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조선 오백 년 수도 한양을 상징하는 인물의 동상을 세운다면 이 사람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삼봉 정도전.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일찍이 고려 말 동북면 촌구석에까지 찾아가 이성계의 군대를 보고 “이런 군대로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담한 소리를 내뱉어 이성계의 야망을 어루만졌던 정도전. 그는 이성계의 제갈량이었고 장자방이었다. 풍수가 좋다고 수도를 국토 남단의 산골짝으로 들어가는 주장을 막았던 사람도, 안산 옆이 좋으냐 인왕산 아래가 좋으냐, 왕이 남향(南向)으로 좌정할 것인지 동향(東向)으로 앉을 것인지 등등 중대한 논의부터 시시콜콜한 시비까지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킨 사람도 정도전이었다.


훗날 태종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500년 동안 역적의 이름이 되어, 그 시를 좋아하는 것조차 불온한 사상을 지닌 것으로 치부되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바로 이 혐의를 썼다.) 비극의 주인공. 하지만 그가 신생 왕조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그 수도 한양의 초석을 닦았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종 때 명신 신숙주는 이렇게 정도전을 표현하고 있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영웅 호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나 선생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늘날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 이름과 숭례문, 돈의문 등 한양 도성 성문의 이름을 몽땅 다 지어 바친 것도 그였다. 그 중 경복궁의 정전이라 할 ‘근정전’(勤政殿)이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동시에 매우 교훈적이다. 





▲ 근정전 (출처: 경복궁 홈페이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중략)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것으로서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풍수 어쩌고 하며 계룡산이 좋네 송도가 좋네 하는 사람들에게 “풍수 따위가 아니라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일갈했던 정도전. 그 모습 그대로 정도전은 그 명명을 통해 왕의 할 일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 출처: 네이버 지도



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新)수도 건설본부장’ 정도전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수도 한양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린다. 이성계의 후계자로 어린 막내아들 방석을 밀었던 그는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 최고의 목표물이 되어 죽었던 것이다. 종로구에 가면 재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 재동의 어원은 잿골이다. 동네 이름이 잿골이 된 것은 뭔가를 감추기 위해 잔뜩 재를 뿌리면서 생긴 이름이었다. 왕자의 난 때 죽어간 병사들의 피가 강물을 이뤘고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서 재를 뿌려댔으며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 피 가운데에 신수도의 건설자도 끼어 있었다. 

 

이 피 냄새가 싫어진 이들 가운데는 조선의 두 번째 왕 정종이 있었다. 그는 어머니 신의왕후 한 씨의 무덤을 찾는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돌아간 후 한양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재천도였다. 수십만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궐을 지은 지 수 년 만에 한양은 또 다시 버려질 위기에 처한다. 그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겨 온 것은 태종 이방원이었다. 한양은 이방원 스스로 권력의 정상에 올라섰던 왕자의 난의 무대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운 하륜은 또 다시 무악 천도론을 외치고 나오면서 문제는 또 다시 혼란에 빠진다. 


 


▲ 한양도성 터에서 발견된 공사책임자 이름과 구간, 구간 등을 기록한 '각자 성돌'(출처: 서울시)



불과 몇 년 전까지 5백 년 도읍지였던 개경, 이방원의 1등 공신이라 주장하는 하륜이 주장하는 무악, 이미 백성들의 피땀으로 성벽을 쌓고 궁궐도 지은 한양. 이 셋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태종은 기상천외한 수법을 사용한다. 바로 동전던지기.


이 역사적인 동전던지기에서 한 곳은 2길 1흉 (2번이 길하고 1번이 흉한)의 점괘가 나와 나머지 두 곳의 1길 2흉(하나만 길하고 두 가지는 흉하다)을 누르게 되는데 이 2길 1흉의 주인공이 바로 한양이었다. 이미 “점을 쳐 놓고도 딴 소리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이들이다.”는 임금의 선언이 있은 뒤라 군말도 투덜거림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가 태종 4년인 1404년이었으니 왕조 개창 이후 시작된 천도 논의가 무려 10년에 걸쳐 종결된 것이다.


태종 이후에야 한양은 500년 도읍으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청계천이 뚫려 도시를 관통하게 만든 것도 이때였고 시전행랑을 만들어 상업지구를 조성하고 도시의 미관과 생활 환경을 고려한 명실상부한 도성의 모습을 갖춘 것이 이 시기 이후의 일이다. 청계천이 동서를 가르고 종로통에 상점이 운집하고 광화문 앞에 관청들이 늘어섰던 오늘날의 서울의 원형이 확립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의 계획 수도 한양은 10년의 세월과 치열한 입씨름과 수만의 백성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거쳐 형성됐고 유지되고 오늘로 이어지게 된다. 한 나라의 수도가 풍수가 좋다는 이유로 계룡산으로 들어갈 뻔도 했고, 다시 개경으로 도로아미타불 되기도 했고, 결국은 동전던지기로 결정된 역사가 좀 겸연쩍긴 해도 서울은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함께 한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6백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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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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