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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31 한강다리 7편(마지막편)


강남(江南) 개발은 미국 서부 개척과 비슷한 면이 있다. 

허허벌판 인적 없는 곳에 철도가 놓이고 금맥이 발견되면서 “Go West!"를 부르짖으며 서부로 달려갔던 미국인들처럼, 서울 시민들은 전쟁이 터질 경우 3-40만 명을 수용할 방공호를 겸하여 지어졌던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쭉 뻗은 한남대교를 건너 황량하게 펼쳐진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강남으로!’를 부르짖으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땅 장사를 하고 그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정치 자금을 조성하는 가운데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 하는 토지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골드 러시’였지만 한국은 ‘랜드 러쉬’였다. 


당시 정부의 기조는 ‘강북 인구 분산’이기도 했다.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의 도심 기능을 어떻게든 분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도 강남 개발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72년 초 양택식 서울 시장은 이런 기자회견을 한다.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강남에 터를 닦은 것이 유흥업소들이었다. 대규모 유흥업소들이 연속부절로 강남에 자리잡았고 강북 도심에서 간단히 1차를 끝낸 주당들은 “2차!”를 부르짖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제3한강교를 향해 ‘쏘았다.’ 


이윽고 75년 구자춘 서울 시장은 ‘한강 이북 지역 택지 개발 제한 조치’를 발표한다. 강북의 임야나 토지가 택지로 개발되는 일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묶인 돈과 욕망 역시 제3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게 된다. 



 

▲ 영동지구 주택건립공사(1973년 청담) 출처: http://bit.ly/17gNY5R



1971년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를 필두로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 강변에 아파트의 성채가 쌓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즈음까지만 해도 아파트 이름은 마포 아파트나 와우 아파트 같은 식으로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현대건설이 그 브랜드 이름을 아파트에 붙여 ‘명예를 걸고’ 만들었음을 과시하면서 이후로는 건설사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아파트 이름으로 하는 시대가 열린다.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는 1978년 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유명해지면서 제3한강교 건설 후 변화한 강남의 위상을 웅변으로 보여 주게 된다. 바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사원용으로 지은 900여가구 가운데 600여가구를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 등에게 특혜 분양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70년대 이후 부유층의 주거지로 이름 높은 그 이름은 그렇게 형성됐다. 




 

 

▲ 경기고 종로구 화동 교사 마지막 졸업식(76') / 정신여고 이전 공사 기공(78') (출처: http://bit.ly/17gNY5R)



사람이 살려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이들도 길러야 하고 교육도 시켜야 했다. 힘깨나 쓰고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이 대거 강남으로 몰려가면서 강북에 있던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들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강남으로 옮긴다. 

수십 년 명문이었던 경기고가 76년 강남으로 옮겼고 휘문고등학교도 그 뒤를 따랐으며 서울고등학교도 한강을 건넜다. 여고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명여고, 숙명여고 등이 강남행을 단행함으로써 강남은 완전한 신천지로 변했다. 


그 신천지에 지칠 줄 모르고 사람을 풀어놓은 파이프라인이 바로 제3한강교였다. 



 

▲ 출처: 다음 뮤직 http://music.daum.net/album/main?album_id=7211&song_id=255872



작달막한 제주도 출신 여가수 혜은이가 디스코 열풍을 불러 온 노래 <제3한강교>를 발표할 무렵(1979)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외국같이 변한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 제목으로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다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뒤의 가사는 원래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였다. 그런데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 난감한 가사로 변신하고서야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막 태어난 또 하나의 서울. 흥청망청의 여흥과 일확천금의 욕망, 그리고 좌절과 박탈의 슬픔이 공존하던 시기의 강남, 그리고 제3한강교를 오가던 젊음들에게는 오히려 원래의 가사가 더 어울릴 수도 있었으련만 강남에 땅 한 자락 사 놓고 톡톡히 재미를 봤던 당시의 ‘지도층’들은 노래 가사에는 그렇게 엄숙했다. 


그래도 제3한강교 아래로 한강과 세월은 유구하게 흘렀고 1982년에는 ‘한남대교’로 그 이름이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 출처: http://encykorea.aks.ac.kr/

 


팍팍한 시골 생활 접고 불안하기만 한 희망을 찾아 서울로 이사 오던 가족들은 한남대교 건너 아득히 바라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았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와 그 너머에 우뚝 솟은 남산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으로 곧장 연결되는 다리이자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한남대교에서 자살하려 했다는)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빛과 그림자의 다리이며, 말년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 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달릴 때 지나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역사의 다리이기도 하다. 


한남대교는 그렇게 서울을 바꾼 다리였고 또 하나의 서울과 옛 서울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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