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 전주한옥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마치 3시간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정말 전주는 아름다웠다. 전주한옥마을은 유명한 곳이어서 사람들이 정말 많고 북적북적했다. 



▲ 전주한옥마을 입구 비석



버스에서 내려 전주한옥마을 해설 선생님을 만나 전주한옥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들은 가장 먼저 오목대로 갔다. 나는 “오목대가 뭘까?” 궁금증을 머릿속에 가득 기대하며..



  

                            ▲ 오목대                                        ▲ 오목대로 올라가는 길


▲ 이목대 오목대 비석 설명



바람이 슬슬 부는 숲길을 걸으며 드디어 오목대에 도착을 했다. 오목대로 가는 길에는 그 당시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씨인 것을 알고 만든 길도 있었다. 전주를 찾아왔을 때마다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또, 목조대왕이 자연의 풍광을 즐기며 노닐던 곳으로 오목대 안에 비석이 크게 세워져 있다. 



▲ 태조 이성계가 다녔던 길



현재 전주에 있는 오목대는 목배기동이라는 꽃나무 2그루가 심어져 있다. 이 목배기동 나무는 함부로 처녀의 집에 심을 수 없다고 한다. 목배기동 나무는 껍질이 1년에 한 번씩 자기 스스로 벗기 때문에 껍질은 옷을 뜻하고 나무는 몸을 뜻하는 의미로 옷을 계속 벗는다는 전설이 담겨 있어 처녀의 집에는 목배기동 나무를 심을 수 없다. 정말 신기한 나무이다. 


오목대를 재미있게 알아보고 우리는 전주한옥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높은 산,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정말 전주한옥마을이 짜짠!! 보였다. 우와! 정말 멋지고 신기했다. 그런데 이 한옥들 중에서 일본인들의 주거 형식들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전주한옥마을에 한옥들이 700여 채가 있는데 여기서 10%가 일본인들 집이 있다고 한다. 



▲ 전주 한옥마을을 바라다 본 풍경



멋진 경치와 함께 전주 한옥마을을 살펴보고 우리는 임금님을 모시는 곳으로 갔다. 임금님이 앉아있는 의자까지 가는 3개의 길이 있었는데 가장 가운데에 있는 길은 신도라고 해서 임금님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신하들은 가운데 길 말고 왼쪽과 오른쪽 길을 이용해 다닐 수 있었다. 만약 신하들이 임금님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이용해 간다면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우리들은 임금님들이 다닌 길을 걸으며 임금님 노릇도 해보았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함께 멋진 사진을 찍고 우리는 어진 박물관으로 갔다. 그 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행렬 모습이 자세히 멋지게 나와 있었다. 임금님이 타고 다니는 가마는 바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앞과 뒤로 부채를 들고 가는 사람들, 임금님이 행실을 한다고 알려주는 사람들 등 각각 이름이 따로 있었다. 종류가 정말 여러 가지여서 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임금님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그 사람들로 인해 한편으로 왕이 빛나는 것 같았다. 또, 태조 이성계 행실을 보고 임금님이 왜 나라를 안정시키며 잘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어진 박물관에서 태조 이성계의 멋진 행실 모습을 즐기고 전주 한옥마을 해설자 선생님과 헤어진 뒤, 전주목판체험관으로 갔다.

그 곳에서 우리 국토교통부 기자단은 손수 연필꽂이를 만들었다. 목공에서만 이용한다는 물 같은 풀을 이용해 직접 하얀 통에 여러 가지 색지를 붙여가며 드디어 완성이 되었다. 



▲ 전주 목판체험관에서 한지로 만든 연필꽂이



처음에는 ‘이거 어려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여 만들었는데 점점 하다 보니 정말 재미가 붙어서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이번 8월 현장탐방을 마치며 우리 한옥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고 우리 한옥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왜 일본인들에게 주거지를 뺏겼는지 등등의 많은 신기한 사실들을 알게 되어 정말 좋고 기뻤다.

다음 9월 현장탐방도 정말 기대가 된다. 국토교통부 어린이기자단 파이팅!!










Posted by 국토교통부


서울에서부터 3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전주한옥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을사늑약 후 일본인들이 전주로 이주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항하기 위해 한옥을 많이 지어 한옥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전주 한옥마을 전경



전주에는 한지를 만들 때 쓰는 닥나무가 많아 한지가 유명합니다.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한지원에 들러 한지를 만드는 과정과 완성된 한지를 보았습니다.



  



다음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전동성당의 내부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천주교 순교자가 나온 전동성당을 나와 태조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는 어진박물관에 갔습니다.





다음은 공예품 전시관에 들러 한지 연필꽂이를 만들었습니다.    

주 한옥마을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한옥체험을 하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전주한옥마을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전주 부성 밖에 살다 성벽이 무너지자 성안에서 일본인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교동 근처에 살던 선비들도 성안에 한옥을 짓고 살았는데 그 선비들의 집, 한옥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전주한옥마을이라고 한다.


전주한옥마을 근처에서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오목대인데, 벽오동나무를 따서 오목대라고 한다. 한 번은 오목대에서 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고조부인 목조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가 힘들어서 한 번밖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길가에서 성벽의 터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성벽이 없지만, 성벽이 있었던 자리를 표시해 놓은 것은 있다.


전주한옥마을 앞에 가면 비석을 하나 볼 수 있는데 그 비석의 이름이 하마비이다. 비석 아래에 암수 해태가 있는데 오른쪽이 수컷, 왼쪽이 암컷이다. 이 비에 들어갈 때는, 신분 차이 없이 누구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뜻이 담겨있다. 들어가면 홍살문이 보이는데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붉은색과 삼지창이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경기전이 보인다. 경기전으로 들어서면 첫 번째로 드므가 보인다. 이 드므 덕분에 경기전은 불에 탄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볼 수 있다. 원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26점이 있었는데 많이 없어져서 경기전에 있는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어진박물관에 갔었다. 어진박물관에는 어진을 실어나르던 가마와 여러 왕의 어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어진을 나를 때의 행렬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어진박물관에서 나오면 저 멀리 전동성당이 보인다.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안에 얽힌 슬픈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 설화는 이렇다. 윤지충과 권상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천주교를 믿었다. 그래서 가르침에 따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신주를 불에 태웠다고 한다. 그로 인해 둘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했는데, 그 둘의 피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동성당에도 이런 슬픈 설화가 얽혀있어 놀라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슬프기도 했다.



    


    



전주한옥마을에는 이렇게 많은 볼거리들이 있고 많은 뜻도 담겨있다. 전주한옥마을에 와서 좋은 추억을 남기고 가게 되어 정말 즐거웠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후백제의 수도이며 조선왕조의 초석이 되었던 전주 한옥마을과 주변 문화 유적지를 지난 9월 19일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이 방문했습니다. 친절했던 문화해설사분의 안내로 탐방이 이뤄졌는데요.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전주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1930년을 전후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마을을 만들어 나간 것이 그 시작점이라고 합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정신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우리의 선조들이 한옥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전주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도심 속에 700여 채의 한옥군락이 형성된 도시로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했던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할아버지인 목조대왕 이안사가 태어나 살았던 곳으로 전주 이씨의 발상지입니다. 결과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는 조선의 근본이 된 땅이자 나라를 건국한 근원지였던 것인데요. 오목대는 이안사가 풍광을 즐기며 노닐던 곳이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이곳에 들러 전승 축하 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목대와 오목대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목대 탐방로에는 500년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전주 한옥마을은 자신의 문화와 향기를 지켜낸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마을이라는 의미인 국제 슬로시티 인증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표석입니다. 이 경기전 앞 하마비는 암수 한쌍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이고, 웅장하고 품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태종 10년에 건립한 경기전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입니다. 백성들에게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었고, 왕씨에서 이씨로 임금의 성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 여섯 개의 도시(평양, 경주, 개경, 한양, 영흥, 전주)에 어진을 모셨다고 합니다. 태종 때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는데, '경사스러운 이 땅에 임금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경기전으로 세종대왕이 개명했다고 합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 시대에는 집을 지을 때 규제가 엄격했다고 하는데요. 지름 50cm인 둥근 '두리기둥'은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리기둥이 많은 경기전은 단순한 사당의 개념이 아닌 왕이 사는 궁궐을 의미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두리기둥 밑에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구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공간부터는 천상으로 이어지는 의미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진전이 피해를 입었는데요. 그러나 경기전 어진은 전쟁 중에도 전주의 많은 선비들이 7년동안 정읍의 내장산에서부터 북한에 있는 묘향산까지 이동하며 끝까지 지켜냈고, 현재는 국보 제317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전국 4대 사고(전주, 충주, 성주, 서울)에 똑같은 복사본을 보관했는데, 왜군이 모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그 이유는 역시 전주의 선비들이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어진과 실록을 목숨걸고 지키려 노력했던 결과라고 합니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분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태조의 60세 때 모습이며, 27개가 그려졌지만 현재 전주 어진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진은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사람만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3명의 화가가 함께 궁궐에서 생활하며 정숙한 마음으로 길일에만 조금씩 태조의 어진을 그려나갔다고 하는데요. 3개 조로 나눠 어진을 그렸고, 그 중 가장 실력 좋은 사람이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어진은 기름종이로 본을 떠 비단에 옮겨 그렸는데요. 비단 뒷면에 색을 칠하는데, 한올씩 비단에 색을 넣기 대문에 오랜 시간 동안 그렸다고 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채색법은 우리만의 독특한 초상화 화법으로 '배채법'이라고 합니다. 어진을 그렸을 당시에는 포토샵과 같은 컴퓨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태조의 어진에서 곤룡포가 파란색인 이유는 조선의 건국자라는 의미, 즉 시작의 의미를 표현한 색이라고 합니다. 다른 임금들은 모두 빨간색을 입었는데 태조만 파란색의 곤룡포를 입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조선 시대의 왕들은 매미의 5가지 장점을 닮아야 좋은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매미 모양의 모자인 익선관을 쓰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매미를 가장 고고하고 신령한 곤충으로 생각해 최고의 지덕을 가진 곤충이라고 예찬했다.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은 매미의 다섯 가지 덕목인데, 왕이 정사를 보기 위해 모자를 쓸 때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만 했다. 오덕의 교훈은 매미의 입이 마치 선비의 갓끈과 같이 곧게 뻗은 것처럼 왕은 배우고 익혀 선정을 베풀어야 하며, 매미가 이슬이나 나무진을 먹고 사는 것처럼 청결해야 하고, 농부가 가꾼 곡식이나 채소를 해치지 않는 것처럼 청렴해야 하며, 다른 곤충과 달리 집이 없는 것을 본받아 검소해야 하며, 늦가을이 되면 때를 맞춰 죽을 정도로 절도를 지키는 것을 배워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익선관의 교훈』, 최요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서울에서 전주까지 가마를 타고 왔는데, 이를 '어진 가마'라 한다고 합니다. 임금님이 행차하듯 어진도 똑같이 200~300여 명이 8일 동안 모셔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어진을 옮길 때 평상시에는 가마를 타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유사시에는 '흑장통'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어진을 말아서 옮겨다니며 피난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인데요. 조선왕조 519년 동안 27분의 어진을 그렸지만 현존하지 않고, 어진박물관에 전시된 것만 남아있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있는 세종대왕의 모습은 추상화인 셈이지요.









전동성당은 1908년에 땅을 사서 1931년 까지 지은 건물이며, 호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 건물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것인데요. 이곳에 성당을 지은 이유는 신해박해 때 윤지충, 권상현이 처형을 당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윤지충, 권상혁 두 순교자는 복자가 됐습니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신부의 작품인데요. 마치 엄마의 자궁 속처럼 신비롭고 편안하며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무형문화재 한지발장 명인인 '유배근'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한지만들기 체험을 했는데요. 꽃잎 등 재료를 고르고, 닥나무 물을 양쪽으로 흔들어 평평하게 만든 뒤 물기를 빼줍니다. 그 위에 재료들로 꾸미기를 하고 다시 닥나무 물을 평평하게 펴서 올려준 다음, 꾸민 한지 위에 붙여줍니다. 물기를 말린 후 철판 위에서 천천히 말리면 한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지만들기 체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한 황실 '승광재'가 있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었는데요. 한지 만들기 체험을 기다리며 한 번 방문하고, 이후에 다시 한 번 방문해봤습니다.  비록 이석 할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승광재를 조용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요. 예전에 TV에서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도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승광재 입구에 있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강의 제목을 보며 아픈 역사의 산 증인이신 이석 할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를 아직은 잘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집안의 큰 어르신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면 세상을 보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을 부모님께 자주 들었습니다. 승광재를 방문한 이후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될 수있었습니다.









울에 위치한 북촌 한옥마을은 도시와는 다른 평안함을 주는 곳이라 가족과 함께 자주 방문했던 곳입니다. 북촌 한옥마을과는 다른 모습의 작은 시골 마을일 것이라 생각하며 방문했던 전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 유적지이자 힐링의 공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요.



특별히 많은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한옥마을 주변을 걸어다니거나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즐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제 슬로시티라는 말의 의미가 더욱 와닿았는데요.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려는 피나는 노력과, 나를 빼앗겼지만 정신마저 빼앗기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한옥마을을 만든 전주 선조들의 애국심에 큰 감동을 받았던 탐방이었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지난 9월 19일, 전주 한옥마을 탐방과 함께 한지만들기 체험을 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이목대와 오목대였는데요. 태조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토벌한 뒤 이곳 오목대에서 개선잔치를 하며 새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을 다졌다고 합니다. 






▲ 오목대에서 바라 본 전주 한옥마을 풍경





그리고 이목대와 오목대의 가운데 글자인 '목'자는 목조대왕의 '목'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목대와 오목대는 서로 떨어져 있어 다리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전주 이씨의 맥을 없앤다고 연결된 길을 잘라 지금은 육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목대는 자만마을이라고도 하며 자손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면 번영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고종이 직접 쓴 비석도 남아있습니다. 






▲ 500년된 당산나무






그리고나서 전주 한옥마을의 500년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를 보러 갔습니다. 당산나무는 주로 팽나무와 느티나무를 쓰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합니다.



당산나무 앞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인데, 나라를 망했지만 이 마을에는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옥을 한 채씩 만들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 한창 아파트가 유행하고 있을 때에도 전주 한옥마을은 개발을 하지 않아 지금의 모습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700여 채의 한옥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제 슬로우시티로 지정돼 있습니다.






▲ 하마비





다음으로 조선 왕조를 건립한 것을 기념해 전주에 세웠다는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기전으로 갔는데 경기전 앞에 하마비라는 비석이 떡하니 서있었습니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태조가 있으니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고 세워둔 비석이 바로 하마비인 것이지요. 



경기전의 하마비가 일반적인 하마비와 비교했을 때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암수 두마리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라고 합니다. 경기전으로 들어가면서 두리기둥을 봤는데, 역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라 그런지 기둥하나도 궁궐의 양식이었습니다.






▲ 태조 이성계 어진





왕의 초상을 어진이라고 해서 어진전이라고도 불렸지만, 태종이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줬다고 합니다. 어진전은 전주 외에도 개경, 평양, 한양, 경주에도 있었지만 경기전만 남았고, 원래 태조의 어진을 27개 그렸지만 지금은 딱 하나가 남았다고 합니다. 이 어진은 13명의 화가가 나눠서 그렸는데,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이 얼굴을 담당했다고 하며, 어진을 그릴 때는 비단을 사용한 배채화 기법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 영화에 나온 대나무 숲





문 옆에는 수복청이라고 제사상을 준비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매화나무가 있었습니다. 매화나무는 호문목이라고 하는데 선비가 글을 읽는 것을 듣고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전 안에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이 대나무 숲은 '왕이 된 남자'라는 드라마와 '역린'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유명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 전주사고





또한, 경기전 안에는 세종 21년에 설치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전주사고가 있었는데,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임진왜란 때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조가 전주사고의 실록을 보고 4개의 사본을 더 만들었지만, 현재는 2개만이 남아있다네요.



조경묘는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이성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옆에는 어진을 소장한 어진박물관도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진을 옮길 때 쓰던 가마가 있었습니다. 엄청 길고 넓었던 가마였는데 이 가마를 신연이라 한다고 합니다. 어진은 피난을 갈 때에도 행렬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옮기기가 힘들다고 하며, 어진을 모신 건물의 정자각 돌추부에는 화재막이용 거북이 암수가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한지를 만들러 갔습니다.






한지만들기 체험 모습





한지를 만드는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한지 틀을 이용해 닥나무물을 넣고 흔들어 한지의 기본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틀 안에 있는 재료를 부직포 위에 올려놓은 후 원하는 꽃을 이용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꾸며줍니다. 다시 한 번 앞의 과정을 반복한 뒤, 꾸며둔 한지를 다시 만든 한 겹의 한지로 덮어줍니다. 그 다음에 부직포를 기계로 탈수시킨 뒤 뜨거울 철판 위에 올려 말려주면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가 완성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지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이 무형문화재에 등록된 한지발장 유배근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전주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전란 속에서도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켜냈던 애국심과 국제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전주의 모습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끝으로, 자유시간을 활용해 고종 황제의 손자인 황손 이석 할아버지를 만나뵀는데요. 짧게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석 할아버지 인터뷰>






▲ 이석 할아버지와 어린이 기자

 




어린이 기자 :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시고, 몇 번째 자손이신가요?


이석 할아버지 : 아버지는 의친왕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기골이 장대해 조선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많은 자손을 두셨는데, 저는 11번째 아들이랍니다.


어린이 기자 :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좋아하는 왕은 어떤 분이신가요?


이석 할아버지 : 세종대왕님을 가장 좋아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만드셨기 때문인데요. 그리고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저와 효령대군의 얼굴을 합쳐 만든 것입니다.


어린이 기자 : 미래의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이석 할아버지 :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은 역사를 소중히 생각해 역사 제대로 알기를 꼭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머리 글자를 합해 만든 지명으로, 고려 현종 때의 전라주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본 기자의 성은 나주 나씨이며, 조상님의 성함은 나봉이고 72대손입니다. 나주에 조상을 두고 살아온 본 기자는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 도시이자 태조 이성계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전주에 갔습니다.



전주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 본향이라고 불립니다. 먼저 승암산 발치에 있는 ‘이목대’에 갔습니다. 1900년도에 고종 황제가 이목대에 친필로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뜻은 ‘목조 이안사(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이라는 뜻인데요. 이 점을 통해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전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에 오목대가 있습니다. 이 오목대에서 이성계가 놀았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1380년 고려 말 우왕 때 일본이 고려를 많이 침략하자 우왕은 이성계에게 일본을 물리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성계는 일본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는데요.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산 대첩입니다. 이성계가 고려의 수도 개경으로 가던 도중 전주에 있는 오목대에 들러 승전을 자축하며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이성계가 자신이 새로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오목대에서 대풍가를 읊었다고 합니다. 고종 황제가 이를 기념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고 친필로 써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오목대에서 내려다 보면 전주한옥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데요. 한옥의 지붕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부드러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검은색의 한옥 지붕이 거북이 등딱지를 연상시켜 도시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은 80여만 평의 땅에 700여 채의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의 전통을 잇기 위해 전주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한옥을 지었다고 합니다.









경기전 입구에 하마비가 세워져있습니다. 하마비에는 ‘지차게하마자번무득입’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이 뜻은 아무리 권위가 높아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입니다. 경기전 안에 들어서면 홍살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의 기둥은 ‘둥근두리기둥’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지름은 대략 50cm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궁궐에서만 사용가능한 건축 방법이라고하네요. 홍살문이 있는 곳은 신성한 곳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홍살문 뒤에 ‘경기전’ 본전이 있습니다. 경기전에는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데요. 어진은 임금님의 초상을 높이 받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름은 어진관인데 세종대왕께서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는 ‘경사스러운 땅에 임금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태종 10년(1410년)에 이 건물을 건립했는데요. 평양, 경주, 개경, 한양, 영읍, 전주에 어진을 모셨다고 합니다. 









경기전에는 3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이 3개의 문 중 가운데 문은 제사를 지낼 때만 들어가는 외신문입니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는 9월 9일에만 개방을 한다고 합니다. ‘동쪽에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온다’라는 개념을 가진 동입서출 사상을 지키기 위해 조상들은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들어가고 서쪽에 있는 문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전주 선비들이 이성계의 어진을 지키기 위해 내장산의 용접굴, 충청남도, 강화도로 피신 갔다가 묘향산 보현사에 어진을 안치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에도 어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입니다. 전주, 풍주, 서울, 성주에 조선왕조 실록을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만 빼고 다른 곳에 위치했던 조선왕조실록들은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전주 선비들이 노력을 했다는 점에 또다시 감동의 물결이 넘쳐흘렀습니다. 조상님들의 노력 덕분에 이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지막으로 대한 황실 승광재에 갔습니다. 이 곳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의 손자인 ‘이석’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승광재라는 뜻은 "빛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를 계승한다는 의미도 담고있다고 합니다. 승광재에서는 조선역사알기, 황실다례익히기, 황실예법익히기 등의 황실문화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전주가 있기에 조선의 찬란한 500년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고 또한 조선의 역사를 간직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도시지만 볼거리와 뜻 깊은 역사가 넘쳐나는 전주! 전주의 모습을 우리가 아끼고 잘 가꾸고 보전해 세계에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지난 9월 19일, 국제슬로시티 전주 한옥마을에서 '장인에게 배우는 한지체험과 전주 한옥마을 탐방'이 진행됐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형성한 한옥촌인데요.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습니다. 또한 전주 한옥마을은 매년 어마어마한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놀이동산인 에버랜드에 7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왔다면, 놀이기구가 없는 전주 한옥마을은 무려 600만 명의 관광객이 2013년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 오목대





전주 한옥마을의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에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잠시 머물렀던 곳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건립했는데, 비석에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고 적혀있습니다. 이는 고종 황제가 직접 비석에 쓴 친필이라고 하는데요. 오목대와 목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대왕의 목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 하마비





전주 한옥마을의 또 하나의 볼거리인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입니다.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표석입니다. 경기전에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의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라는 문구가 하마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 홍살문






수복청





경기전의 홍살문은 신성한 마음을 갖추라는 의미에서 세워진 문이고, 아주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전 옆에 보이는 부속건물 수복청은 경기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경기전에는 왕의 어진이 있어 궁궐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이성계의 어진이 전국 6곳에 있었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5곳이 불타고 이곳 전주만 남았다고 합니다.






전주사고





경기전의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전국 4곳에 보관돼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3곳이 유실되고 바로 이곳 전주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돼 있습니다.






▲ 태조 이성계의 어진





어진박물관에서 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통해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눈은 작고, 귀는 큰 모습이었는데요. 어진을 그릴 때 비단에다 그리는데, 색을 앞에서 칠하지 않고 뒤에서 칠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대문에 이것을 '색을 칠한다.'는 말 보다는 '색을 넣는다'고 표현한다고 합니다. 이를 배채법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태조 이성계는 파란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쓰고 있습니다. 익선관은 마치 매미처럼 생겼는데, 익선관을 쓰는 이유가 바로 매미의 5덕을 닮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 매미의 5덕 



 ① 머리 모양이 선비가 쓰는 관을 닮았으니 문덕을 갖췄다.


 ② 이슬만 먹고 사니 청덕을 지녔다.


 ③ 메뚜기 등과 달리 농부가 가꾼 곡식과 채소를 해치지 않으니 염덕이 있다.


 ④ 들짐승과 날짐승, 곤충 등 모든 생명체가 살 집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게 매미는 집을 짓지 않으므로 검덕이 있다.


 ⑤ 철 맞춰 왔다가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 오면 때를 봐서 스스로 떠날 줄 아니 신덕을 갖췄다.







흑장통





흑장통은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 어진을 옮기기 위해 사용했던 통으로 흑장통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넣어 옮겼다고 합니다.






▲ 한지 만들기 체험 과정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31호 한지발장 보유자 유배근 선생님께 배우는 한지 만들기 체험도 진행됐습니다. 원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간단히 어린이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는데요. 먼저, 꽃과 나뭇잎 등 필요한 재료를 고른 후, 닥나무 물에 발을 담궈 종이 위에 찍고 골랐던 꽃과 나뭇잎으로 꾸며줍니다. 그다음 다시 닥나무 물로 덮고,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 철판에 말리면 한지가 완성됩니다. 정말로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이번 탐방을 계기로 아름다운 우리 자연과 역사를 더욱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고, 아름다운 한옥마을에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어졌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9월 19일 금요일, 처음으로 어린이 기자단 현장탐방에 참여했습니다. 집이 수원이라 어머니와 함께 6시에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으로 갔는데요. 이른 아침이라 지하철에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첫 탐방인 만큼 기대를 했고, 이번 탐방은 기대치보다 훨씬 높았을 정도로 보람차고 재미있었습니다.






▲ 오목대에서 바라본 한옥마을




 

먼저, 처음 우리는 한옥마을 입구에서 오목대에 올라갔습니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조선을 만들기전 올랐던 곳이라고 하는데요. 오목대에 올라서서 바라본 전망은 너무나 멋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인 한옥이 정말 많이 보였기 때문인데요. 신기하게도 한옥마을 에서는 한옥의 용마루가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전봇대와 전선줄을 모두 땅 속으로 묻었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곳과는 다르게 한옥의 자태를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보이던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때 오목대에 지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시작점에 서양 종교 시설을 세울 수 없다는 반대 의견에 의해 전동성당은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 당산나무





오목대에서 한옥마을 전체를 본 뒤에 문화해설사님을 따라 당산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당산나무는 한옥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어주는 500년 된 나무 라고 합니다. 이 당산나무는 느티나무인데, 옛날에 보릿고개에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느티나무의 새순은 정말 귀했던 것이라는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나니, 느티나무가 더욱 고마운 나무로 느껴지는것 같았습니다. 






전동성당 외관





그 다음 간 곳은 전동성당입니다. 전동성당은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합니다. 원래의 전동성당은 성당 건물이 없고, 주변에 성곽이 있었는데 일제 시대 당시 일본인들이 그 성곽을 모두 허물고 도로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초대 전동성당 주임 신부님이셨던 윤사물 신부(한국명)께서 도로를 짓고 난 뒤 나온 흙으로 성당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 전동성당 내부 모습





또 전동 성당에는 우리나라의 최초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터가 있습니다. 이 둘이 순교될 때는 추운 겨울이였는데, 피가 계속 흘러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바위는 지금 전동성당의 받침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전동성당은 영화촬영지로 유명하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전동성당의 창문은 다른 성당들에 비해서 작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햇빛이 잘 안 들어오게 함으로써 성당 내부에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라고 하네요.






▲ 하마비





밥을 먹기 전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에 갔습니다. 경기전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있었는데, 하마비는 말그대로 말에서 내리란 뜻을 담고 있는 비석이었습니다. 즉 신분의 고하를 떠나 아무나 출입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수복청에서 조선에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조선은 기록의 역사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를 통해 더 자세한 역사적 사건이나 배경에대해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조선왕조실록을 자신의 전재산을 바쳐 지킨 두 선비가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조선왕조실록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우리나라의 기록 유산을 지켜주신 두 분께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 일월오봉도



또 일월오봉도가 있었는데, 그중 해는 임금, 달은 왕비, 파도는 백성, 소나무는 신하들, 마지막으로 다섯개의 봉우리는 우리나라의 산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해설사 선생님은 전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전주는 조선 왕조가 시작된 곳이고, 닥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라 한지를 만들수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출판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동화나 판소리를 책으로 만들었고, 한지로 부채도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 태조 이성계 어진




어진 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왕들의 초상화를 볼 수가 있었는데, 왕의 초상화는 지금 딱 7개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이성계의 왕관(익선관)인데, 이성계의 왕관은 매미의 날개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미의 5덕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5덕은 인내,명치, 검소, 믿음, 문입니다.






<한지 만드는 방법>






1. 한지를 만드는 틀에 닥나무를 풀어 놓은 물을 담고 흔들어줍니다.






2. 틀에 담긴 닥나무가 풀린 물을 부직포에 담고 봉숭아 꽃 등으로 꾸며줍니다.






3. 한 번 더 닥나무가 풀린 물로 덮어준 뒤에 부직포를 탈수시킵니다.






4. 마지막으로 뜨거운 철판 위에 탈수시킨 부직포를 올리고 빗자루를 이용해 꽃이 한지에 잘 흡착될 수 있도록 쓸어내리면서 말려줍니다.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한지가 완성된답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시 한옥마을로 돌아와 한지 만들기 체험을 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한지 만들기를 마치고 한옥마을 뒷길을 걸었는데, 걷다가 승광재라는 곳에 우연히 갔습니다. 승광재는 조선의 마지막 황손인 이석이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석은 궁궐에 살 수 없어 전주에서 특별히 한옥을 지어주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문득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생긴 의문점이, 왜 영국은 여왕이 궁궐에서 그렇게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데, 우리나라는 황손 그것도 마지막 황손이 왜 대우 받지 못하며 사는지 너무 궁금했고, 우리나라에 조금 화가 났습니다.






승광재




이렇게 탐방일정이 끝났는데요. 돌아오는길엔 가는길과 다르게 차가 좀 막혀서 세시간 가까이 걸린것 같습니다. 비록 학교와 학원을 빠지고 왔지만, 그만큼 더 많은것을 얻어가는 탐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탐방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인터뷰를 해보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탐방으로 인해 다음 탐방을 더욱 기대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