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욱'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10.22 항공의 역사 2편
  2. 2013.10.15 항공의 역사 1편


안창남 이후 많은 이들이 창공에 도전했다. 1925년에는 권기옥이 중국 운남여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 비행사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탄생했고 1926년에는 이기욱 비행사가 서울에 경성항공사업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항공사로 기록된다. 이후 일본항공사들에 의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민간항공노선들이 수립됐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비행기가 조선 하늘을 날고 조선 땅에 내리는 것이 그렇게 귀한 일만은 아니게 됐다. 

그 비행기 조종사들 가운데 신용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신용욱(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1년생이었던 신용욱은 스물 두 살 나던 해 1922년, 일본 오꾸리(小栗) 비행학교를 마친다. 그 1년 선배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었다. 안창남이 창공을 날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면 신용욱은 비행 자체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1등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 이후로도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고 도오아 항공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조종사 면허까지 따낸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비행을 좋아했고 거기에 평생을 바친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이었다. 1925년 그는 고향의 신림면 평월리 공터 주변에 비행기를 끌고 착륙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활주로가 닦이지 않은 울퉁불퉁한 공터로의 착륙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고창과 인근 지역 사람들은 환호를 올리며 하늘에서 내려온 고향 사람을 환영했다. 그는 이후 조선항공공업회사를 만들어 비행기를 생산하는 등 한국 항공 산업의 초석을 닦는다. 


유감스런 일은 그는 비행기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지 안창남처럼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는커녕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로 일본군을 실어 날랐고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니 혐의를 벗기 어려운 친일파 인사인 셈이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선정한 708인의 친일파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에 모두 그 이름을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그의 기술과 경험은 이 나라의 항공산업의 역사에 중요한 줄기를 형성한다. 


해방된 후 최초로 “Korea”의 이름을 단 항공사를 설립한 것은 그였다.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 (KNA)가 신용욱에 의해 그 깃발을 올린 것이다. 신용욱은 권력과 밀착해 있었다. 그는 1950년 처음으로 국회의원까지 됐고 이후 내리 3선을 한 것이나 100만 달러 이상의 외화 사용이라면 대통령 결재가 필요하던 시절 그가 미국에서 DC3기 3대를 구입해 올 수 있었던 것이나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DC-3(출처: 위키백과 http://bit.ly/17dsRYN)



국회의원이 됐어도 그의 비행에의 열망은 그치지 않아 1953년 그 자신도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사업을 키워 나감으로써 일등비행사로부터 탁월한 항공사업인으로 전환의 계기를 맞은 것이다. 1953년에는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해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 됐고 헬리콥터를 들여와 그를 조종하며 논밭에 농약을 뿌렸던 첫 사람이었으며 1956년에는 처음으로 한미(韓美)항공협정 체결을 성공시켜 미국 보잉사로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내는 등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그의 행운의 날개는 거기까지였다. 그가 얻어왔던 비행기 석 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창랑호 우남호 만송호였다. 


우남은 대통령 이승만의 호(號), 만송은 부통령 이기붕의 호, 창랑은 정치인 장택상의 호였으니 신용욱의 정치적 밀착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창랑호가 비극의 씨앗이 된다. 1958년 2월 16일 북한 공작원들이 이 비행기를 납북하여 북한으로 끌고 간 것이다. 온 나라가 세계 최악의 가난에 시달리던 무렵,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된 사람들이 손으로 헤아리던 즈음, 항공사란 적자투성이의 기업일 수 밖에 없었고 집까지 팔아 가며 버티던 신용욱에게 비행기 납북은 크나큰 타격일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승객들을 돌려 보냈지만 비행기는 반환하지 않았다. 바로 전 해 만송호가 사고로 파손된 상황이었기에 운행 가능한 비행기는 우남호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즉 자산이 1/3으로 줄어든 것이다. 



 ▲ 창랑호 송환요구 궐기대회(출처: 국가기록원)



신용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비행기를 도입하고 시애틀 노선을 수립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사세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신용욱 자신도 국회의원에서 낙선했고 4.19가 터져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이승만을 잃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위기 끝에 한강에서 몸을 던져 그 삶을 끝맺는다. 


해방되자마자 일본에서 스틴슨 4인승 비행기를 배에 싣고 와서는 바로 조립하여 하늘로 떠올라 한반도를 가로질러 김포공항에 내리고 다시 기수를 부산으로 향하여 왕복 비행을 성공시킨 후 득의양양하던 신용욱,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기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화를 내던 한국항공산업의 개척자 신용욱은 슬프게 삶을 마감했다. 비행기를 너무 좋아했지만 그러다 보니 권력자들에게 다가갔고 그 권력이 바뀔 때 스스로의 처지도 차차 쇠하고 보잘것없이 되어갔던 비행사. 



 ▲ 우남호(출처: 인하대학뉴스 http://bit.ly/19W2AZ7)



그와 함께 KNA는 군사정권에 의해 국영 ‘대한항공공사’로 바뀌게 된다. 또 하나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인하대학교에는 신용욱이 들여온 마지막 비행기 우남호가 전시돼 있다. 그 후 대한항공에 인계되어 1971년까지 운용되며 총 36,216시간이란 비행 기록을 남기고 퇴역했으며 인하대학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우남호만큼은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한때의 주인 신용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1903년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소망을 이룬 이 기술적 쾌거는 금세 세계로 전파돼 나갔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행기가 첫 선을 보인다. 1913년 일본 해군 기술장교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자신이 만든 "나라하라 4호"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체공 시간은 불과 수십 초. 날아올랐다가 허겁지겁 땅에 내려앉는 수준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을 전해 주었다. 


1차 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 살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 안창남(출처: KBS)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환하고 아름다운 빛)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 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 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 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자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 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 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 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 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특별한 경우로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 창경궁 위를 나는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 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 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 넓은 비행장 한 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 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렇게 안창남은 죽었다. 하지만 조종사 학교 1년 후배 가운데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신용욱이라는 사람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