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당시 축구팀(출처: 대한 축구협회)


좀 오래된 에피소드를 더듬어 보자. 

1954년 한국 축구팀은 일본을 꺾고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일본을 물리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스위스에 어떻게 가느냐였다. 


대한민국 축구팀은 미 군용기를 타고 일단 일본으로 가 다시 방콕을 찍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시절,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불확실하게 되는 바람에 두 자리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는 동양인 장정들의 사정을 안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 표가 없어서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기들 자리를 양보해 준 덕에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경기 시작 전날이었다. 


한국팀은 헝가리에게 9대 0으로 깨진다. 처참하게 패배한 후 벌러덩 누워버린 선수들 머리에는 “비행기라도 제대로 타고 왔으면!” 하는 울분이 솟았을지도 모르겠다. 


 

▲ 대한항공공사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축구 선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외국을 방문할 때는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야 하는 나라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갈 때는 미군이 군용기를 내 주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갈 때는 동경과 독일을 오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서울에 들러 박정희 대통령을 태우고 갔다. 1917년생이니 쉰도 안된 젊은 나이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62년 이후 국영화됐던 ‘대한항공공사’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적자덩어리의 공기업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았다. 박정희는 내로라 하는 기업들에게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타진했지만 죄다 거절당한다. 아니 못하겠다고 읍소했을 것이다.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내는 화근덩어리를 누가 떠맡을 것인가. 


이때 월남 특수를 맞아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던 한진그룹에 박정희 대통령의 눈길이 갔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조중훈 회장을 찾아 의사를 타진했고 완곡하게 거절하자 대통령이 직접 조중훈 회장을 호출한다. 조중훈 회장 본인의 회고대로 대통령이 부른다면 “알겠습니다” 아니면 “죽여주십시오” 해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조 회장의 고민도 깊었으리라. 회사 중역들은 죽어도 못한다고 뻗대시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조중훈 회장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하기야 일국의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나오는 데에는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은 게 내 소망이오.” 아 가난한 나라의 소박한(?) 대통령. 



대한항공공사가 보유한 항공기는 DC9 프로펠러 비행기를 비롯하여 DC-3 2대, DC-4 1대, F-27 2대, FC-27 2대, 도합 단 8기였다. 이걸로 항공사라고 자처하기도 어색한 노릇이었다. 당장 비행기를 들여와야 했는데 비행기를 들여오는 돈도 문제, 그걸 채울 승객도 문제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세계 최빈국에서 갓 벗어난 나라에 뭘 보러 오며 국민소득 100달러 남짓의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꿈꾸려면 아직 여러 세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회장 얼굴만 바라보는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 우리가 길에서 사업을 했고 길에서 사업을 키웠고 바닷길도 그렇듯이 모든 사업을 길과 함께 했는데 이제 하느님이 하늘길도 개척하라고 선물을 주셨으니 한 번 키워 봅시다.” 

(월간중앙 이호 기자, “父子 배짱 하늘을 날다” 기사 중) 


 


▲ 73년 대한항공 보잉 747기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대한항공은 사업 인수 7개월 만에 사이공 노선을 개척하고 한국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실어 나르는 기염을 토했고 5년 거치 10년 상환을 조건으로 하던 정부 불하금을 5년 만에 거뜬히 갚았으며 10년 되는 해, 1979년에는 대한민국 국적기가 태평양을 건너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 공항에 착륙하는 일대 거사를 이루게 된다. 


대한항공사 직원들에게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 몇 차례나 비행기를 갈아타며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한국인들에게도 태극마크 선명한 감동이었다. 


대한항공은 전혀 다른 견지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땅 밑’의 문제였다. 

서울 최초의 지하철 공사를 계획할 때 정부는 오랜 지하철 운영 경험이 있는 프랑스에 모든 것을 맡겼다가 막판에 기술 제휴 대상국을 일본으로 급선회했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격노했다. 외교적 단교까지 거론되고 국제 기구 회의에서 ‘자유 우방’ 프랑스가 뜻밖에 북한을 지지하는 황망함에 이르렀다니 프랑스의 분노를 짐작케 한다. 


이걸 해결한 게 대한항공이었다. 프랑스제 항공기 에어버스를 6대씩이나 구입해 줌으로써 프랑스인들을 달랬던 것이다. 



 ▲KAL858 폭파범 재판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분단과 냉전의 장벽은 하늘길에도 대단한 애로 사항을 뿌려 놓았다. 

유럽을 가려면 뻔히 지도상으로도 보이는 중국과 소련 영공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로 가서 북극 항로를 거쳐 가야 했고 일본을 가든 미국을 가든 북한 영공을 저만치 피해 우회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비극도 벌어졌다. 


항로를 잘못 택해 소련 영공에 들어가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했던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사건과 원인 불명의 항로 이탈로 소련 극동군의 군사기지가 밀집한 캄차카 반도 위를 비행하다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돼 사할린 앞바다의 비극으로 남은 KAL 0007기 사건, 그리고 북한이 KAL기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저지른 KAL 858기 사건 등 뼈아프게 슬픈 역사도 그 성장의 기록 속에 핏빛 주머니로 매달려 있다. 



한국으로 향하는 세계의 하늘길, 그리고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하늘길은 더욱 분주해지고 풍성해졌다. 8대의 비행기는 수백 대로 늘어났고 1988년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설립되면서 대한항공은 독점 시대를 마감하고 경쟁 체제로 접어들었다. 하루에도 각양각색 국적의 수백 대의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인천 공항과 좁은 국토의 곳곳을 분주하게 오가는 태극과 색동 무늬의 비행기들을 바라보노라면 한국 항공 산업이 “떴다 떴다 안창남” 이후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해 온 과거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연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전 세계 수십 개국 수십 개 도시를 직항으로 오가는 요즘을 1954년의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바라본다면 어떤 격세지감이 들는지. 앞으로도 한국의 하늘길은 더 넓어지고 더 분주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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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박정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별 응원도 받지 못했던 태국의 고속도로 사업을 따내 해외 건설의 물꼬를 튼 현대건설의 정주영의 이름값은 이미 꽤 높았다. 소양강댐을 중력댐으로 하자는 일본공영 측의 의견에 동조한 건설부, 수자원공사는 혹여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사력댐 주장에 혹할까 봐 불안해 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건설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건설부 장관이 현대 측의 입장을 보고서 말미에 달아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각하. 모래, 자갈로 댐을 짓다가 홍수라도 나면 춘천이 아니라 수도권이 물에 잠깁니다.” 그런데 ‘홍수’나 ‘수도권’ 같은 말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자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장관을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장관 말대로라면 콘크리트 댐이 완성된 다음 몇 십억 톤의 물이 가둬져 있을 때 북한이 댐을 폭격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모네댐/ 에델댐 (출처: http://bit.ly/11g5s0O)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은 1952년 전쟁 중 UN군 공군이 감행한 수풍댐 폭격 작전이나 영국 공군에 의해 수행된 독일의 모네댐, 에델댐 폭격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UN군의 수풍댐 공격으로 북한은 전력의 90퍼센트를 상실했고 지도부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전해지거니와 만약 댐 자체가 터졌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참화가 일어났을 테고 독일의 댐 폭파는 루르 공업지대에 실제로 심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소양강 댐은 당시로서는 최북단에 건설되는 댐이었다. 북한이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수시로 남한을 위협하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 속에 ‘안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끼어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었다. 

 

“자갈 모래로 된 사력댐이면 포격을 맞아도 풀썩 튀어 올랐다가 주저앉고 말겠지만 만수가 된 콘크리트 댐이 깨져 나가면 무슨 일이 발생하겠소?” 

 

분위기는 180도로 바뀐다. 건설부와 수자원공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각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소양강댐 설계 문제는 다시 ‘신중한 검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즈음 정주영 회장은 소양강댐을 거의 포기한 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청와대발 후 폭풍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정주영 회장에 따르면 술을 억병으로 먹은 다음 날 위에 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별안간 팔순을 넘긴 일본공영 회장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현장 재조사 결과 암반이 약해서 콘크리트 댐보다는 사력댐이 낫겠습니다. 가격도 20퍼센트 정도까지는 떨어질 수 있겠습니다. 정사장님이 옳았습니다.” 불도저 정주영의 신화가 또 한 벽돌 쌓이는 순간.  

   


 

▲소양강댐 건설현장/ 박정희 대통령 공사장 시찰(출처: 국가기록원)



마침내 1967년 4월 15일 소양강댐 건설 시작의 종이 울렸다. 1973년 10월15일 완공될 때까지 5년 6개월의 세월과 290억 원의 공사비용이 들어간 대역사. 댐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자갈과 흙은 13.5톤 덤프트럭으로 150만 여 번을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고, 당시 국민 1인당 7가마씩 돌아가는 양이었다.  소양강댐이 수용할 수 있는 물은 29억 톤으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600번 채울 수 있었으며, 수도권 주민 2,000만 명의 1년간 사용량이었다. 이 물 자체로 20만kw의 전력을 생산할 뿐 아니라 그 물로 하류의 의암•청평•팔당에 있는 3만4,000kw짜리 발전소 세 곳도 돌린다. (스포츠한국 2009.9.28)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의 준공식에서 이렇게 말하며 흥분했다. “여기, 또 하나 우리 인간이 대자연에 엄청난 도전을 하여 인간의 의지로서 자연을 극복하고 개가를 올린 산 증거를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댐은 사력(砂礫) 공법의 댐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공사가 우리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기술로서 이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데 대해서 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동양 최대의 댐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정주영 뿐이 아니다. 그의 독려 하에 매일 1천여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고 작업은 새벽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12시간 내내 이어졌다. 산을 깎고 언덕을 발라내는 난공사 속에 흙더미에 깔리고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떨어지고 폭발에 날아간 사람이 서른 일곱 명에 달했다. 물론 이것도 공식적인 수치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서 공식 사망자는 77명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 건설의 주역들 스스로 “수백 명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로서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소양강댐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장에서 죽어갔으되 위령비에 이름 석 자조차 올리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생면부지의 고장에 와 목숨을 걸고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야말로 소양강댐이라는 대역사의 주인들이었다. 



▲소양강댐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이들은 바로 소양강 주변에서 살던 주민들. 평생의 터전이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1만 8천 명의 주민들의 한숨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양강댐은 분명 거대한 역사(役事)이자 역사(歷史)의 한 장이었지만 지금까지 돌아본 소양강댐의 건설 과정에서도 우리는 ‘개발독재’의 유령을 만나고, “토건 세력과 국가의 의지가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한겨레21 2012.10.12일자) 국가 시책 앞에서 자신의 생활 터전을 ‘당연히’ 그리고 별 보상도 없이 내주고 생판 낯선 땅에서 맴돌다 스러져간 민초들의 사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흡사 재방송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다. 

 

과거는 전설로 남지만 전설은 현실을 덮지 못한다. 500년에 한 번 있는 홍수에도 끄떡없다던 소양강댐은 의기양양한 완공 이후 불과 11년만이었던 1984년 대홍수 때 1차 위기를 맞는다. 최고 홍수위인 200.4미터에 2.6미터 모자란 197.7미터의 수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500년에 한 번 홍수”란 400밀리미터 정도의 강우량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지만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는 강릉 지역에 하루 877밀리미터의 폭탄 같은 비를 퍼부은 바 있다. 그 호우가 소양강댐 일대에 들이부어진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사력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한 바 폭격에는 강할지 모르나 홍수에는 유난히 약한 댐인데 말이다. 이 같은 자연의 도전에 대해 국토해양부와 한국수자원공사는 2010년 홍수에 대비한 방류능력 증대를 위해 설치한 직경 14m, 길이 1.2km의 월류형 터널식 여수로를 완성함으로써 응전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도전은 이어질 것이고 소양강댐과 그를 지키는 사람들은 또 다른 현명한 응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역사는 소양강 물과 함께 흐를 것이다. 

 

2011년 38년 만에 소양강댐 정상부가 공개됐다. 그 해에 잠깐 들러 소양호를 내려다보던 소회는 매우 복잡미묘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평온해 보이는 물과 산과 하늘이었으나 그 평온함 속에 숨은 역사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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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몇몇 거인(巨人)이 있다면 현대그룹의 창시자 정주영 회장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으로 다를 것이고, 그의 빛의 밝기만큼이나 그 그늘 또한 깊음도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 현대사에 크나큰 발자국을 남긴 거인이었음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주판알 튕기지 말고 일단 갖다 퍼부어!”라고 호기롭게 외칠 줄 알았던 사업가였으며 이순신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외국 은행가들에게 흔들어 보이며 “당신들보다 수백 년 앞서서 우리는 철갑선을 만든 사람들이야!”라고 배짱을 부렸던 간 큰 남자였고, 그의 입버릇처럼 “안돼? 해 봤어?”를 송곳처럼 들이밀면서 지레 포기하려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찔러 대던 부지런한 경영자. 그의 이름이 소양강 댐 공사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 중력댐 방식 (출처:  http://www.damsafety.org)



1967년 현대건설은 건설부가 발주하는 입찰에 응했고 최저 가격을 써내 낙찰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회의에 들어가보니 소양강댐이 콘크리트 중력(重力)댐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중력댐이란 댐 자체의 무게로 저수지의 물을 지탱하는 콘크리트 댐을 말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 지어진 수풍댐을 비롯, 한국에 건설된 댐의 대부분이 중력댐이었다. 구조이론이 간단하고 지진에 대한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강점을 지닌 설계였지만 정주영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섬진강댐/소양강댐(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선 소양강댐은 섬진강 댐에 대하면 댈 것도 아닌 대규모인데 이걸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만든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콘크리트와 철근은 대관절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의문이 치밀었다. 1967년이면 오늘날 우람한 포스코 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포항 해변에는 삭막한 모래사장과 싸구려 횟집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제철소도 없는데다가 그 무량대수(無量大數)같은 콘크리트는 또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오래 갈 것도 없이 그 공급처는 일본 밖에 없었다. 

 

 이 소양강댐의 건설 자금은 식민 통치의 보상격으로 일본에 청구하여 받아낸 돈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한 많고 피맺힌 돈으로 댐을 짓는데 또 그 댐에 무한정으로 들어갈 재료비를 다시금 일본에게 뜸 잘 든 밥상으로 갖다 바쳐야 하는가. 정주영은 부아가 치밀었다. “설계비에 기초 자재비, 기술 용역비는 물론 철근, 시멘트, 엄청난 물량의 기자재 값까지 전부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하자는 속셈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에서) 

 



▲ 사력댐 방식 (출처: http://www.damsafety.org)



후일 유조선을 가라앉혀 간척사업을 전개했던 ‘정주영 공법’의 창시자의 머리는 분주하게 돌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우리나라 산하라면 어디나 차고 넘치는 모래와 자갈이었다. 댐은 재료에 따라 그 종류가 나뉜다. 우선 콘크리트 댐, 그리고 사암(沙岩)의 사(沙)자와 역암(礫岩)의 력(礫)자가 합쳐진 글자로 구성된 사력댐, 즉 모래와 자갈로 만든 사력댐이 그것이다.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댐 건설에 입찰해 본 경험도 있어 전혀 댐 문외한은 아니었기에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당장 실무자를 파견하여 “해 봐”라고 지시한다. 조사 결과는 OK. 콘크리트 댐에 비해서는 그 경제성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용기 백배한 정주영은 동양 최대의 수풍댐 건설에 빛나며, 댐 건설에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일본 유수의 대기업 일본공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사력댐으로 합시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단 ‘관존민비’(官尊民卑) 문화가 만연하던 시절 근엄하기 짝이 없던 공무원들이 버티고 있었고 자부심으로 그득한 일본 설계사가 있었다. 이 국가적 대공사에 일본 회사가 설계해 주고 건설부 승인까지 난 댐을 자신들 마음대로 바꿔 보겠다고 나선 맹랑한 건설사가 그렇게 곱게 보일 리는 없었으리라. 먼저 공무원들의 호통부터 울려 나왔다. “뭘 어떻게 변경하자는 거요?” 기가 죽어버린 실무진들을 제치고 정주영이 열심히 설명했으나 일본공영의 반응은 “니가 댐을 알아?” 분위기였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지방도시 10여 곳의 상수도 건설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등 경제적 효과를 설명하던 정주영은 매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한다. 일본공영 부회장 하시모토의 극언이었다. “당신 어디서 댐 공부했나? 무식한 소리 하지도 마라.” 정주영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남긴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던 모양이다. “동경대 출신인 그가, 내가 학교 거의 공부를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내 기를 죽이자고 그렇게 나왔다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식민지를 겪고 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된 나라, 자본이라고는 식민지 시대를 헐값으로 보상받은 돈 밖에 없었고, 기술이라고는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다였으며, “뭘 아는” 사람, 또는 “어디서 공부한 사람”은 7년 가물의 콩만큼 귀했던 나라의 한계이자 슬픔이었다. 그렇게 사력댐을 하자고 고집하던 정주영 자신도 그 강철같은 신념의 한구석에는 과연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을진대, ‘피 같은’ 자금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일제 시대 한국인들이 흘린 핏값 그 자체였던 대일 청구 자금을 집행해야 하는 공무원들 입장으로서도 머리가 터져 나갈 듯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을 다친 듯 으르렁거리는 일본공영을 따르는 게 좋은 건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현대건설 사장을 믿을 것인지. 대세는 “대세를 따르자”는 것이었다. 대세란 당연히 일본의 설계대로 중력댐으로 밀자는 것이었다. 천하의 정주영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 봤는데”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하게 풀렸다. 



▲소양강댐 전경(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건설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력댐보다는 중력댐이 좋다는 식으로 보고하면서 말미에 단 사족이 뜻밖의 열쇠가 된 것이다. “현대 정 사장 주장대로 사력식으로 건설하면 자칫 큰 일 날 수 있습니다. 건설 도중에 큰 비라도 오면 댐이 무너져 서울이 다 물에 잠길 테고, 그럼 정권이 흔들립니다.” (스포츠 한국 2009.9.26) 현대 정주영이라면 익히 알던 박정희 대통령이 혹여 다른 선을 통해 정주영의 경제성 주장에 설득될까 봐 두려워 오금을 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이 소양강 댐의 운명을 바꾼 한 마디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Posted by 국토교통부


고속도로의 발전을 위한 고속도로 차등요금제 도입

한국 경제를 바꾼 가장 위대한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한 매체에서 2010년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한국 경제를 바꾼 위대한 순간’1위에는 1969년 경부고속도로 준공이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으로 만들어진 경부고속도로는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고 전국을 잇는 대동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의 변화>

                                  1970년                                                                       2010년
                                                                                                      ※경부고속도로 신갈분기점

그렇다면 고속도로의 요금제도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고속도로 요금제도에는 고속도로 이용차량에 균일한 요금을 부과하는 균일요금제와 이용거리에 비례하여 요금을 부과하는 거리비례요금제 그리고 통행량 등에 따라 요금을 차등화하여 사용자에게 부과하는 차등요금제 등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는 고속도로는 이부요금제(기본요금+주행요금)하에 차종에 따라 차등화된 주행요율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이패스할인, 화물차심야할인, 출퇴근할인 등 다양한 감면제도를 통해 동일한 구간을 이용함에도 통행요금이 다른 차등요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친환경 녹색교통의 정책에 따라 교통혼잡 및 발생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동적 요금정책의 하나로 차등요금제가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해외의 교통 수요분산 정책은 무엇이 있을까?

해외에서도 교통수요분산을 통한 혼잡완화를 목적으로 요일과 시간에 따라 다양한 차등요금을 징수하고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I-15 고속도로는 평일에는 교통량이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출퇴근시간대에 통행요금을 높게 부과하고, 주말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최고요금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요금은 혼잡정도에 따라 최저 75센트에서 최고 4달러까지 차등 부과됩니다.

또한 캘리포니아 SR 91 고속도로에서도 이용자가 적은 심야시간대에는 최저요금을, 도로가 혼잡한 출퇴근시간대에는 최고요금을 부과하며, 미국 외 프랑스, 캐나다에서도 혼잡시간대 차등요금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차등요금제는 고속도로 혼잡을 완화하고, 지정체가 감소되면서 그에 따른 환경오염이 감소되며, 사고발생이 줄어들어 안전이 증대되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속도로 운용의 효율성을 기하고 나아가 환경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차원에서 차등요금제를 도입한다고 한국도로공사는 밝혔습니다.

먼저, 출퇴근 할인이 확대되어 현재 5~7시, 20~22시에 적용되고 있는 출퇴근 통행료 50% 할인 대상이 1~3종 전 차량으로 확대됩니다. 이를 통해 극심한 혼잡시간 교통량이 인접시간으로 분산되어 지정체가 감소하고, 서민들의 출퇴근 부담도 줄어들게 됩니다.



반면, 주말의 경우에는 주말 혼잡을 완화하기 위한 교통 수요관리 측면에서 통행요금이 5% 할증됩니다. 출퇴근 할인과 주말 할증제도는 교통수요 관리 측면과 동시에 콜렛-헤이그 규칙이 적용된 결과라고 합니다.


* 콜렛-헤이그 규칙이란?

세금을 어떻게 부과해야 생산성 향상과 공평성을 동시에 추구하는지를 나타내는 세금규칙, 여가와 관련된 서비스에는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노동과 관련된 서비스에는 낮은 세율을 적용.


또한, 재정고속도로 구간과 민자고속도로 구간이 연계되는 구간에서도 요금이 할인됩니다. 관리회사가 달라 발생하는 기본요금 중복 부과의 문제를, 서민들의 부담 완화를 위해 거리비례에 맞게 할인합니다.

이번 요금체계 개편에 의한 교통 수요 관리 및 분산으로 연간 114,547톤의 탄소저감 효과와 5,242만ℓ의 유류사용 절감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차등요금제하에서 보다 빠르고 보다 안전하게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