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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9.11 근대 철도 부설의 역사 1편 - 경부선


우리나라에 최초로 철도가 놓인 것은 20세기가 열리기 전, 1899년이었다. 개항지 중의 하나였던 인천에서 서울까지 연결된 경인선 철도와 그 위를 내달리던 철마(鐵馬)는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휘말려 허우적거리던 대한제국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심대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당시 광고를 보면 이렇다. 


“경성에서 마포 오고 갈 시간이면 인천에 왕래함이 넉넉하고 그 비용도 몇 푼이니 동대문에서 남대문 가는 가마 값이면 인천에 왕복하겠느니라.” 


그러나 철도를 처음 보는 대한제국 사람들은 철도를 그리 즐겨 이용하지 않았고 만성적자에 시달렸지만, 원래의 시공자 미국인 모스로부터 경인선 건설 권리를 사들여 완공시켰던 일본인들은 이미 경인선 철도 32킬로미터와는 차원이 다른 철도 노선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 정부가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본과 기술이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자주적으로 그를 밀어붙일 힘도 부족했다. 이미 대한제국을 발판 삼아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은 그 뜻을 실현시킬 한국 내 철로를 필요로 했고 조선인들의 철도 건설 의지를 짓밟고 그를 자신의 몫으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경부선 철도였다. 




 ▲ 1901년 부산에서 열린 경부선 기공식(출처: 위키피디아 http://bit.ly/swxdZe)



이미 청일전쟁이 일어나기도 전 1892년부터 일본인들은 경부선 철도 노선을 모색하고 있었고 이후 1901년 철도 건설이 착공된 뒤에도 1903년까지 무려 다섯 번에 걸친 노선 답사와 변경을 하고 있다. 그때마다 노선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청주나 공주, 성주 등 당시의 지역 중심지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측은 몇 몇 지점에서 완강하게 철도 반대를 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보면 좀 서글프다. 경제적 요충지나 교통의 요지 등 대한제국의 미래 국익 때문이 아니라 선왕들의 무덤의 경계를 해친다거나 우리 양반 고을 앞에 철로 같은 것 못 놓는다는 식의 몽니가 많았던 것이다.


충청도의 중심지이자 감영이 있던 공주의 양반들이 노했고 경상도 성주의 꼬장꼬장한 선비들도 팔뚝을 걷어 부쳤다. 또 일제의 입장에서도 서울 부산의 최단 거리였던 서울-이천-충주-상주-대구-부산의 영남대로 (오늘날 중부내륙고속국도의 노선과 비슷한)를 고려하다가 조령 쪽의 험준한 지세가 난항이었던 바 오늘날의 노선으로 결정을 보게 된다. 


이 와중에 별안간 그야말로 도시도 아닌 한적한 시골 논밭 지역 하나가 별안간 생겨나 도시로 성장한다. 그것이 한밭, 즉 대전이었다. 원래 대전이라는 지명은 있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대전 부군의 회덕 IC로 그 이름이 남아 있는 회덕현(懸) 대전리(里) 또는 대전천(川)일대의 허허벌판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대전이라는 신도시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철로를 건설하는 것은 일본이었으나 그 건설에 동원된 것은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발하거나 대한제국 정부에게 강요하여 한국 국민들을 동원시켜 공사에 나서게 했을 뿐 아니라 농민들의 토지를 무단으로 빼앗거나 목재 등 자재를 마음대로 사용하여 철도를 건설한다. 그 단적인 모습을 우리는 다음의 사례에서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 경부선(출처: 네이버 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68836)



“1904년 7월 시흥군에 철도 역부 8,000명을 동원하라는 관찰사의 명령이 내려왔다..... 7월 9일 시흥군청에는 도민 수천 명이 운집하여 명령을 거두라고 요구했다. 군중의 기세는 흉흉했다. 이들 기세에 놀란 시흥군수는 관찰사에게 달려가 동원 숫자를 줄여달라고 청하여 3,000명을 할당 받았다. 군수는 각 동(부락단위의 작은 마을)마다 역부 10인씩 차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게다가 역부에 드는 비용마저 마을에서 공동부담 하라고 해서 그러잖아도 흉흉한 민심을 들끓게 만들었다. 일본은 역부에게 주는 노임이나 동원비용을 결제하지 않았다. 일본 토건 회사는 이를 관청에 떠 넘겼고, 관청은 다시 마을에 넘긴 것이다.” (<경부선> 이수광 저, 효형출판)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일원이 온통 이런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1904년 일본군 철도를 파괴하려던 조선 의병 세 명이 총살대에 묶여 총살당한 풍경은 경부선이 어떤 슬픔과 아픔 속에 지어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경부철도가 완성된 것은 1904년 11월 10일, 본격적인 영업은 1910년 1월 1일 개시됐다. 총 연장 444킬로미터. 


서울에서 부산을 다녀오려면 몇 달 노잣돈을 준비해야 했던 시대는 그로서 끝났다. 철마는 한 나절 만에 한반도를 가로질러 서울과 부산을 연결했다. 최남선이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서울역=경성역)떠나 나가서 / 빨리 부는 바람 같은 형세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라고 노래한 것은 그 놀라움의 표현이었으리라. 


 


▲ 현재 경부선 노선도(출처: 코레일)



그로부터 경부선은 온갖 역사적 인물과 사연을 싣고서 가난과 전쟁을 뚫고 숱한 눈물과 환호를 뒤로 한 채 한반도를 종단하게 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신학문을 배우러 부산항의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젊은이들이 올라탄 열차였고 이상룡 등 경북 안동 일대의 깨인 선비들이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만주로 가기 위해 몸을 실은 기차이기도 했고 고종 황제의 어린 아들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볼모의 일본행을 떠난 것도 경부선 열차를 통해서였다. 

 



▲ 순종황제(출처: 위키백과)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이전 경부철도가 태웠던 가장 귀한 손님은 순종 황제일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난생 처음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행(南行)을 떠난다. 8시간의 여행을 거쳐 그가 다시 땅을 밟은 곳이 대구였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평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하며 남행에 나선 순종은 대구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자신이 다스린다고는 하지만 별 힘을 쓰지 못했고 그나마도 빼앗길 나라의 일단을 밟게 된다. 그 뒤에서 경부선 열차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그 주인의 마지막 행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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