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 둥 살 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 신도 완성 추측도(출처: 계룡시)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 데다 큰 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그제야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 무악 지도(출처: 서울시편찬위원회)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 도성 성곽(출처:서울시)



전설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다음 해 ‘도성축조도감’이 시작됐고 그 다음 해(1396)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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