그들은 왜 무기를 잃었으며 왜 칼은 부러졌을까. 그것은 철의 차이였다. 근대적 제철 기술의 산물인 강철 총검에 부딪친 조선군의 칼과 창은 맥없이 휘거나 부러져 버렸던 것이다. 흙을 뿌리며 덤비는 조선군은 물론 용감했지만 이는 황망하게 무기를 잃은 이들의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흡사 흑요석 창을 휘두르던 잉카 제국의 용사들이 철제 무기 앞에 쓰러져 가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 겸이포 제철소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가내 수공업이나 동네 대장간이 아니라 근대적 제철소에서 철을 생산하는 것을 구경이나마 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1918년 황해도 송림시에는 일본의 미쓰비시 제철이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고 함경북도 청진에도 제철소가 서지만 철강 산업 자체가 일제 군수공업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제철소에선 주로 상품이 아닌 선철을 생산했고 그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실려갔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죄다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그저 공장의 노예일 뿐이었다. 1920년 겸이포 제철소에 폭탄이 던져질 만큼 착취와 학대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보낸 후 해방이 왔지만 전쟁이 덮쳤고 그나마 있던 모든 시설은 잿더미가 됐다. 그것이 신생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포항제철 시리즈 

> 포항제철 2편

> 포항제철 3편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