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남과 북은 살벌한 군사적 대치를 이어가면서 저마다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고 국민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발전을 모색해야 했다. 북한은 어느 미국 공군 조종사들이 증언한 바 “석기 시대로 돌아간” 수준이었고 남한도 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일단 먼저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북한이었다. 그리고 재기의 선봉이자 상징은 역시 철강 산업이었다. 일본인들이 지었던 제철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황해제철소, 4.13 제철소 등이 연달아 지어졌으며 철광부터 시멘트까지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북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믿기 어려운 통계이긴 하지만 북한의 공업 생산액 성장률은 1958년 42%, 1959년 53%에 이르고 있었다. (프레시안 2013.4.19 “북한이 쥔 양날의 칼 전쟁” 기사 중) 



 

▲ 삼화제철소 전경(출처: 공감코리아, 포스코홍보실 http://bit.ly/14G9MvU)



남한도 ‘산업의 쌀’이라 불리며 산업화 사회의 기본 사양이 되는 철강 산업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주목할 것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던 삼화제철소다. 삼화제철은 원료의 부족과 기술 부족으로 개점휴업 상태이다가 전쟁 말기에 근근이 다시 가동된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했다. “1952년과 53년에 부흥 사업비 3억 4,357만 환을 투입하여 8기의 고로 (철광석등의 원료를 사용하여 선철(銑鐵)을 만드는 제선(製銑)과정의 핵심 설비) 중에서 3기를 보수하고, 54년부터 가동하였지만 석 달도 되지 않아 연료난과 자금난으로 57년까지 휴업하게 된다.”

( http://blog.daum.net/ekdmawoalqmffhrm/36543 에서 인용) 


인천 지역에도 제철소가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삼화제철소가 있는 동해안 지역을 주목하고 그 일대에 종합제철공업단지를 지을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1958년 8월 26일 상공부가 양양 지역을 주요 입지로 한, 연간 선철 생산 2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밝힌 것이다. "이 계획은 ICA(국제협력기금) 자금 3000만 달러, 내자 150억 환으로 1965년까지 선철 20만 톤 생산 규모의 시설을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은 10월 4일 상공부 산하 철강자문위원회가 정부에 건의함으로써 재확인되었는데, 외자 3475만 달러, 내자 248억 3500만 환으로 1965년까지 대한중공업공사가 맡아 건설하되 제철 방식은 고로용광법과 직접환원제철법(RN법)을 병용하고 제강 방식은 LD(Linz-Donawitz) 방식으로 한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포스코 35년사 중) 



 

▲ 양양 광산(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런데 왜 이승만 정권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주목했을까? 이는 사실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였다. 없는 형편에 외국에서 철광석 원료를 사올 수 없으니 국내산 철광석을 이용해야 했고 양양철광은 1933년 일본의 석정광업소에 의해 개발된 이후 1980년대까지 국내 철광 생산량의 60%를 생산해 내던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외자유치 실패와 정부 부처간의 미숙한 일 처리 등 다양하지만 뻔한 이유로 이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61년 민주당 정부 역시 동해안 일대에 제철소를 들여놓을 계획을 세우지만 그 정권이 단명(短命)에 그침으로써 동해안 제철소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1공화국과 2공화국 정권의 야심 찬 그러나 소박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더라면 양양 삼척 묵호 일대에 제철공업단지가 어떻게든 들어섰을 것이고 아마 ‘강원도의 힘’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휘되었을지도 모른다. 설악산 정상에서 우람한 종합제철소의 굴뚝을 보며 감회에 젖거나 동해안으로 피서 왔다가 제철소 견학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 역시 국토 어딘가에 종합제철소를 지으리라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기회만 나면” 그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1962년 민정 이양 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제철소 입지를 고르는 한편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몇 차례 실패를 맛본 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미국 대통령 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유수의 철강지대인 피츠버그 공업지대를 찾아가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 회장을 만나 사업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1966년 12월 코퍼스를 중심으로 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이 그 닻을 올리게 된다. 참가국은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어찌 어찌 물주들을 구했으니 이제는 어디에 그 보따리를 풀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양양의 국내 철광석은 그 품질 문제로 매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철광석을 수입해 올 것이라면 우선 필요한 것이 항구였다. 그럼 어디로 할 것인가. 항구라는 이름이 앞에 붙는 도시 태반이 그 고려 대상이 된다. 동해안의 삼척, 묵호, 속초, 월포, 포항, 울산과 남해안의 부산, 진해, 마산, 삼천포, 여수, 보성, 목포 그리고 서해안에 있는 군산, 장항. 비인, 아산, 인천 등 총 18개 지역이 후보군에 오른 것이다. 


일단 정부는 선진국들에게 자문을 요청한다. 일본측 조사단은 울산 염포리와 마산, 삼천포를 추천했고 미국 기술진 역시 삼천포와 울산을 꼽는다. 이들의 평가와는 별도로 각 항구도시들은 제철소 유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각 도시에서 시민들이 주최하는 유치 대회가 개최되어 “제가 반드시 제철소를 우리 고장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각 지방 사투리들이 들끓었다. 청와대까지도 정치인들을 앞세운 로비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후보 도시 가운데에는 인구 2만이 좀 넘는, 도시라고 하기엔 좀 무안한 포항도 있었다.



 

▲ 1967년경의 포항시가지 (출처: 포스코 블로그 http://blog.posco.com/40)



주민들 태반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도시의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뜻밖에도 해병 1사단이었다. 이를 잘 드러내 주는 일화가 있다. 해병대원들이 휴가를 나와 포항 시내에서 워낙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니자 이에 분개한 시장과 유지들이 해병 1사단장을 찾아간다. “부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대책을 세워 주시오.” 이에 해병 1사단은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휴가 장병들을 트럭에 몰아넣고 터미널에서 하차시켜 포항 시내에서 사고를 치지 않고 고향으로 직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포항 시내 음식점과 술집들이 당장 파리를 날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아뿔싸 싶었던 포항 시장은 다시 1사단장을 찾아간다. “저기... 없었던 일로 해 주시겠습니까.” (매일신문, 박병선 동부지역 본부장의 글 중 일부 인용) 포항은 그런 곳이었다.   



포항제철 시리즈

항제철 1편

> 포항제철 3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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