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토교통을 빛낸 위인을 만나다.


시간을 거슬러 국토교통의 빛낸 위인을 만나는 가상 인터뷰! 


세번째 위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선생님입니다





▲ 젊은 시절의 안창남 선생님 (사진출처 : 연합뉴스) 


 


[기  자]

안녕하세요? 저는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의 이주훈기자라고 합니다.



[안창남]

안녕하세요? 안창남입니다.



[기  자]

저는 이번기사를 쓰면서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됬습니다. 많은 친구들도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들을 위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창남]

하하하. 그건 너무 어려운 부탁인데요 제가 제 소개를 하는건 너무 쑥스럽습니다.



[기  자]

그럼, 제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선생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 안창남 (1901 ~ 1930)



일제강점기였던 1901년 3월 19일 서울시 종로구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용산 연방장에서 펼쳐진 미국인 조종사 아트스미스의 비행곡예쇼를 보고 비행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19년 19살이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석달만에 졸업을 한다. 20살에는 뛰어난 비행실력을 인정받았고 21살에는 일본민간비행사시험에서 공동 1등을 차지한다.


1922년 일본의 도쿄에서 오사카까지의 우편 비행대회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하여 2등을 하고 일본에서도 그 실력을 널리 인정받게 된다.


안창남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벽이라는 잡지에 실려 대외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는데, 그보다 안창남을 유명하게 한 것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비행사가 우리나라 여의도항공을 최초로 비행한 비행쇼였다. 이때 서울의 인구가 30만이었는데 그의 비행쇼를 보려고 여의도에 5만이 모였다고 하니 그 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만하다. 당시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들은 이 비행쇼를 보면서 스스로 조선에 대한 자긍심과 긍지를 갖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안창남은 편안한 비행기 조종사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중국에서 대한독립공명단을 결성, 이 단체의 주축이 되어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하던 그는 1930년  29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비행사고로 중국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하늘을 나는 비행을 통해 일제에 묶인 조선인의 희망을 다시 품게해준 독립투사, 그가 바로 안창남이다. 

 




[안창남]

그렇게 길게 소개를 해주니 오히려 더 쑥스러워지네요. 



[기   자] 

별말씀을요.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없는 비행조정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고 결국 비행사가 되셨잖아요. 또 우리나라 최초로 우리나라 항공을 날아본 비행사이신데,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던 그 때. 기분이 어떠셨었나요?



[안창남]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다니던 일본의 항공학교에 고장으로 폐물이 되어 버려져 있던 비행기가 꽤 있었습니다. 전 이를 고치고 꾸며서 금강호를 만들어서 비행했죠. 정말 신났습니다. 


저는 미국과 일본에게 우리나라의 하늘을 먼저 내어준 것이 모욕이라고 생각했었어 요. 그래서 제가 가진 기술로 우리나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어요. 특히 비행중에 서대문 형무소 상공을 날아갈 때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감옥에 갇힌 우리 조선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이 배행기를 보면서 이 비행기의 조종사인 내 뜻과 마음도 그들과 같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  자]

당시의 비행사는 돈을 많이 벌수 있는 좋은 직업이고, 선생님께서는 뛰어난 비행조종기술로 일본에서도 천재 비행사라고 인정을 받으셨는데.. 갑자기 중국으로 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창남]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무고하게 죽어가는 조선인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가서 비행학교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여건이 마땅치않아 중국으로 갔죠. 중국 산시성의 옌시산이라는 통치자를  만나서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에게 나의 기술을 가르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줬습니다.


또 나의 동지인 최양옥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의 주축이 되어 조선독립을 이끌기에는 중국이 훨씬 편했습니다. 



[기  자]

세계가 인정한 뛰어난 비행기술과 독립운동을 위해 큰 일을 해내고 계셨는데 너무 짧은 인생을 사셨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우리나라를 보시니까 어떠셨습니까?



[안창남]

조선이 독립되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조선독립을 위한 나의 노력은 작은 것이지요.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이뤄낸 일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맘먹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나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앞장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과 일본이 잘하는 비행기술을 배웠지만, 일본에서 인정받는 조종사가 된 것은 우리민족이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는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세계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조상들을 잊지 않고 우리의 후손들도 자신의 능력을 세계 곳곳에서 발휘하길 바랍니다.


 

[기  자]

선생님을 알게되서 정말 좋았습니다. 항공분야에서도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셨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인터뷰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금 강 호

안창남이 우리나라 여의도 항공을 날았던 비행기로 80마력의 작은 비행기로 곡예도 가능.

원래는 고장이 나서 일본의 오쿠리비행학교 창고에 버려져 있던 비행기를 안창남이 직접 조립하고 색칠하였음. 당시에는 태극기를 쓸수 없어서 한반도를 그렸고 꼬리부분에는 금강산을 그려넣었었다고 한다. 금강호라는 비행기 이름도 한자로 써 넣음






▲ 사진출처 : 동아일보



[자료출처]

네이버
KBS 역사스페셜 [떴다 보아라 안창남]
역사인물신문1 / 이광희 / 웅진닷컴
연합뉴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안창남을 모르셨던 분들에게 정보가 되시길 바래요

    2014.09.29 22:24 [ ADDR : EDIT/ DEL : REPLY ]
  2. 김태규

    안창남에 대해서 잘 소개해주신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14.10.24 18:27 [ ADDR : EDIT/ DEL : REPLY ]
  3. 박경준

    새로운 위인을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2014.10.26 23:14 [ ADDR : EDIT/ DEL : REPLY ]


 ▲54년 당시 축구팀(출처: 대한 축구협회)


좀 오래된 에피소드를 더듬어 보자. 

1954년 한국 축구팀은 일본을 꺾고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일본을 물리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스위스에 어떻게 가느냐였다. 


대한민국 축구팀은 미 군용기를 타고 일단 일본으로 가 다시 방콕을 찍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려고 했는데, 해외여행이란 우주 유영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시절, 업무 처리 미숙으로 예약이 불확실하게 되는 바람에 두 자리가 그만 펑크가 나고 말았다. 망연자실해 있는 동양인 장정들의 사정을 안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가는데 비행기 표가 없어서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자기들 자리를 양보해 준 덕에 방콕을 거쳐 인도 캘커타를 지나 로마를 찍고서야 취리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경기 시작 전날이었다. 


한국팀은 헝가리에게 9대 0으로 깨진다. 처참하게 패배한 후 벌러덩 누워버린 선수들 머리에는 “비행기라도 제대로 타고 왔으면!” 하는 울분이 솟았을지도 모르겠다. 


 

▲ 대한항공공사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축구 선수가 문제가 아니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외국을 방문할 때는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야 하는 나라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갈 때는 미군이 군용기를 내 주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갈 때는 동경과 독일을 오가는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서울에 들러 박정희 대통령을 태우고 갔다. 1917년생이니 쉰도 안된 젊은 나이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여간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62년 이후 국영화됐던 ‘대한항공공사’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적자덩어리의 공기업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았다. 박정희는 내로라 하는 기업들에게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타진했지만 죄다 거절당한다. 아니 못하겠다고 읍소했을 것이다. 매년 100만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내는 화근덩어리를 누가 떠맡을 것인가. 


이때 월남 특수를 맞아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던 한진그룹에 박정희 대통령의 눈길이 갔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조중훈 회장을 찾아 의사를 타진했고 완곡하게 거절하자 대통령이 직접 조중훈 회장을 호출한다. 조중훈 회장 본인의 회고대로 대통령이 부른다면 “알겠습니다” 아니면 “죽여주십시오” 해야 하던 시절이었으니 조 회장의 고민도 깊었으리라. 회사 중역들은 죽어도 못한다고 뻗대시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조중훈 회장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하기야 일국의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나오는 데에는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에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해보고 싶은 게 내 소망이오.” 아 가난한 나라의 소박한(?) 대통령. 



대한항공공사가 보유한 항공기는 DC9 프로펠러 비행기를 비롯하여 DC-3 2대, DC-4 1대, F-27 2대, FC-27 2대, 도합 단 8기였다. 이걸로 항공사라고 자처하기도 어색한 노릇이었다. 당장 비행기를 들여와야 했는데 비행기를 들여오는 돈도 문제, 그걸 채울 승객도 문제였다. 


외국인 관광객이 세계 최빈국에서 갓 벗어난 나라에 뭘 보러 오며 국민소득 100달러 남짓의 한국인들이 해외여행을 꿈꾸려면 아직 여러 세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조중훈 회장은 회장 얼굴만 바라보는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도 길이 있다. 우리가 길에서 사업을 했고 길에서 사업을 키웠고 바닷길도 그렇듯이 모든 사업을 길과 함께 했는데 이제 하느님이 하늘길도 개척하라고 선물을 주셨으니 한 번 키워 봅시다.” 

(월간중앙 이호 기자, “父子 배짱 하늘을 날다” 기사 중) 


 


▲ 73년 대한항공 보잉 747기 취항식(출처:e-영상역사관)



대한항공은 사업 인수 7개월 만에 사이공 노선을 개척하고 한국군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실어 나르는 기염을 토했고 5년 거치 10년 상환을 조건으로 하던 정부 불하금을 5년 만에 거뜬히 갚았으며 10년 되는 해, 1979년에는 대한민국 국적기가 태평양을 건너고 미대륙을 횡단하여 뉴욕 공항에 착륙하는 일대 거사를 이루게 된다. 


대한항공사 직원들에게야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 몇 차례나 비행기를 갈아타며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한국인들에게도 태극마크 선명한 감동이었다. 


대한항공은 전혀 다른 견지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땅 밑’의 문제였다. 

서울 최초의 지하철 공사를 계획할 때 정부는 오랜 지하철 운영 경험이 있는 프랑스에 모든 것을 맡겼다가 막판에 기술 제휴 대상국을 일본으로 급선회했다.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한 프랑스는 격노했다. 외교적 단교까지 거론되고 국제 기구 회의에서 ‘자유 우방’ 프랑스가 뜻밖에 북한을 지지하는 황망함에 이르렀다니 프랑스의 분노를 짐작케 한다. 


이걸 해결한 게 대한항공이었다. 프랑스제 항공기 에어버스를 6대씩이나 구입해 줌으로써 프랑스인들을 달랬던 것이다. 



 ▲KAL858 폭파범 재판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하지만 분단과 냉전의 장벽은 하늘길에도 대단한 애로 사항을 뿌려 놓았다. 

유럽을 가려면 뻔히 지도상으로도 보이는 중국과 소련 영공을 통과해서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로 가서 북극 항로를 거쳐 가야 했고 일본을 가든 미국을 가든 북한 영공을 저만치 피해 우회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비극도 벌어졌다. 


항로를 잘못 택해 소련 영공에 들어가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무르만스크의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했던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사건과 원인 불명의 항로 이탈로 소련 극동군의 군사기지가 밀집한 캄차카 반도 위를 비행하다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돼 사할린 앞바다의 비극으로 남은 KAL 0007기 사건, 그리고 북한이 KAL기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저지른 KAL 858기 사건 등 뼈아프게 슬픈 역사도 그 성장의 기록 속에 핏빛 주머니로 매달려 있다. 



한국으로 향하는 세계의 하늘길, 그리고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의 하늘길은 더욱 분주해지고 풍성해졌다. 8대의 비행기는 수백 대로 늘어났고 1988년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설립되면서 대한항공은 독점 시대를 마감하고 경쟁 체제로 접어들었다. 하루에도 각양각색 국적의 수백 대의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인천 공항과 좁은 국토의 곳곳을 분주하게 오가는 태극과 색동 무늬의 비행기들을 바라보노라면 한국 항공 산업이 “떴다 떴다 안창남” 이후 가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해 온 과거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연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전 세계 수십 개국 수십 개 도시를 직항으로 오가는 요즘을 1954년의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바라본다면 어떤 격세지감이 들는지. 앞으로도 한국의 하늘길은 더 넓어지고 더 분주해질 텐데.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창남 이후 많은 이들이 창공에 도전했다. 1925년에는 권기옥이 중국 운남여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 비행사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탄생했고 1926년에는 이기욱 비행사가 서울에 경성항공사업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항공사로 기록된다. 이후 일본항공사들에 의해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민간항공노선들이 수립됐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비행기가 조선 하늘을 날고 조선 땅에 내리는 것이 그렇게 귀한 일만은 아니게 됐다. 

그 비행기 조종사들 가운데 신용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신용욱(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1년생이었던 신용욱은 스물 두 살 나던 해 1922년, 일본 오꾸리(小栗) 비행학교를 마친다. 그 1년 선배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었다. 안창남이 창공을 날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많았다면 신용욱은 비행 자체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1등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한 이후로도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고 도오아 항공전문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조종사 면허까지 따낸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비행을 좋아했고 거기에 평생을 바친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이었다. 1925년 그는 고향의 신림면 평월리 공터 주변에 비행기를 끌고 착륙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활주로가 닦이지 않은 울퉁불퉁한 공터로의 착륙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고창과 인근 지역 사람들은 환호를 올리며 하늘에서 내려온 고향 사람을 환영했다. 그는 이후 조선항공공업회사를 만들어 비행기를 생산하는 등 한국 항공 산업의 초석을 닦는다. 


유감스런 일은 그는 비행기 말고는 관심이 없었던지 안창남처럼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는커녕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로 일본군을 실어 날랐고 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니 혐의를 벗기 어려운 친일파 인사인 셈이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선정한 708인의 친일파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에 모두 그 이름을 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그의 기술과 경험은 이 나라의 항공산업의 역사에 중요한 줄기를 형성한다. 


해방된 후 최초로 “Korea”의 이름을 단 항공사를 설립한 것은 그였다.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 (KNA)가 신용욱에 의해 그 깃발을 올린 것이다. 신용욱은 권력과 밀착해 있었다. 그는 1950년 처음으로 국회의원까지 됐고 이후 내리 3선을 한 것이나 100만 달러 이상의 외화 사용이라면 대통령 결재가 필요하던 시절 그가 미국에서 DC3기 3대를 구입해 올 수 있었던 것이나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DC-3(출처: 위키백과 http://bit.ly/17dsRYN)



국회의원이 됐어도 그의 비행에의 열망은 그치지 않아 1953년 그 자신도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 사업을 키워 나감으로써 일등비행사로부터 탁월한 항공사업인으로 전환의 계기를 맞은 것이다. 1953년에는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해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 됐고 헬리콥터를 들여와 그를 조종하며 논밭에 농약을 뿌렸던 첫 사람이었으며 1956년에는 처음으로 한미(韓美)항공협정 체결을 성공시켜 미국 보잉사로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내는 등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그의 행운의 날개는 거기까지였다. 그가 얻어왔던 비행기 석 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창랑호 우남호 만송호였다. 


우남은 대통령 이승만의 호(號), 만송은 부통령 이기붕의 호, 창랑은 정치인 장택상의 호였으니 신용욱의 정치적 밀착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창랑호가 비극의 씨앗이 된다. 1958년 2월 16일 북한 공작원들이 이 비행기를 납북하여 북한으로 끌고 간 것이다. 온 나라가 세계 최악의 가난에 시달리던 무렵,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된 사람들이 손으로 헤아리던 즈음, 항공사란 적자투성이의 기업일 수 밖에 없었고 집까지 팔아 가며 버티던 신용욱에게 비행기 납북은 크나큰 타격일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승객들을 돌려 보냈지만 비행기는 반환하지 않았다. 바로 전 해 만송호가 사고로 파손된 상황이었기에 운행 가능한 비행기는 우남호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즉 자산이 1/3으로 줄어든 것이다. 



 ▲ 창랑호 송환요구 궐기대회(출처: 국가기록원)



신용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비행기를 도입하고 시애틀 노선을 수립하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사세는 기울어지고 있었다. 신용욱 자신도 국회의원에서 낙선했고 4.19가 터져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이승만을 잃었고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위기 끝에 한강에서 몸을 던져 그 삶을 끝맺는다. 


해방되자마자 일본에서 스틴슨 4인승 비행기를 배에 싣고 와서는 바로 조립하여 하늘로 떠올라 한반도를 가로질러 김포공항에 내리고 다시 기수를 부산으로 향하여 왕복 비행을 성공시킨 후 득의양양하던 신용욱,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기장님이라고 부르라!’고 화를 내던 한국항공산업의 개척자 신용욱은 슬프게 삶을 마감했다. 비행기를 너무 좋아했지만 그러다 보니 권력자들에게 다가갔고 그 권력이 바뀔 때 스스로의 처지도 차차 쇠하고 보잘것없이 되어갔던 비행사. 



 ▲ 우남호(출처: 인하대학뉴스 http://bit.ly/19W2AZ7)



그와 함께 KNA는 군사정권에 의해 국영 ‘대한항공공사’로 바뀌게 된다. 또 하나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인하대학교에는 신용욱이 들여온 마지막 비행기 우남호가 전시돼 있다. 그 후 대한항공에 인계되어 1971년까지 운용되며 총 36,216시간이란 비행 기록을 남기고 퇴역했으며 인하대학교에 기증되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우남호만큼은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한때의 주인 신용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1903년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소망을 이룬 이 기술적 쾌거는 금세 세계로 전파돼 나갔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행기가 첫 선을 보인다. 1913년 일본 해군 기술장교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가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자신이 만든 "나라하라 4호"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체공 시간은 불과 수십 초. 날아올랐다가 허겁지겁 땅에 내려앉는 수준이었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을 전해 주었다. 


1차 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 살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 안창남(출처: KBS)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환하고 아름다운 빛)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 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 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 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자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 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입니까.”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 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 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 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특별한 경우로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 창경궁 위를 나는 금강호 (출처: 위키피디아)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 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 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 넓은 비행장 한 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 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렇게 안창남은 죽었다. 하지만 조종사 학교 1년 후배 가운데 또 한 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신용욱이라는 사람이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