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는 향후로도 한강의 역사, 우리 도시 건설의 역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뒤 광나루에 걸려 있던 광진교 역시 국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된다. 두 다리 폭파 후 한강은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차단하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전쟁 발발 3일만에 함락될 만큼 전선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수도 서울의 1백만 시민들, 피난을 가다가 다리 위에서 폭발과 함께 사라진 사람들과 그를 지켜보며 망연한 비명을 질렀던 피난민들, 그리고 그 폭발의 순간까지도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며 서울을 지키고 있던 대략 4만 명의 국군 장병들 모두에게 끊어진 한강다리는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나마 있던 다리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모두가 폭파됐다. 철수하지 못한 시민들은 3개월간의 ‘인공치하’를 견뎌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도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서울 수복 기념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부관들이 난색을 표한다. “한강 다리가 철교고 인도교가 죄 끊어져서 서울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맥아더 원수는 아주 간단하고 시원한 한 마디를 남긴다. “Make one." 하나 만들어.


까라면 까는 것이 군대였고 물량과 장비는 넘치는 것이 미군. 그들은 한강철교를 밤새 복구해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를 강북 땅을 밟게 한다. 한강인도교 역시 일단 응급 복구를 받고 1차선으로만 재개통된다. 다리를 다시 지을 여력도 여력이었겠지만 또 언제 인민군이 내려와 우리 손으로 폭파시킬지 모르는 전쟁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한강 인도교 개통식(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1953년 12월 28일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5개월 뒤 한강인도교에서는 색다른 기념식이 열린다. “아직 본교(本橋)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의 편의를 돕기 위해 다리 양쪽에 나무판으로 만든 보도를 깐 것이다.” (경향신문 1983.9.3 이 한 장의 사진 중) 한강대교의 완벽한 재준공도 아니고 사람들 겨우 다닐만한 나무 판을 까는 공사였지만 기념식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이 등장하여 미군 장성과 함께 테이프를 끊는다. 비슷한 시기 이승만 대통령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를 대동하고 광진교 복구 공사 현장에서 기술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강 다리라는 것이 얼마나 다급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끊어진 한강 철교를 포탄 탄피로 대충 이은 다리 위로 차량이 오가야 했고 일반인들은 군사용으로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발급된 ‘도강증’을 지녀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서울에 집을 둔 사람들도 지방에 내려갔다 오려면 도강증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니 끊어진 한강다리가 얼마나 야속해 보였겠는가. 


남북으로 분단된(?) 서울을 본격적으로 이어 보려는 시도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야 재개된다. 폭파는 순식간이었지만 복구는 그렇게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우리 능력으로는 벅찼고 ICA (미국 국제원조처)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 공사를 완성한 것이 현대건설이었다. 공사비는 무려 10억 환 가까이 들어간 이 공사는 돈도 돈이었지만 대단한 난공사였다. 폭파돼 물에 빠진 교량이 장애물 역할을 해 수중 기초공사에 적잖은 애를 먹어야 했고 콘크리트에 파일을 박을 때는 잠수부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 잠수부들이 작업을 하러 한강을 자맥질치며 내려갔다가 혼이 나가서 올라오기도 했다. “불발탄이 강바닥에 쌓여 있습니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들이박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한강대교 복구준공(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전후 복구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라 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는 1958년 5월 16일 ‘한강대교 준공식’으로 그 결실을 맞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다리 위를 걷는다. 8년 전 전쟁 때 일찌감치 후퇴해서 대전에서 “서울 사수”를 방송했던 그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다리 위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원혼들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날 한강 백사장에는 수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몰려들어 새로이 이어지는 한강의 남과 북을 축하했다. 한강인도교는 정식으로 ‘한강대교’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귀에 익은 한강대교의 이름은 사실상 이때를 기점으로 한다. 이후로도 한강대교는 강남북을 잇는 거의 유일한 다리였다 (물론 광진교도 있었지만 그 물동량, 그리고 서울의 중심부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요성에 비추어 한강대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4.19 때 흑석동의 중앙대학생들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기치를 들고 한강을 건너 경무대로 향했던 것도 이 다리였고 그 1년 후 해병대 병력들이 그들의 서울 진입을 막으려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교환했던 것도 한강대교였다. 광진교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외롭게 서울 시민들의 일상을 지켜온 한강대교는 1962년에야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다. 수도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하고 서울 서부 지역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전쟁 시 원활한 군의 이동을 위해 (유사시 군과 민간인이 따로 사용할 다리가 필요했다) 한강다리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제2한강교, 오늘날의 양화대교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