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새 우는 소리에 달무리가 짙어간다. 엄마는 연신 눈물을 훔친다. 내일이면 딸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으로 딸의 고운 손을 어루만진다.


“큰 애야 미안허다. 니 친구들이 다들 중핵교 갈 때 너를 식모살이 보냈던 일 정말 미안허다.”


“엄마 울지마. 그 땐 다들 그랬잖아. 아랫말에 살던 경순이도 안고샅에 살던 영순이도 돈 벌이 나갔었구, 동생이 다섯이나 있으니 엄마를 더 도와드려야 하는데 시집을 가게 돼서 오히려 죄송해요.”


“그런 말 말어라. 니 덕에 동상들이 핵교도 댕기잖냐. 더는 집 걱정 말구, 찬찬히 살펴보니 가진 건 없어도 사람이 실한 게 너 하나는 건사 하것더라. 시집가믄 남편 잘 성구고 시나브로 쓸고 닦어야 한다. 집안이 깨끗해야 재물도 들어오는 법이니께.”


눈물이 볼을 타고 베갯잇에 스민다. 푸른 밤하늘을 울리는 소쩍새 소리에 진달래는 밤새 붉었다.



막 중학생이 된 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누이 집을 방문하곤 했다. 길을 나설 때면 어머니는 찬거리를 보따리에 싸서 손에 들려주신다. 벌레 먹기보다 싫은 짐을 들고, 먼지 뽀얀 완행버스로 신작로를 달린다. 읍내에서 빨간색 직행버스로 갈아타면 대전이다.


메슥거리는 속을 눌러가며 누이가 일러준 정류장에 내린다. 주택가 골목길, 몇 번인가 다녀갔지만 이 골목이 그 골목 같고, 이 집이 그 집 같다. 낯선 길모퉁이를 서성이고 있을 때면, 노심초사 기다리던 누이는 언제나 달맞이꽃 얼굴로 환하게 나를 맞는다.


누이집의 출입문을 열면 연탄화덕, 석유곤로와 자그마한 찬장이 보인다. 방에 오르는 섬돌 옆에는 수도꼭지, 세숫대야와 짤순이가 서있고, 어른 서넛 쯤 겨우 누울만한 단칸방엔 14인치 텔레비전과 장롱 그리고 앉은뱅이 화장대가 놓여있다. 풍족하게 마련해 주지 못한 누이의 세간이 눈에 밟히셨을 어머니는 채소며 쌀이며 찬거리를 처마 밑 제비새끼 모이 물어주듯 보내셨다.



이듬해 누이는 아들을 낳았다. 외손(外孫)은 성(姓)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가외로 치시던 할아버지도 재복(在福)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며 흡족해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더욱 기뻐하셨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엔 시집가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일도 시골에서는 흉이었던 데다가 어머니도 첫아이로 딸을 얻었던 까닭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났다. 기저귀를 삶기 위해 석유곤로에 얹었던 대야가 누이의 발등에 떨어졌다. 마땅히 돌봐줄 사람이 없기에 누이와 조카는 친정으로 왔다. 화상의 상처는 매우 깊어 벌건 속살이 드러난 발목은 거즈를 거르지 않고 갈아줘도 진물이 그치질 않았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기어드는 뱀처럼 엄습해 오는 통증에 누이는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자연스럽게 조카를 돌봐야 하는 날이 잦아졌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양송이 스프로 이유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칭얼대기라도 하면 포대기로 업어 재우기도 했는데, 가끔 녀석이 오줌을 싸는 통에 등이 흥건하기도 했다. 초여름에 왔던 누이는 찬바람이 날 무렵 조카와 함께 대전으로 돌아갔다.


그랬던 조카 녀석이 지난 10월 12일 장가를 들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가족들의 표정에서 인생을 더듬는다.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과 기도로, 아버지의 화수분 같은 부지런함으로 6남매가 자랐듯이, 바퀴살처럼 연결된 혈육의 수레바퀴 그 가장자리에서 오줌싸개가 일가를 이루고 생명을 잉태하는 출발선에 선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손자며느리를 통해 늙음과 죽음을 생명으로 치환시킨다. 또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완성해 나가는 누이 부부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객을 맞는다. 밀어뒀던 숙제를 끝냈다는 후련함, 아들과는 이제 한걸음 쯤 거리를 둬야한다는 아쉬움이 엿보인다. 누이는 3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어머니의 길을 따라 간다.


북적이던 예식장을 뒤로하고 누이 집에 둘러앉는다. 오래 전 손을 꼬옥 잡고 나란히 누워 서럽게 베갯잇을 적시던 모녀도 함께였다.


“큰 일 치르느라 애썼다. 암껏도 없는 집 맏이로 태어나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고상만 시키다가 시집을 보낸 게 마음에 걸려 얼마나 껄련했던지. 그래도 니가 아들 딸 셋을 잘 키우고 며느리를 얻는걸 보니 맘이 조금은 편하다. 옛말에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인갑다.“


“아녀요. 엄마가 도와주셔서 이만큼 살았지.”


누이의 눈가에 새벽이 맺힌다.


“그래, 앞으로는 동기간에 더욱 우애 있게 지내거라. 땅 한 뼘 없는 집에 엄마가 시집왔을 때, 아버지가 날품을 팔아 오면 겉보리 한 말도 못 샀지. 하루 양석도 안 됐어. 세월이 좋아 지금은 하루만 품 팔아도 쌀 반 가마는 사겠더라. 참 좋은 시절인디 늙어 가는 게 너무 억울햐. 내가 조금만 젊었어도…….”


“그런 생각일랑 접으시고 농사를 좀 적게 하셔요. 농사져서 자식들 나눠주려 애쓰지도 마시구요. 그냥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는 게 자식들 도와주는 거예요. 면사무소에서 한다는 건강 체조 교실도 빼먹지 말고 다니시구요.”


“그래야지. 그래야 좋은 시절 좀 더 꼿꼿하게 살지.”




달콤 쌉쌀한 추억담은 가을 문턱의 귀뚜라미 소리처럼 정겨웠고, 베란다 창밖엔 반달이 빙긋이 떠올랐다.


그날 밤 소쩍새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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