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가 정국을 달군 적이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의 뜨거운 쟁점이었으며, 이것이 ‘수도’ 서울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된 끝에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관습상의 수도’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관습상’ 수도는 고조선 이래 수도였던 평양이나 천년 신라의 고향인 경주가 돼야 하지 않는가 따위의 의문은 들지만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할 수 있는 얘기는 당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은 이 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강고한 의식을 드러낸 실례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집착(?)은 심지어 북한 정권에서도 보인다. 북한 정권 역시 1948년 제정된 그들의 헌법상 명기된 수도는 그들이 정권을 휘두르던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이다. 그게 고쳐져서 평양을 수도로 한 건 1972년 12월, 그 이전까지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던 수도 역시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셔블’이 되고 ‘서울’이라는 이름에 이른, ‘수도’(首都)의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서울’이 한강을 끼고 북악을 머리에 인 오늘날의 서울이 된 것은 불과 600여 년 전이었다. 1994년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성대하게 치렀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619년째다,  그리고 이 역사를 만든 건 조선 태조 이성계였다.  




▲ 태조 이성계 초상(http://encykorea.aks.ac.kr/ 어진박물관)



조선 왕조가 탄생한 것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으로부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받은 (또는 빼앗은) 날로부터 시작했다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여전히 이성계는 ‘고려’의 왕이었고 그 수도는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개경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오백년 도읍지’의 개경. 


아마 요즘의 ‘관습 헌법’이상으로 개경을 서울로 여기는 관념이 강력했고 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성계를 동북면 시골뜨기 취급하거나 왕씨 고려를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 태조는 천도를 결심한다. 




▲ 한양도성 배치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성계의 마음은 꽤 급했던 것 같다. 용상에 앉은 지 달포도 안돼 천도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 언급한 장소는 고려 왕조 시절 남경이었던 한양. 북으로 북악산, 동으로 지금의 동대문 근처 낙산, 남으로 용산 지역까지를 망라했던 이 한양 땅은 문종, 숙종, 충선왕 등 고려 왕들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곳이기도 했다. 이 일대에 남경이 설치된 것은 까마득히 옛날인 고려 중기 때부터였으며 공양왕은 실제로 이 지역에 천도를 시도한 바 있었다. “송도 왕씨 다음은 한양 이씨”라는 도참설은 이미 까마득히 옛날의 무신 정권 시절부터 집권자 이의방이나 이의민을 들뜨게 했었거니와 실제로 나라를 얻은 이성계가 천도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남경이 설치된 지 200년 가까이 됐으니 건물이나 도로 등 기본적인 도시 기반이 갖춰져 있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천도 의사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판중추부사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반대론의 일부를 들어보자. “신 등이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새 도읍으로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도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흔히 듣는 변명 중의 하나로 “내 사적 이익을 떠난 공익적으로” 반대한다는 논리이지만 우리는 그 변명이 대개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하물며 송도에 토지와 집이 있는 사람은 남은만이 아니었다. 개국공신 가운데에도 개경에서 태를 묻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생활 근거지 또한 개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도라니. “내 재산과 토지 때문이 아니오라.....”를 내세워 반대할 밖에. 그러나 태조의 마음은 달랐다. 


이후 불거지는 새로운 도읍 결정 과정에서 나온 푸념이긴 하나 이성계는 이렇게 대신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을 명문세가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를 내 어이 모르겠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중지시키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천도 과정은 시행착오와 번복과 재번복의 연속이었다. 즉위한 다음 해에 풍수도참에 능하다는 권중화라는 이가 계룡산 지역의 신도읍지도를 만들어 바쳤고 이성계는 이에 마치 사랑에 눈먼 남자처럼 다급하게 대처한다. 임금의 부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핑계로 계룡산 남하를 만류하던 신하들을 무시하고 계룡산에 이른 이성계는 수도를 그리로 정하고 필요한 공사 건설을 지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 태조 이성계의 속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너무나 부실하게 장만된 것이 문제였다, 지역의 입지나 교통의 문제, 조세 징수의 편리함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신하들의 의견 공유도 없이 일단 땅부터 파고 봤던 일종의 14세기판 불도저 정책이었다. 주변 백성들도 죽을 맛이었다. 계룡산이 있는 충청도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인근의 타도 사람들도 징발돼서 난데없이 계룡산 자락에 모여들었고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는 인적 물적 자원의 주요 징발 대상으로 부상한다.  




▲터만 남은 계룡산 주초석(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계룡산 공사는 강행됐다.  고역에 못이긴 사람들이 탈주를 감행하고 그들을 잡는 대로 목을 치면서도 궁궐의 기초를 다지고 성벽이 들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 수도 건설을 밀어붙이던 이성계는 10개월 뒤 한 장의 상소문을 받는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것이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풍수를 고증해보면 물길의 방향이 좋지 못하옵니다.” 하륜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감탄한 태조는 계룡산의 도성 공사를 중단시켜 버린다. “이곳이 아닌갑다.” 류의 돌변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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