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1903년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소망을 이룬 이 기술적 쾌거는 금세 세계로 전파돼 나갔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행기가 첫 선을 보인다. 1913년 일본 해군 기술장교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자신이 만든 "나라하라 4호"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체공 시간은 불과 수십 초. 날아올랐다가 허겁지겁 땅에 내려앉는 수준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을 전해 주었다. 


1차 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 살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 안창남(출처: KBS)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환하고 아름다운 빛)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 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 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 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자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 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 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 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 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특별한 경우로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 창경궁 위를 나는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 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 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 넓은 비행장 한 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 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렇게 안창남은 죽었다. 하지만 조종사 학교 1년 후배 가운데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신용욱이라는 사람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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