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당시 축구팀(출처: 대한 축구협회)


좀 오래된 에피소드를 더듬어 보자. 

1954년 한국 축구팀은 일본을 꺾고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일본을 물리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스위스에 어떻게 가느냐였다. 


대한민국 축구팀은 미 군용기를 타고 일단 일본으로 가 다시 방콕을 찍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시절,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불확실하게 되는 바람에 두 자리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는 동양인 장정들의 사정을 안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 표가 없어서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기들 자리를 양보해 준 덕에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경기 시작 전날이었다. 


한국팀은 헝가리에게 9대 0으로 깨진다. 처참하게 패배한 후 벌러덩 누워버린 선수들 머리에는 “비행기라도 제대로 타고 왔으면!” 하는 울분이 솟았을지도 모르겠다. 


 

▲ 대한항공공사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축구 선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외국을 방문할 때는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야 하는 나라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갈 때는 미군이 군용기를 내 주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갈 때는 동경과 독일을 오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서울에 들러 박정희 대통령을 태우고 갔다. 1917년생이니 쉰도 안된 젊은 나이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62년 이후 국영화됐던 ‘대한항공공사’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적자덩어리의 공기업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았다. 박정희는 내로라 하는 기업들에게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타진했지만 죄다 거절당한다. 아니 못하겠다고 읍소했을 것이다.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내는 화근덩어리를 누가 떠맡을 것인가. 


이때 월남 특수를 맞아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던 한진그룹에 박정희 대통령의 눈길이 갔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조중훈 회장을 찾아 의사를 타진했고 완곡하게 거절하자 대통령이 직접 조중훈 회장을 호출한다. 조중훈 회장 본인의 회고대로 대통령이 부른다면 “알겠습니다” 아니면 “죽여주십시오” 해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조 회장의 고민도 깊었으리라. 회사 중역들은 죽어도 못한다고 뻗대시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조중훈 회장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하기야 일국의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나오는 데에는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은 게 내 소망이오.” 아 가난한 나라의 소박한(?) 대통령. 



대한항공공사가 보유한 항공기는 DC9 프로펠러 비행기를 비롯하여 DC-3 2대, DC-4 1대, F-27 2대, FC-27 2대, 도합 단 8기였다. 이걸로 항공사라고 자처하기도 어색한 노릇이었다. 당장 비행기를 들여와야 했는데 비행기를 들여오는 돈도 문제, 그걸 채울 승객도 문제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세계 최빈국에서 갓 벗어난 나라에 뭘 보러 오며 국민소득 100달러 남짓의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꿈꾸려면 아직 여러 세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회장 얼굴만 바라보는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 우리가 길에서 사업을 했고 길에서 사업을 키웠고 바닷길도 그렇듯이 모든 사업을 길과 함께 했는데 이제 하느님이 하늘길도 개척하라고 선물을 주셨으니 한 번 키워 봅시다.” 

(월간중앙 이호 기자, “父子 배짱 하늘을 날다” 기사 중) 


 


▲ 73년 대한항공 보잉 747기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대한항공은 사업 인수 7개월 만에 사이공 노선을 개척하고 한국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실어 나르는 기염을 토했고 5년 거치 10년 상환을 조건으로 하던 정부 불하금을 5년 만에 거뜬히 갚았으며 10년 되는 해, 1979년에는 대한민국 국적기가 태평양을 건너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 공항에 착륙하는 일대 거사를 이루게 된다. 


대한항공사 직원들에게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 몇 차례나 비행기를 갈아타며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한국인들에게도 태극마크 선명한 감동이었다. 


대한항공은 전혀 다른 견지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땅 밑’의 문제였다. 

서울 최초의 지하철 공사를 계획할 때 정부는 오랜 지하철 운영 경험이 있는 프랑스에 모든 것을 맡겼다가 막판에 기술 제휴 대상국을 일본으로 급선회했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격노했다. 외교적 단교까지 거론되고 국제 기구 회의에서 ‘자유 우방’ 프랑스가 뜻밖에 북한을 지지하는 황망함에 이르렀다니 프랑스의 분노를 짐작케 한다. 


이걸 해결한 게 대한항공이었다. 프랑스제 항공기 에어버스를 6대씩이나 구입해 줌으로써 프랑스인들을 달랬던 것이다. 



 ▲KAL858 폭파범 재판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분단과 냉전의 장벽은 하늘길에도 대단한 애로 사항을 뿌려 놓았다. 

유럽을 가려면 뻔히 지도상으로도 보이는 중국과 소련 영공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로 가서 북극 항로를 거쳐 가야 했고 일본을 가든 미국을 가든 북한 영공을 저만치 피해 우회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비극도 벌어졌다. 


항로를 잘못 택해 소련 영공에 들어가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했던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사건과 원인 불명의 항로 이탈로 소련 극동군의 군사기지가 밀집한 캄차카 반도 위를 비행하다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돼 사할린 앞바다의 비극으로 남은 KAL 0007기 사건, 그리고 북한이 KAL기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저지른 KAL 858기 사건 등 뼈아프게 슬픈 역사도 그 성장의 기록 속에 핏빛 주머니로 매달려 있다. 



한국으로 향하는 세계의 하늘길, 그리고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하늘길은 더욱 분주해지고 풍성해졌다. 8대의 비행기는 수백 대로 늘어났고 1988년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설립되면서 대한항공은 독점 시대를 마감하고 경쟁 체제로 접어들었다. 하루에도 각양각색 국적의 수백 대의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인천 공항과 좁은 국토의 곳곳을 분주하게 오가는 태극과 색동 무늬의 비행기들을 바라보노라면 한국 항공 산업이 “떴다 떴다 안창남” 이후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해 온 과거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연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전 세계 수십 개국 수십 개 도시를 직항으로 오가는 요즘을 1954년의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바라본다면 어떤 격세지감이 들는지. 앞으로도 한국의 하늘길은 더 넓어지고 더 분주해질 텐데.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