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서울 인구는 1백만이었다. 전쟁 후 도시 집중 현상이 전개되면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1966년 작가 이호철은 이미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내놓고 있는데 이때 인구는 380만 명이었다. 


천만 인구의 위용을 자랑하는 요즘의 눈으로 보면 에계계 싶기도 하겠지만 당시 서울은 이 정도의 인구를 감당할 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 시절까지 다리는 교통로로서는 별 기능을 못하던 광진교까지 세 개, 대교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양화대교와 한강대교만이 그 넓은 한강에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버스는 아침마다 짐짝처럼 사람들을 싣고 달렸고 어른의 뜀박질보다 느렸던 전차가 요긴할 지경이었다. 


이 서울을 바꿔 놓은 사람 중의 하나라면 불도저 시장 김현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공사장 기공식에 가서 테이프 커팅을 한 가위를 벽에 걸어놓는 것으로 시장실 인테리어를 대신했다는 이 에너지 만점의 시장은 북악스카이웨이부터 중랑천도로까지, 남산1,2호 터널부터 세운상가까지 서울의 지도를 바꿔 놓았다. 서울 시내를 다니던 전차까지 없애 버린 김현옥 시장의 머리 속에는 또 하나의 야심 찬 아이디어가 있었다. 


1968년 7월 5일자 동아일보는 김현옥 시장의 서울시내 순환 전철 노선 발표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도심순환선은 답십리에서 세종로를 거쳐 양화대교에서 다시 서빙고로 동진하여 금호동과 행당동에 이르는 오늘날의 2호선과 비슷한 노선이었고 방사 1호선은 마포에서 여의도를 거쳐 김포에 이르는 오늘날의 5호선과 유사했다. 그러나 불도저 김현옥 시장도 그 전철을 땅 밑으로 달리게 할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기술과 자본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으리라 여겼을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손정목, 한국도시 60년 이야기 - 한울 중) 


 

▲ 69년 세종로(출처: E-영상역사관 e-history.co.kr)



불도저의 배터리도 꺼질 때가 왔다. 1970년 와우 아파트가 와그르르 붕괴된 것이다. 산비탈의 급경사에 제대로 된 지반 공사도 없이 쌓아 올린 아파트는 그 안에서 곤히 잠자던 사람들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김현옥 서울 시장은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그 뒤를 이어서 경상도 남해 출신의 양택식이라는 이가 시장에 임명된다. 그는 지방관으로 나서기 전에 철도청장을 역임했던 사람으로서, 철도의 수송 능력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지하철을 건설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취임 한 달 만이었다. 


이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됐을 때 한국 경제의 사령탑이라 할 경제기획원장 김학렬은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대통령에게 대놓고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고까지 극언을 했던 것이다.


 "한국 경제의 현 단계는 아직도 긴축경제가 필요합니다. 안 그래도 인구 증가가 격심한 서울에 지하철 건설 같은 대규모 건설을 실시하면 인구의 격증 현상이 가중되며 주택난과 교통난도 훨씬 심각해집니다, GNP가 300달러의 나라에서 지하철은 투자의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장이 보기에 서울시 예산이 650억 정도 되던 시절, 300억을 훨씬 넘게 잡아먹을 것으로 추산되는 지하철 공사를 무조건 해보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촌놈’ (김학렬 부총리는 양택식 시장을 이렇게 불렀다고)이 갑갑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종일 일로만 살았고 주말도 청사에 나와 업무를 보는 일중독자 같은 서울시장의 의지도 쉽게 꺾이지 않았다.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건설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부총리와 지하철을 건설해야 서울이 산다는 서울 시장 사이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주재 대사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 이후락이 지하철망이 잘 발달한 일본의 경험을 강조하며 지하철 건설 찬성론을 펴자 박정희 대통령도 결심을 한다. 땅 밑으로 기차를 달리게 하자! 정부는 공식적으로 지하철 건설을 발표하는데 공교롭게도 그를 발표한 사람은 지하철을 극구 반대했던 김학렬 경제기획원장이었다. 


 

▲ 서울 지하철 기공식(출처: E-영상역사관 e-history.co.kr)



이 결단에 가장 환호한 이는 아무래도 양택식 시장이리라. 이후 그에게는 하나의 별명이 붙게 된다. ‘두더지’였다. 지하철 공사 기간 내내 지하 구간을 누비고 다니며 공사를 독려한 때문이었다. 비서진에 따르면 새벽부터 밤까지 도처를 돌아다니고 회의를 소집하고 면담을 잡아 비서진들이 죽을 노릇이었다고 한다. 지하철 건설 자문역을 맡았던 일본은 자본과 핵심 기술 뿐 아니라 토목 기술 지원까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으나 한국 정부는 토목공사만큼은 한국이 책임진다는 의지를 보였고 결국 우리 손으로 우리의 지하를 뚫게 된다. 당시 예정했던 노선은 이랬다. 


1호선은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의 7.8킬로미터, 

2호선은 영등포에서 왕십리까지의 35.5킬로미터, 

3호선은 미아동에서 불광동까지의 21,5킬로미터, 

그 외 5호선 노선까지 설정했던 장기 건설 프로젝트였다. 


 

▲ 종로선 개통식(출처: E-영상역사관 e-history.co.kr)



마침내 1974년 서울역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1호선 공사가 완공됐다. 기공식 때 3만 서울 시민이 운집했던 것도 그렇고, 한국 최초의 지하철 준공식이란 당연히 대통령이 참석해서 경축사를 읽고 유공자를 표창하고 두루 지하철의 완성을 세계에 알려 마땅한 행사였고 그날 조간신문도 지하철 준공 소식을 대서특필했으나 이날 준공식 행사는 침울하게 끝났고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했다.


준공식 직전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연설 중인 대통령을 노리고 총을 쏘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그 총탄에 맞아 절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 다급한 상황 하에서도 지하철 운행 현장을 찾아 시승을 한다. 지하철이란 그런 존재였다.



▷ 대한민국 지하철의 역사_2편보기 (http://korealand.tistory.com/2420) 

▷ 대한민국 지하철의 역사_3편보기 (http://korealand.tistory.com/2447)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