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화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6.13 [간척시리즈] 3편 - 서산
  2. 2013.05.23 [간척시리즈] 2편 - 서산
  3. 2013.05.16 [간척 시리즈] 1편 - 계화도


역사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그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름의 맨 앞에 서는 사람은 있다. 그가 반드시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또는 선량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 의지와 창의는 다른 사람들의 등을 떠밀고 어깨를 빌리고 손발을 움직이게 만든다. 유조선까지 끌고 와 초속 8미터로 흐르는 바닷물을 막아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유조선이 저만치 밀려간 풍경 앞에서 아연실색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다시 예인선을 부르라”고 호령하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역시 그랬다.




▲ 유조선 공법(출처: 대한건설단체총연합회 http://bit.ly/19AUhFF)



“물탱크 채워!” 22만 6천 톤의 육중한 폐유조선이 점차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 몸체가 해저에 닿으면서 해수의 흐름은 완연히 그 기세가 꺾였다. “지금이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 이틀 만에 지긋지긋하던 물막이 공사가 이뤄졌고 290억의 공사비와 36개월의 공사기간이 절약됐다. 본격적인 간척 사업이 전개됐다. 새로이 육지가 될 운명이었던 서산 A,B 지구의 넓이는 여의도의 33배, 1억5537만㎡(4700만평)의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일대의 해안선은 110킬로미터에서 8킬로미터로 10배가 넘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흙을 쏟아 부어 바다를 육지로 만들었다고 해서 금방 쓸 수 있는 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 수 백 만년 동안 바다였던 곳의 소금기를 빼는 데에도 몇 년의 세월이 들어갔다. 그 지난한 작업이 끝난 후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지평선과 수평선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거대한 평원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농지 면적의 1%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벼농장.


  

 

▲현대서산농장 (출처: http://www.hdfnd.co.kr/)



<광야에서>를 노래하면서도 진짜 ‘광야’는 만주 벌판 쯤에서나 봐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 광막한 땅덩이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비행기에서 농약을 뿌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푸른 벼들의 바다는 그때까지 한국인에게는 외국에 가서나 눈 여겨 볼 수 있는 일종의 신천지였던 것이다. 정주영 역시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서 땅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타고난 농사꾼이었던 그는 세심하게 작황을 살폈다. 제대로 추수가 안된 곳이 눈에 띄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 직원은 “한번은 그가 B지구의 풀 속에서 추수가 안된 보리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농사꾼이 어디 곡식을 남겨두는 법이 있느냐’며 내리 30분 동안 혼이 났다. A지구에 가서 무논에 벼 포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서야 화가 누그러졌다”라고 말했다. 윤석용 영농작업부장은 “그분은 곡식을 무척 아꼈다. 벼를 뽑아 보고 뿌리의 생육 상태를 본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심어 놓게 했다. 이삭을 세어 볼 때도 모가지를 뽑았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2000.11.30) 뿐만 아니라 “시험 영농이 있었던 1985년부터 15년 동안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에 전화로 ‘영농 현황 보고’를 받았다. 장비들의 작업 위치가 어디인지, 송아지가 새로 몇 마리나 태어났는지, 논에 물은 충분히 차 있는지, 그는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어 물었다”고 하니 가히 상상이 간다.


땅에 대한 집착은 그가 바로 이 땅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트라우마일지도 몰랐다. 그 자신 “서산농장의 의미는, 수치로 나타나는, 혹은 시야를 압도하는 면적에 있지 않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 뼘 한 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내 땅' 한 마지기란 지주 앞에서 죽는 시늉도 하고 돌밭 자갈밭 가리지 않고 곡괭이질을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했던 수백만 농민들의 가슴에 엉킨 한이요 숨길을 막은 가래요 토해 내고 싶은 핏덩이였다. 이는 또한 그 자식들이 이 악물며 꿈꾸던 "내 집 한 칸"의 소망으로 이어졌다. 바다를 평야로 만드는 간척은 그래서 희망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우화 하나를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루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달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온다면 간 거리만큼의 땅을 주겠다는 말에 우화 속 주인공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를 외치며 가능한 멀리까지 나아간 뒤 출발점으로 돌아오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리다가 숨에 차 쓰러져 죽고 만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의지가 욕심으로 화하고 소박한 희망이 대박의 탐욕으로 변할 때 행운은 악운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배운다 . 



 

▲ 출처: 공간정보 오픈플랫폼 http://map.vworld.kr/map/maps.do#



우리는 많은 땅을 얻었다. 호남평야의 너른 들, 서산 앞바다를 메우고 생긴 서산 농장, 그리고 서울 시민들의 생활 쓰레기를 몽땅 받아 안고 있는 김포 매립지까지. 5톤짜리 바윗돌을 공깃돌 부리듯 하는 그 무지막지한 바다를 돌과 흙으로 메우고 유조선으로 물을 막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옮기고 바꾸면서 한국인들은 그 역사에 없던 거대한 땅덩이를 국토에 편입시켰다. 이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대단한 용기의 소산이었다고 치하할 만하다. 그러나 아울러 그 광대한 땅은 그 넓이만큼의 풍성한 갯벌과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만큼이나 값진 황금 어장을 소멸시키고 생겨난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구는 많고 땅은 좁은” 콤플렉스에 갇히던 시절로부터 벗어 난지는 이미 오래고, ‘내 땅’에 목숨을 걸던 시대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롭다. 그렇다면 이제는 험한 바다를 메우던 용기와 아울러 과연 우리 국토를 더욱 효율적으로,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유익하도록 가꾸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때에 도달하지 않았을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에 감격하고 스스로를 고무할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뽕나무 밭은 뽕나무 밭대로, 푸른 바다는 푸른 바다대로 우리가 발 딛고 노 저어 살아야 할 터전으로 삼아야 할 때가 아닐는지. 일제 시대 이래 간척의 역사는 20세기를 관통하고 장악했다. 이제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또 다른 역사(役事)를 필요로 할 것이다. 용기와 집념에 더하여 신중한 지혜와 미래를 위한 슬기가 곁들여진, 그리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새로운 역사 말이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간척은 땅을 얻는 대신 갯벌을 잃는다. 1992년 전국 1호로 쌀 품질을 인증받은 ‘계화미’는 간척사업의 소산이었지만 원래의 갯벌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과 풍요로운 수산 자원들은 그 덕분에 사라졌다. 또한 거기에 식구들의 끼니를 기대고 살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눈물을 삼키며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좁은 국토와 많은 인구”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의 트라우마, 그리고 개발의 성과와 그를 통한 이익 창출이라는 장밋빛 전망은 일제 시대 이후 서남해안 곳곳의 지도를 바꿔 놓았다. 이 간척 사업의 성패와 이해(利害)를 떠나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또 잊을 수 없는 굵직한 추억을 남긴 곳을 들자면 충남 서산일 것이다. 




▲ 서산마애삼존불(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서산은 예로부터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사비에서 바다로 나가는 경로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으로 가는 백제의 사신과 상인들은 멀고 험한 바닷길을 나서기 전 마애삼존불 앞에서 합장하며 자기 자신과 일행의 안위를 빌었는지도 모른다. 기실 서산 앞바다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할 만한 곳이었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해미읍성에서 보듯 바다로부터의 침략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건 서산, 태안 일대의 험한 바다였다. 삼국 시대 이래 헤아릴 수 없는 배들이 서산 앞바다의 험한 물길에 그 수명을 다했던 것이다. 



충청남도 안면도는 과거 색다른 지명으로 불렸다. “쌀썩은여”. 

이 기이하고 생경한 이름에는 바로 서산(태안) 앞바다의 무서움을 증명하는 사실이 숨어 있다. 영호남에서 세미(稅米)로 거둬들인 쌀들을 가득 싣고 서울로 향하던 조운선들이 이 일대의 강한 조류에 휘말리거나 암초에 부딪쳐 수도 없이 침몰했고 거기에 실린 쌀들이 바다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 지명이었던 것이다. 


얼핏 이 ‘쌀썩은여’에서 일어난 주요 사고만 봐도, 태조 4년(1395년)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했고, 태종 14년(1414년)에 전라도 조운선이 무려 66척이나 가라앉아 200여 명의 생목숨이 물에 묻혔으며 5천800석의 세곡이 바닷물 속에서 썩는 신세가 됐다. 그 이후로도 사고는 끊이지 않아 이곳은 난행량(難行梁-지나기 어려운 바다)라고 불렸다. 

세조 때 이걸(安行梁)으로 바꿔 봤지만 이름 바꾼다고 팔자 바뀌는 것이 아니기는 사람이나 바다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안면도가 섬이 된 것은 이 참극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발버둥친 조상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이 위험한 ‘안행량’을 피하기 위해 고려 시대부터 운하를 팠고 마침내 인조 대에 공사를 성공시켜 육지와 안행량 사이의 수로를 뚫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 안면도는 이때부터 ‘섬’이 됐다.


이 험한 바다를 끼고 있는 서산에는 또 하나 특이한 이름의 지명이 존재한다. ‘부석면’ (浮石面)이다. 이는 경북 영주의 유명한 고찰 부석사에 등장하는 부석(浮石)과 동일한 이름이며 유사한 전설에 휘감겨 있다. 의상 대사가 서산 부석면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 하자 동네 사람들이 방해했고 의상을 사모했던 당나라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신하여 큰 돌을 허공에 띄워 위협하여 동네 사람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경북 영주의 부석(浮石)은 부석사 경내에 남아 있는데 반해 충남 서산의 부석은 바다 위에 뜬 채로 절 공사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안면도 (출처: http://encykorea.aks.ac.kr)



실제로 부석면 앞바다에는 ‘검은여’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만조 때에도 그 윗부분은 완연히 드러나 있어 문제의 ‘부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석에는 또 다른 전설 하나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부석은 ‘쌀 위에 있는 부석’으로서 ‘그 아래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흘 동안 먹을 곡식이 잠겨 있다’는 것이다. (서산민속지- 서산문화원, 1991)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만 왠지 의미심장한 예언 같기도 하다. 실제로 간척 사업이 벌어질 때 서산 앞바다의 물살은 수십 톤짜리 바위도 둥둥 떠내려 보낼 정도였으니 이는 곧 떠다니는 돌, 즉 부석(浮石)이었을 것이요, 간척 사업이 마무리된 뒤 엄청난 농토가 생겨나 비행기로 농약을 뿌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석 밑에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가 사흘 먹을 곡식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현실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험한 물길의 대명사였던 서산의 톱니같은 해안을 간척으로 바꿔 보겠다는 꿍심을 품은 것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일제 시대 현장사무소까지 차리고 간척사업을 진행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돌을 띄우는” 강한 조류와 조수간만의 차는 끈질긴 일본인들조차 두 손을 들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 설정된 서산 간척지 A,B 지구는 그 후로도 오랫 동안 고스란히 미간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땅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한미군 개발처’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기술진까지 초빙한 가운데 간척 사업을 벌여 ‘보리 11만석 쌀 36만 석 등 90억환의 수입을 올릴 예정’(동아일보 1962년 1월 15일자)이라는 등 서산 간척 사업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서산 간척 사업을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의 주요 사업으로 다룰 것을 지시한다. (동아일보 1965년 10월 9일자) 



 

▲ 서산 간척지A지구(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러나 일본인 대신 한국인이 간척을 한다고 해서 물살이 느려지거나 조수간만의 차가 줄어들 리는 없었다. 공사를 담당한 농업진흥공사는 7억 3천여만원을 쏟아 부어 가까스로 300미터의 방조제를 설치했지만 그 이상의 여력은 없었다. 그로부터 무려 13년간 공사는 중단됐고 방조제는 방치됐다. ‘부석’은 여전히 거센 물살 위에 떠 있었고 바다를 옥토로 만들겠다는 꿈은 망상으로 치부됐다. 이 서산 앞바다에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것은 1978년이었다. 


“정부는 내년부터 총규모 4조 4천 8백억원을 투입, 63만 5천 ha의 국토를 확장하고 59만 6천 ha의 새로운 농토를 조성하는 서남해안 59개 지구 대규모 간척농지개발계획안을 마련, 그 전모를 발표했다.” (경향신문 1978년 8월 19일자) 여기에 따르면 정부는 “1천억씩을 쏟아부어도 45년이 걸리는 바, 정부의 재정형편상 단독개발이 어렵고 민간대기업의 대대적인 참여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후일 90년대의 현대건설을 이끌게 되는 이내흔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호출을 받는다. 


 “서산간척 사업을 시작하니 준비하라.”    





Posted by 국토교통부


인간의 땅에 대한 집착의 역사는 그 유서와 내력이 웅숭깊고 방대하다. 더 넓은 땅을 위하여 수없는 전쟁이 일어났고 “단 한 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런데 때로 그 땅을 넓히기 위한 전쟁의 상대는 ‘자연’이기도 했다. 바다를 메우고 호수를 흙으로 덮어 땅을 만들고 싶었던 ‘간척’의 역사 또한 유구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그 흔적이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간척 사업이 공식적으로, 그리고 국가적 사업으로 행해진 것은 고려 시대였다. 몽골의 파도와 같은 공세에 밀려 강화도로 피난 갔던 고려 조정은 식량 부족에 직면했다. 남부 곡창 지대에서 세미(稅米)를 실어 나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원래 강화도 인구에다가 육지로부터 피난 온 사람들까지 더해진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강화도 땅은 너무 좁았다. 고려 고종 25년이었던 1248년 강화도 연안을 간척하여 농지를 확보하라는 어명이 떨어진다. 이 간척 사업은 이후로도 몇 차례 반복되어 강화도의 지도를 바꾼다. 

 



▲강화도(출처: 구글맵 http://maps.google.co.kr)



오늘날 강화도의 지도를 보면 고구마처럼 뭉툭한 모양이다. 하지만 13세기만 해도 강화도는 우리가 서해안의 지형을 두고 지리 시간에 배운 바, ‘리아스식 해안’의 전형이었다. 들고 나고가 끝이 없는 반도와 만의 연속, 그리고 그 일대에 점점이 박힌 섬들까지. 오늘날의 강화도는 700년에 걸친 부단한 간척의 결과였다. 


그 시대의 간척 사업은 그야말로 인간의 살덩이 같은 노고와 하염없는 시간의 투입의 산물이었다. 갯벌에 통나무를 박아 토사가 쌓여 제방 구실을 할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다가 배후지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간척이었으니 그야말로 ‘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이 산을 옮김)에 필적하는 자연과의 싸움이자 공존이었다. 한 뼘의 갯벌이 새로 생겨야 비로소 한 뼘의 농토가 생기는 이치였기에 바다의 갯벌과 인간의 땅은 나란히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강점하고 나아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들이밀면서 한국에서의 간척 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바다보다 낮은 땅 네덜란드로부터 간척 기술을 배워 온 일본은 조선의 바다를 메우고 흙과 바위를 쏟아 붓는 대규모 간척 사업을 벌였다. 그렇게 넓힌 농토에서 나는 쌀을 군량미로 쓰겠다는 심산이었고 넓어진 항구를 통해 대륙 침략의 길을 닦겠노라는 의도였다. 


1917~38년에 걸쳐 일제는 총 12만 3,458m, 농지 1정보당 3.02m에 해당하는 방조제를 축조했으며, 오늘날 ‘지평선이 아스라하게 보이는 유일한 곳’ 호남평야의 상당 부분은 이 과정을 통해 이뤄진 간척농지이다. 간척은 갯벌이 있고 리아스식 해안이 있는 서해안에서 활발했는데 전남 강진에서도 그 실상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남 강진읍에서 칠량쪽으로 나가다 보면 군동 하신마을과 ‘합섬’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이 ‘합섬’은 원래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올라 있던 섬이었다. 이 섬을 둘러쌌던 바다와 갯벌은 간척 사업으로 사라졌고 오늘날은 그 이름으로만 왕년에 자신이 섬이었음을 알리고 있을 뿐, 논바닥 가운데 솟아오른 야산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간척 사업 이전의 계화도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생선 비린내를 찾는 고양이처럼 간척이 가능한 지역을 찾던 일본인들이 전쟁 말엽 주목했던 곳이 전북 부안이었다. 부안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 떠 있던 계화도를 잇는 방조제를 착공한 것이 1944년이었다. 일제는 섬진강 상류에 댐을 건설하여 그 물로 간척지의 농업용수를 충당하고 낙차를 이용한 수력 발전까지 가동할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일본이 곧 패망하면서 계획은 한낱 꿈으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인들이 착공했던 댐은 20년 동안 산골짝의 흉물로 남아 있었다. 이 댐을 다시 짓고 간척지를 이용, 국토를 넓히겠다는 야심에 다시금 불을 지핀 것은 박정희 정권 당시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때였다. 


“정부는 61년 칠보발전소와 섬진강댐 건설 착수와 함께 계화도 간척사업을 한데 묶어 동진강지역 종합개발 수리간척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사업에 대한 건교부와 농림부 관련 공무원들의 대부분은 사업성공 여부에 회의를 가져 시행에 고개를 저었다. (중략) 특히 그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간척사업의 선진국 네덜란드의 용역사도 타당성 조사보고서에 공사불가능 판정을 내렸을 정도였다.” (새전북신문 2003년 11월 11일) 


그러나 댐 건설은 강행됐다. “하면 된다.”는 신념이 발휘된 것은 좋았으나 졸지에 차오르는 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섬진강변 주민들의 슬픔은 지극히 안된 일이었다. 집들은 제대로 철거되지도 않은 채 물에 잠겼고 주민들은 인근 부대 막사에서 살거나 움막을 지어야 했고 학생들은 학교를 잃고 나무 그늘에서 수업을 해야 했다. 댐과 간척지에 투입된 사람들은 국토건설단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그들은 전국에서 잡혀온 부랑자와 깡패들이었다. 아무 법적 근거 없이 부랑자와 깡패라는 이유로 강제로 삽을 들어야 했고 감독들이 총을 차고 공사를 지휘하는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할 용감한 시골 사람들은 드물었다. 


국토건설단원을 비롯한 근로자들의 피해도 컸다. 특히 바다에 둑을 쌓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작업이었던 간척지 공사는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난공사였다. 1차 방조제 준공 직전 급류에 상당 부분이 쓸려 나간 순간은 실로 아득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돌망태기에 돌을 담아 광산에서 쓰는 트롤리에 담아서는 계곡물처럼 빠르게 흐르는 바닷물에 쏟아붓기를 멈추지 않은 끝에 1966년 1차 방조제가 완성됐다. 그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 김원용 할아버지의 증언은 자못 긍지에 차 있다. 


“불가능하다는 일을 해낸 거야. 해양청과 수시로 무전으로 통화를 하면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철수하고 나가면 다시 흙을 쏟아 붓고 하기를 반복하는데, 바닷물이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쏟아 부은 흙의 3분지 1은 쓸려 나가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지만 그래도 계속하니까 메워지더라구. 지금도 지나다 보면 마음이 뿌듯해.” (오마이뉴스 2009.12.16) 



 

▲섬을 잇는 계화도 간척지(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렇게 만들어진 땅이 여의도의 10배가 된다는 계화도 간척지였다. 그리고 이 넓지만 황량한 땅에 처음 이주한 사람들은 바로 섬진강댐으로 수몰된 2700여 세대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방조제는 완성됐고 평야는 눈 앞에 드러났지만 그건 소금 평야였다.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평생 바다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은 그 소금 평야를 파헤치며 방조제의 영향으로 바뀐 환경 속에서 사라져 가는 조개와 백합을 캐며 생존을 이어갔다. 그들은 고향 섬진강 상류에서 끌어온 물로 소금기를 없애며 한때 바다였던 땅을 옥토로 바꾸어 나갔다. 어떤 이는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이주권을 푼돈에 팔아 넘기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계화도는 끝내 육지가 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쌀 ‘계화미’의 산지가 된다. 


1978년 세워진 계화도 간척 준공 기념탑에는 노산 이은상이 쓴 헌사가 새겨져 있다. “‘서해의 조수가 밀려들면 파도소리만 요란하고 조수가 물러나면 아낙네들 조개 줍던 여기가 오늘은 씨 뿌리고 김 매고 벼 향기 무르익은 양지옥토로 바뀌어질 줄 어느 뉘가 알았으랴. 이것은 박 정희 대통령의 특별분부를 받들어 우리 지식, 우리 기술 강인한 의지와 끈기로 불모지 갯벌을 이와 같이 개척해 놓은 것이다. 이 어찌 민족의 자랑스런 업적이 아니겠는가.”


이 헌사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기본적으로 갯벌은 불모지가 아니었다. 갯벌은 못 쓰는 뻘밭이 아니라 바다의 숨구멍이요 온갖 해양자원의 요람이요 원래 계화도에 살던 사람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바다를 육지로 바꿔 놓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분부’ 때문이라기보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공사에 몸을 던져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 산골짝에서 실려와 소금밭을 일궈야 했던 농민들, 갯벌을 잃고 바다에만 삶을 매달아야 했던 계화도 원주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 때문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