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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19 한강다리 5편 (1)




▲ 제2한강교 개통식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62년 제2한강교 기공식 사진을 보면 한쪽에 이런 표어가 적혀 있다. “한 손 두 손 가는 곳에 늘어나는 우리 살림” 당시 한국은 막 독립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내 최초로 국내 자본과 기술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돈은 정상적인 경로로 마련한 것이라기보다는 5.16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그 이전의 ‘부정축재자’들로부터 몰수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헌납된 재산이 그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제3공화국 당시의 쑥덕거림처럼 부정 축재자들의 환수 재산으로 다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또 다른 부정들이 다리를 파먹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리가 완공된 5년 뒤 상판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로도 제2한강교는 여러 번 구멍이 나거나 교각 이음쇠에 문제가 발생해 통제되는 일이 많았다. 1978년 10월 31일 경향신문은 분노에 차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통한지 1년이 못돼 결딴나는 포장도로나 10년이 못 가서 구멍이 뚫리는 다리는 무슨 까닭인가. 만일 공법상 규정된 철근 시멘트 모래 자갈의 배합비율과 필요한 공기 등을 엄격히 지켰던들 과연 그처럼 맥없이 망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길은 닦이고 다리는 놓였다. 제2한강교의 건설로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동네는 오늘날의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일대였다. 서교동과 동교동은 일제 때부터 이 일대는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진창밭으로 변해 버렸던 허허벌판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대의 신촌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시내버스의 종점도 신촌 시장 일대에 있었고 그 이상은 그저 채소밭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교동과 동교동 사이에는 제2한강교로 향하는 대로가 뚫렸고 다리의 북안(北岸) 합정동에는 강변도로가 놓이게 된다. 합정동의 동명(洞名)은 과거 천주교 박해 시절 천주교인들의 목을 치던 망나니들이 그 칼을 씻거나 물고문에 이용했다는 우물 합정(蛤井)에서 연유된 것인데 이 으스스한 우물도 강변도로 개발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또  제2한강교는 망원동 이동, 즉 성산동, 상암동 수색 등지의 개발도 촉진시켰다. 1968년 10월 22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보도된 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시내버스가 들어갈만한 대로가 없어 서울시에 속하면서도 농촌을 연상할 만큼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경치 좋은 시골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지게 된다. 1968년의 서울 시장은 '김현옥.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리던 그는 이 일대를 이렇게 바꿀 계획을 세웠다. “제2한강교의 유엔 탑 부근으로부터 한강 둑을 따라 노폭 30미터의 새로운 도로를 뚫고 난지도 앞을 스쳐 중동, 북가좌동의 기존도로와 연결된 다음 응암동과 북가좌동의 중간지점에서 신사동의 기존도로와 교차하게 하고 다시 대광동을 지나 불광동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동교동을 기점으로 한강과 신촌, 수색간 철도의 중간지점을 타고 수색 쪽으로 노폭 25미터의 도로가 신설한다.” (위 신문 기사) 


 


▲ 1970년대 제2한강교(출처: e-영상역사관 film.ktv.go.kr)



이렇게 주변이 단장되고 개발된 이후 제2한강교는 ‘카 퍼레이드’의 다리로 각광받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시청으로 들어오는 최단 거리에 놓여진 제2한강교는 ‘국위선양’을 한 스포츠 스타나 기능 올림픽 선수단, 또는 환심을 사야 할 외국 국가 원수가 들어올 때마다 벌여 주었던 카 퍼레이드가 단골로 펼쳐진 다리였다. 




 ▲ 이애리사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74년 국제 콩쿨 대회에서 입상한 정명훈도 공항에서 제2한강교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카 퍼레이드를 펼쳤고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탁구의 샛별 이애리사를 위시한 선수단도 제2한강교를 자랑스럽게 지났다. 최초로 북한을 이겼던 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선수단을 위해서는 100여대의 군용 지프가 김포공항에 총출동했고 이들은 경찰 사이드카의 엄호를 받으며 제2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 무하마드 알리(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그 이름도 전설스러운 무하마드 알리가 나비처럼 가뿐하게 수도 서울에 입성한 것도 제2한강교를 지나서였고 오늘날 양화대교를 지나는 수많은 ‘봉고차’의 유래가 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 (봉고 대통령이 직접 밝힌 바, 한국정부가 새로이 개발된 신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의 카 퍼레이드도 제2한강교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갔다. 남북한의 외교전이 치열하던 시절, 국제 무대에서 한 표가 아쉬웠던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 손님들에게 카 퍼레이드는 기본이었고 제2한강교는 단골이었고 그 일대의 학생들은 툭하면 수업 작파하고 길거리에 늘어서서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던 것이다. 


제2한강교는 1980년대 이후 한강 개발 사업이 펼쳐지고 다리들이 많이 늘어서게 되면서 숫자로 구별이 힘들게 되면서 ‘양화대교’로 개칭된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일종의 관문 구실을 했으며 영등포 일대와 동교, 서교,망원, 성산 동 인근 지역을 환골탈태시켰던, 최초의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양화대교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일제히 실시된 안전도 검사에서 “서울 시내 15개 교량 중 최악의 상태” (1994년 10월 28일 경향신문 보도)라는 불명예를 쓰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의 대상이 된다. 결국 1965년 완성됐던 양화대교 구교는 완전히 헐고 재시공에 들어가야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문래동이다. 시내를 다녀오려면 어김없이 양화대교를 지나야 하고 다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내가 서울의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다리를 지났던 수십만 수백만의 한국인, 외국인 모두 그랬을 것이다. 가끔 택시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널 기회가 있을 때 혹 택시 기사 분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만난다면 양화대교의 추억을 떠 보시라. 아마 도착할 때까지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화대교는 그만큼의 오랜 역사와 사연들이 배어 있다.  실로 많은 부끄러움과 슬픔, 또 한 켠으로는 영광과 기쁨의 추억 위에 세워져 있는 다리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