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9월에 가족들과 함께 오랜 역사(歷史)를 지닌 춘포역을 방문했습니다.

 



더이상 기차가 오지 않는 그곳, 춘포역


전라북도 익산에 위치한 춘포역



춘포역은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춘포117-1에 있습니다. 19141117일에 간이역으로 개방되어 사용되었으나 2011513일에 폐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춘포역 내부

 

느린 우체통



춘포역에 가까이 오자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이 곧 드러났고, 춘포역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니 웅장한 나무와 더불어 넓은 공터와 함께 춘포역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춘포역사 내부를 파란색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춘포역사에 대한 설명과 일제강점기 시절 교복이 흘깃흘깃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개방하는 것 같았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인지 내부를 둘러볼 수 없음에 아쉬웠습니다.

 

역사 앞에는 여느 역과 같이 느린 우체통도 있었는데요, 살펴보니 우체통에 거미줄이 처져 있어서 관리가 소홀한 점에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춘포역에도 나름대로 공연과 이벤트들이 있었습니다. 춘포역사 앞 공터에서 준비하는 백일장과 공연도 있었고, 익산 자전거 트래킹도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많은 공연과 이벤트를 즐기면서 우리나라의 오래된 역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춘포역사 앞에 놓여있는 등록문화재 안내판



주변에는 교회와 만경강 뚝방길, 일제강점기 시절 에토라는 사람이 살았던 에토 가옥(등록문화제 211)도 있다고 합니다.

춘포역은 한 세기 이상을 산 가장 오래된 역사[驛舍]로 등록문화재 210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귀중한 유산인데요, 1914년 춘포역은 주로 일본인들의 쌀 수탈을 위해 생겨난 역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였는데 일본인들이 훔친 우리나라의 쌀을 손쉽게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셈입니다.

 

춘포역이 업무를 시작한 때는 마을의 이름을 따 오오바역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오오바를 한자로 읽은 대장(大場)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 마을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대가 있었고, 1996년부터 마을의 옛 이름인 봄개역으로 개명되었는데요, 그 후에는 봄개를 한자로 바꾼 춘포(春浦)역으로 불리면서 지금까지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활발한 이동이 이루어졌으나 해방 후에 발길이 점차 뜸해지더니 2007년에 열차가 더이상 다니지 않게 되는데요, 결국 2011년에 역사를 제외한 다른 시설들이 모두 철거된 후 폐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비오는 날의 춘포역 모습

 


춘포역의 역사를 알게 되자 춘포역사 내부에 일제강점기 시절 교복이 걸려있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습니다. 또 춘포역이 일제강점기 시절과 광복을 모두 지켜보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자 숙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가장 오래된 역인 춘포역과 함께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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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하늘 위로 열린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도개교’(跳開橋)는 배가 지나갈 때, 다리가 한쪽 또는 양쪽으로 들어올려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든 다리를 말하는데요. 마치 하늘 위로 다리가 열리는 듯한 모습이죠.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유일한 도개교는 바로 영도다리인데요. 10여 년 전 노후문제로 철거까지 거론됐던 영도다리가 지난 20098월 복구 작업에 들어가 20131127일에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그저 신기한 다리였던 영도다리를 직접 찾아가 봤는데요. 영도다리, 저와 함께 건너가 보실래요?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


영도다리는 193411월에 완공된 길이 약 214.63m, 너비 약 18m의 도개식 다리입니다. 일제시대에 부산광역시와 영도구를 원활하게 연결하기 위해 놓은 다리입니다. 하지만 영도다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 해운업자들은 다리 아래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요. 대형 선박은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었습니다.

 

이에 설계된 영도다리의 모습은 다리를 들어 올리는 방식인 도개식이었습니다. 영도다리가 개통되는 날, 도개 모습을 보기 위해 부산, 김해, 밀양 등에서 6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하는데요. 순식간에 영도다리는 부산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영도다리는 어떻게 열릴까?


영도다리는 개통 당시 부산대교였으나, 1980130일 부산대교가 개통되면서 영도다리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영도다리는 어떤 원리로 열리는 걸까요?


영도다리의 도개식 원리는 다리 바깥쪽에 무게추를 달아 무게의 균형이 조금만 깨지면 다리가 올라갈 수 있게 한 뒤 톱니바퀴로 다리를 들어 올린다고 합니다.

 

도개모습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오후 2시까지 영도다리 앞에 도착해 있으시면 2시부터 15분간 도개모습을 보실 수 있는데요. 다리 위쪽에서 보아도 좋은 구경거리겠지만 진짜 명당은 다리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마침 여행용 배가 지나가서 손도 흔들어보았습니다.

 


부산 영도다리가 도개하는 모습




근대문화가 깃든 국내 유일 다리 축제 영도다리축제


국내 첫 연육교로 개통되어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망향의 슬픔을 달래고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다리가 바로 영도다리였습니다. 영도다리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면서 많은 근현대사의 유적들이 남아있는데요


매년 이곳에서는 한국의 근대문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참여형 축제이자 국내 유일의 다리 축제인 <영도다리축제>가 열립니다. 올해에는 영도다리의 추억과 낭만이라는 주제로 10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영도대교 및 봉래동 물양장 일원에서 개최된다고 하는데요. 축제 기간에 영도다리를 방문하신다면 더욱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2019 영도다리축제 포스터



 

영도다리, 삶을 구하는 생명의 다리로!


1934년 개통된 영도다리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애환을 실어 날랐습니다. 6·25 전쟁 당시 많은 피란민이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약했고, 상봉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한 맺힌 피란민들은 가족을 꼭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점괘를 듣기 위해 다리 밑 점집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눈물의 영도다리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했지요. 하지만 6·25 전쟁 이후에도 자살자가 하도 많아 영도다리에는 잠깐만’ ‘생명은 하나뿐이라는 자살방지 푯말이 붙었습니다.


이제는 멋진 모습으로 변신한 영도다리가 삶을 포기하고 싶은 분들에게 한 번 더 자신의 삶에 기회를 주는생명의 다리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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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교통부는 일제강점기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작성된 지적ㆍ임야도의 등록원점(지역측지계의 동경측지계)체계를 2020년까지 세계가 표준으로 사용하는 좌표체계(지구질량 중심의 세계측지계)로 변환할 예정입니다.


측지계(測地係, Geodetic Datum)란 지구의 형상과 크기를 결정하여 곡면인 지구의 공간정보(지형ㆍ지물)의 위치와 거리를 나타내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지적ㆍ임야도 등 지적공부는 1910년 토지조사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동경원점 기준인 동경측지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동경측지계는 세계측지계보다 약 365m 북서쪽으로 편차 발생 


■ 지적공부를 세계측지계로 변환해야 하는 이유는? 

2010년 측량법을 개정하여 이미 세계측지계로 지표상의 공간정보를 표현하는 지도(지형도*, 해도, 군사지도 등)와 동경측지계를 사용하는 지적공부는 호환성이 떨어져 지적공부 기반의 공간정보를 제공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 지형도란 권리관계를 나타내는 지적도와 달리 지형ㆍ지물의 위치를 표현하는 지도


또한 일제 잔재 청산의 의미도 크다. 일제강점기 동경측지계에 의해 작성되어 100여 년 간 사용한 지적공부를 국제표준의 세계측지계로 변환함으로써 일제 잔재가 청산되고, 우리나라 모든 공간정보는 국제표준으로 바뀌게 됩니다.


국토부는 소유권과 밀접한 지적공부를 세계측지계로 변환하기 위해‘13년도에 선행사업을 추진하여 변환절차와 방법을 검증하고, ‘14년도에 본 사업을 추진하여 전국토의 5%인 163만 7천 필지를 변환했습니다.


금년에도 전국토의 10%인 300만 필지를 변환하고, 2020년까지 국가재정 부담 없이 지자체 담당공무원이 직접 위성측량방법으로 기준점측량에 의해 전국토를 세계측지계로 변환한다. 직접수행으로 총 사업비(1조 3천 억)의 8.8%인 1,146억 원의 국비가 절감됩니다.  


세계측지계 변환은 지적ㆍ임야도에 등록된 토지경계는 변하지 않고 도면상 위치만 남동쪽으로 365m 이동되는 것으로, 실제 토지의 위치는 변동되지 않으며, 권리면적, 토지소유권과 그 이외의 권리관계 등에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국토교통부 계획대로 2020년까지 지적공부가 세계측지계로 변환 완료되면 국제표준의 세계측지계 좌표로 정 위치에 등록된다. 이처럼 일제잔재가 청산됨으로써 국가 위상은 높아지고, 지적공부와 공간정보가 융ㆍ복합된 다양한 콘텐츠가 개발됨에 따라 공간정보 산업이 활성화되고 소유 권리관계 확인이 편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참고. 측지계 개요.pdf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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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토교통부 대학생 기자단 최서진, 황외성 기자입니다

지난 919일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방문 했는데요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학생 기자단이 그 길을 함께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른 아침 양재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10시경 전주 한옥마을에 도착했습니다도착하자마자 한옥마을 탐방이 시작 되었는데요. 먼저 태조 이성계의 정기가 서려있다는 오목대로 향했습니다.



오목대는 1380년 고려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친 태조 이성계가 승전잔치를 벌인 곳입니다. 조선왕조를 개국 하고 나서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오목대라고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강점기 시절에는 조선의 맥을 끊는다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오목대의 중간에 길을 만들었다는 슬픈 역사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목대에서 내려와서 한옥마을 중심에 있는 전동성당으로 향했습니다
. 최초의 순교지로도 유명한 전동성당은 프랑스 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순교의 뜻을 기르고자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일제강점기에 설계해서 건물이 명동성당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군이 전주읍성을 헐면서 버린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지었다고 하는데요.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이였습니다.


이 붉은 벽돌을 이용해서 지은 건물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에서 나온 돌로 주축돌을 삼았다고 합니다
.



호남지역 최초로 건립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과 대조적으로 그 앞에는 태조 이성계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으로 향했습니다.



1410년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고 제사를 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 이라고 했습니다경기전은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의 발상지로 전주 이씨인 이성계의 왕조인 조선의 발상지라고 여겨졌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어진을 보니 늠름하고 위엄이 돋보이는 인상을 받았습니다점심식사 후 무형문화재 명인 유배근 선생님의 지도와 함께 한지발 체험을 했습니다.



한지발을 짜는 시간은 고됨의 연속이고 담양에서 사온 대나무를 일일이 얇게 깎아 좀이 슬지 않도록 소금을 넣어 5시간을 삶아 내야 하며 이를 다시 3번에 걸쳐 앏고 깔끔하게 다듬어야 비로소 발을 짜는 준비가 끝납니다.



일단 발을 짜기 시작하면 쉴 틈도 없다고 합니다말총을 일일이 엮어 짜는 전통 한지 발은 유배근 선생님이 더욱 정성을 쏟는 품목 이였습니다.

유배근 선생님은 판지의 우수성을 위해서 평생을 고민하며 우리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한지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에서 한지만들기 체험에 대한 문의가 들어와서 일본에서도 우리 한지의 우수성과 명인의 솜씨를 널리 펼치고 있습니다.



어린이 기자들도 한지를 직접 만들어 보았는데요한지의 제작과정은 첫째 닥다무를 채집하고, 닥나무를 증기로 찌고, 질을 벗기는 작업 후에 물에 담가 불려서 겉 껍질을 벗깁니다.

그 후 잿물에 삶고 닥메로 두들기고 물통
(보걸이)에 넣어 잿물을 빼냅니다.



건져서 물기를 빼낸 후 표백통에 넣은 후 지통에 넣고 닥풀과 함께 혼합합니다.



다음 발로 뜬 다음에 철판에 만들어 완제품으로 창호지나 백선지 피지 등을 생산합니다열심히 집중해서 나만의 한지를 만드는 어린이 기자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어린이 기자단들과 함께 하면서 어린이 기자단들의 취재열정에 저희도 더욱 더 취재를 열심히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앞으로도 어린이 기자단들의 활발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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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세한 기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14.09.30 22: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우리가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떠올리는 제주!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제주의 특별한 지역을 소개합니다.

 

 

바로 '제주 알뜨르 비행장'인데요.

 

 

이름조차 생소한 이곳은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알뜨르라는 이름은 아래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인 '알'과 들판을 뜻하는 사투리인 '뜨르'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알뜨르를 보며 이곳이 아름다운 제주의 송악산 아래에 위치해서 지어진 이름은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서울의 여의도 넓이만한 비행장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을 폭격하기 위한 전략기지로 활용했습니다.

 

 

 

 

 

▲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

 

 

 

 

자동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들판 곳곳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둥근 지붕의 구조물들이 보였는데요.

 

 

 

 

 

▲ 알뜨르 비행장의 제주 할머니

 

 

 

 

차에서 내려 밭에서 일하고 계신 할머니께 여쭤보니 비행기 격납고라고 하셨습니다. 덧붙여 1920년대 중반에 일본 사람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이 곳 모슬포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다 만든 곳이라고도 설명해주셨습니다. 이 때 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요. 아픈 역사를 생각하니 정말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지금도 이곳을 보기 위해 찾아온다고 할머니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 '제로센' 비행기를 보관하고 있는 격납고

 

 

 

 

 

▲ 격납고 안의 '제로센' 비행기

 

 

 

 

현재 알뜨르 비행장에는 일본이 만든 38개의 격납고 중 20개가 남아있는데요. 20개의 격납고 중 한 곳에는 '제로센'이라는 비행기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가 사용했던 비행기라고 합니다.

 

 

이렇듯 제주는 일제강점기 때의 아픔 뿐만 아니라, 몽골의 침략과 제주 4·3사건까지 많은 아픔이 있었던 곳입니다.

 

 

하지만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2005년에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는데요.

 

 

다음에 제주도에 갈 기회가 있다면, 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에도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다가올 광복절을 맞이하며 제주에 여행가는 사람들도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제주도의 아픈 역사도 함께 찾아가본다면 더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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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태규

    즐거웟겟네요^^ 제주도에 이런곳도 있다니~

    2014.10.24 18:23 [ ADDR : EDIT/ DEL : REPLY ]
  2. 박경준

    제주도의 슬픈 역사..

    2014.10.26 23:16 [ ADDR : EDIT/ DEL : REPLY ]


미군이 반환하는 용산공원 예정지를 다녀와서_ 신용우(글, 사진)

 


지금은 2014년 

일제가 이 강토를 송두리째 짓밟은 한일강제병합의 전초전으로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1905년 을사늑약을 맺은 지 109년이 되는 해다. 인간의 108번뇌를 한해에 하나씩 속죄하였다 해도 이미 마친 그 다음해


민족자존을 외치며 홑바지 저고리 차림의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왜놈들과 맞서 조국의 자주권을 수호하려던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60갑자를 두 바퀴 돌아 120주년이 되는 갑오년


선열들의 자존을 위한 함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노도처럼 들려온 까닭이던가하나 더하여, 잃어버린 우리 영토를 되찾자고 항상 외치던 내 소리가 들렸던 것일까뜻하지 않은 기회에 가보고 싶던 곳을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잃어버린 우리 땅

기껏해야 3,000년 역사의 중국이 요동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만주라고 부르며 깔고 앉은, 우리의 고조선 이래 고구려와 대진국이 지배하던 땅, 구려벌, 그 땅


고작 1,500년의 역사밖에 간직하지 못한 일본이라는 나라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 국가의 꼴을 갖추면서 제일 먼저 탐을 내던 땅,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짓밟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위해 강제로 자신들의 땅으로 병합하고 지금도 우리가 그 땅을 돌려 달라고 할까봐 독도를 가지고 헛소리를 일삼는 대마도, 그 땅


아무리 줄여 잡아도 5,000년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숨 쉬는 우리 땅, 구려벌과 대마도를 수복하자고 외치는 내 소리가 들렸던 것일까구려벌이나 대마도처럼 멀리 있는 것도, 커다란 덩어리도 아니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두고도 우리 땅인 것을 잊을 뻔한 땅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밀고 들어오던 날부터만 계산해도 무려 109년이라는 긴 세월을 잊고 살았던 땅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우리 주권이 미치지 못해 내 땅이면서도 내 땅이라고 말하지 못하던 땅.

내 땅을 내 땅이라 하지 못하고 내가 그곳에 살지 못하니 이 어찌 내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으랴?”


조선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부르짖을 법한 소리지만 실제로 서울 한 복판에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다행히 반환되어 다시 찾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땅이다.

 

용산 미군기지가 반납되면 그 곳에 들어설 예정인 공원에 관한 설명과 그곳에 남아있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듣기위해,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공원정책과장의 초대를 받고 국토부 용산공원조성 추진기획단 사무실에서 국토부 직원 몇 분과 합류를 해서 용산 미군기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기 위해 밤잠을 설치던 그 심정보다 더 설렜다. 지금이야 레저 문화가 발달하다 보니 가족 단위의 여행도 많지만 50대 중반의 나에게는 어릴 적 레저의 추억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냇가에서 천렵을 하는 형들이나 아버지 뒤에 깡통을 들고 쫓아다니며 붕어와 송사리를 담은 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레저에 대한 어릴 적 추억으로는 당연히 소풍이나 수학여행이 우선이다. 그 중에서도 초등하교 때의 소풍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소풍가기 전날이면 내일은 제발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중요한 소풍의 추억보다 더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며, 우리를 안내 하기로 한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의 담당 주무관의 기초 설명을 듣는 순간 조금은 섭섭했다.


기지 안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유적은 조선시대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 위해 명산이나 커다란 하천 등지에 단을 수축한 후 국가에서 제를 지내던 산천단(山川壇)악해독단(嶽海瀆壇)’ 유적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미군이 지었거나 아니면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고작이라는 거다설마 그럴까 하는 마음에 이동창 주무관이 잘 못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들었다그러나 그런 바람도 잠시였다.


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내고 일종의 수속을 하는데 ! 정말 이곳이 내가 사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이 드는 순간 설령 유적이 있다 손 치더라도 제대로 보존되었을 까닭이 없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밀려오던 슬픔은 차량을 이용해서 기지로 들어서는 순간 현실과 직면했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미군기지의 모습은 유적 같은 것에는 신경도 안 쓸 그런 모습이었다. 그건 무슨 특별한 것을 보아서가 아니다. 그저 온 몸에 다가오는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제발 이번에는 내 직감이 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시 한 번 들었다.

 


 

<그림 1> 미국관사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미군들이 체육시설로 쓰는 야구장과 축구장이다. 네 개가 있다고 했던 것 같다그리고 다음으로 보이는 것이 미군 관사로 쓰이는 집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우리나라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전원주택이라도 되는 양 집 한 채가 넓은 면적을 편안하게 차지하고 있었다아마도 사병들은 막사를 이용할 테니 장교 내지는 간부 숙소인 듯싶었다.


*그림 1 : 참고로 이후에 게재되는 사진들이 차 안에서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라 상태가 별로 선명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막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미군들이 이용하는 편의 시설과 유치원 등이 있는 곳과 국내 각 미군기지와 연계하는 버스들이 다니는 버스터미널을 만날 수 있었다.(그림 2, 3)

 


 <그림 2 기지내 편의시설을 위한 건물들>

 <그림 3 편의 시설>



이어서 우리가 지난 곳은 삼각지와 녹사평역을 잇는 도로위로 놓인 고가도로다. 그 고가 도로는 이곳이 용산 공원으로 재탄생을 하면 지하통로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아울러 지금은 물이 말라 건천으로 남은 기지내의 만초천의 지류 역시 청계천처럼 물이 흐르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고도 했다.


눈에 보이는 씁쓸한 풍경에 비하면 계획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듣기 좋은 말이었다.


그 때 눈에 들어 온 이상한 풍경이 있었다. 분명히 막사가 있는데 텐트를 치고 숙소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군인들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그림 4) 우리가 의아해 하자 그곳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일행 중 한 명이 설명을 해 줬다.


<그림 4 : 훈련을 위해 온 미군을 위한 기지내 캠프>

 

우리 식으로 생각을 하자면 저 사람들은 일종의 예비군이라고 보면 됩니다. 예비군 훈련을 받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예비역이나 혹은 군인들 중에서 본토로 귀환했던 사람 중에서 한 미 연합 훈련 등을 위해 다시 왔는데 막사에는 지금 이곳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생활하고 있으니까 저렇게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훈련 중의 일부입니다.”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육군 병장으로 마치고 예비군 훈련까지 착실하게 받은 나로서는 금방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아울러 주한 미군이 주둔하는 목적이 무엇이며 이유는 무엇이고, 주둔 비 부담 비율이 어떻고 등등을 떠나,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 아래 머나먼 남의 나라에 와서 고생하는 그들에 대한 경의로운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나왔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떤 논리를 내 세웠던 간에, 저 훈련에 참여한 병사들 개개인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지구 반대편에서 자유와 평화 수호라는 명분을 위해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가 전쟁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보기 때문에, 미군이 주둔한 곳에서는 우리나라를 최전방으로 취급 한다고 알고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번은 해볼 수 있는 일일 것 같지만 실제 그런 결정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군대 생활을 해 본 사람들, 특히 전방에서 군대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내 말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 상황이라는 말과 함께 비상이 걸리면, 겉으로는 태연하고 용맹한 척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게 또 뭔 일이냐고 마음을 조이곤 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기야 우리 군대 생활할 때는 연일 북에서 대남방송을 쏟아 부으며 긴장도 많이 고조되기도 했던 때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대는 군대고 전방은 전방이라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차가 기지의 북쪽으로 가자 이 근방이 미군이 이전하면서 미국 대사관 부지가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그렇게도 고대하던 악해독단유적이 있다는 곳에 도착했다.


순간 나는 으악!’하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아니 단순히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목이 터지라고 소리쳐 대상도 없는 이에게 욕을 퍼 붓고 싶었다.


제게 무슨 일인가?


악해독단유적이라고 알려진 곳 한 쪽 귀퉁이에는 주춧돌 격으로 쓰였던 돌로 보이는 것과 기둥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돌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도 돌에 남아있는 파인 자국은 콘크리트로 막아버린 채로 남아있었다.(그림 5) 그리고 반대편 귀퉁이에는 그나마 돌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그림 6)


 <그림 5 악해독단 유적1>

그림 6 악해독단 유적2>


그게 전부였다그 바로 옆 불과 2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미군이 막사를 지어 놓았고, 그들이 쉼터로 사용하기 위해 가져다 놓은 야외용 테이블은 그나마 남은 유적의 가운데 놓여 두 유적의 존재감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더더욱 테이블 주위에 놓였던 의자가 유적 코앞에서 나뒹구는 그런 풍경을 보니 눈에는 절로 눈물이 맺혔다.


행여 일행 중 누가 볼 새라 부끄러워 일부러 돌을 드려다 보는 척하며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일행이 저만큼 가고 나서야 허리를 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부랴부랴 뒤 따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여기가 거기란 말인가?

109년 만에 만나면서도 미처 108번뇌도 다스리지 못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만났기에 그 모습에 이리도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인가도대체 얼마를 더 가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면 이 가슴이 이리도 시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얼마나 먼저 어떻게 만났다면 이 가슴이 이리 저리지 않아도 되었단 말인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이리도 쓰라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무슨 죄이기에 이리도 가슴이 아파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눈물이 자꾸 흘러 밑에서 잠깐 멈춰달라고 하고 차 안에서 다시 한 번 유적을 찍어 보았다.(그림 7)  내 눈에 보이지 않던 유적이 사진 속에는 나오지 않을까?’


저 축대에 있는 돌중에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돌이 사진 속에서 나와 줄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잘못 보아서 남겨진 유적을 보지 못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막사 오른쪽 한 귀퉁이에 이미 보았던 유적의 흔적뿐이다. 그것도 막사 가 바로 코앞에 지어지는 바람에 막사를 지을 때 쓰다 남은 돌덩어리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그림 8)


<그림 7 : ‘악해독단’ 유적지 밑에서 찍은 모습>

 <그림 8 : ‘악해독단의 흔적이 오른쪽 귀퉁이에 보인다.>


그러나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나마 저게 희망이다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희망이다.

게다가 안내를 해 주던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의 담당 주무관이 아주 희망적인 말을 해 주었다.


현재 미군기지 안에 있는 건물이 약 1,000여 동인데 그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기초위에 그대로 지은 건물이 상당수 된다는 것이다. 미군이 일제가 쓰던 건물의 기초는 그대로 사용해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제나 미군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용산의 이 땅을 점유하면서 발굴을 안 해서 그렇지 더 많은 유적들이 반드시 묻혀있고 그것을 발굴할 것이라는 예고편으로 들렸다. 그 말을 한 가닥 희망으로 잡아서인지 그제야 텅 빈 것 같던 가슴에 아주 적게나마 무언가 차 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쓸쓸하게 남은 악해독단유적의 사진을 찍으며 자리를 떠나는 순간, 그나마 돌 네 개라도 유적이 남았을 때 반환 받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셔터를 한 번 더 눌렀다. 저 돌들마저 사라진 뒤라면 어찌 했을까를 생각하니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악해독단의 유적이 방치된 것을 보면서 분명히 공원을 개발하다 보면 더 많은 유적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일제가 짓밟고 미군이 들어와서도 관리를 안 했는데도 저렇게 유적이 남아 있다. 그들에게는 유적 같은 것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니, 지하에 매몰되거나 아니면 건물을 짓는데도 상관하지 않았기에 건물 어느 부분에 숨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먹고 찾으면 더 많을 것이다. 그 때는 그 소중한 것들을 잘 보존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반드시 병행해서 남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국토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에서 공원을 설계하고 또 앞으로 시공할 분들이 잘 챙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분들도 역사와 문화를 외면한 개발이라는 것이 가져다 줄 것은 종국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오늘 이런 기회를 나에게 주신 분들이다.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분들이니 훌륭하게 마무리 지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희망이 있기에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악해독단유적을 보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코스를 그렇게 잡았으니까 그런 것이겠지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 이었다.(그림 9) 그 건물들에는 처마 밑에 일제의 상징인 별 마크가 새겨져 있었는데 미 8군 마크로 바꾼 곳도 있지만 미처 바꾸는 것을 잊은 곳도 있었다.(그림 10) 어차피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리라.


 

 <그림 9  일본군이 지은 건물로 미군 사무동으로 쓰인다.>

<그림 10 처마 밑의 별>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띠는 건물이 있었다.(그림11)


<그림 11 : 일본군사령부로 쓰던 주한미군사령부>


지금은 주한미군 사령부로 쓰이는 곳이라 더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없어서 안에야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겉은 빨간색이 아니다. 그러나 건물의 모양이나 윤곽으로 볼 때 빨간 벽돌 건물에 색을 칠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저 건물이 바로 일제 역시 자신들의 사령부로 쓰던 건물이라고 한다. 갑자기 그 건물 앞에서 거총 자세를 취하고 오가는 이들에게 독한 눈빛을 쏘아대는 일제 헌병들과 그 앞을 오가고 있는 일제 고위 장교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라지만 그 앞을 오가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고위 장교들에게 달려가서 실컷 후려패 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소리치고 싶었다.


강탈해간 우리의 시간들을 내 놓아라.

네놈들에게 우리의 아픈 과거를 보상하라고 하기도 싫다. 네놈들이 우리를 무력으로 짓밟던 그 이전 시절로 돌려보내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다만 네놈들이 왜곡하기 위해 말살시킨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찾을 수 있는, 이 나라 백성들보다 네놈들의 역사와 문화가 앞서있는 민족이라고 날조하기 위한 연구 자료로 사용하려고 강탈해 가서 감추어둔 우리의 근거들만이라도 내 놓아라.


잃어버린 시간 속에 묻혀버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내 손으로 찾아야겠다.” 


그러나 그렇게 뒤끓던 울분도 잠시였다일제강점기에 감옥으로 쓰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그곳에서 무언가 기대를 했는데, 아뿔싸!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감옥을 둘러쌌던 담벼락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감옥을 둘러쌌던 담벼락 안에는 미군 막사가 여러 동 지어져 있었다. 외벽을 드나드는 출입구에서도 막사가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나마 남은 담장의 입구도 마음대로 막아버리고 다른 곳을 헐어서 입구로 사용하고 있었다.(그림 12) 감옥 담장 내부 역시 미군들이 붉은 벽돌위에 시멘트벽을 발라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그림 13). [(그림 12)(그림 13)이 같은 담장의 내, 외부를 찍은 것이다.]


  <그림 12 : 감옥건물 외부담장 외벽>

  <그림 13 : 감옥건물 외부담장 내벽>



그곳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에 감옥으로 쓰인 흔적의 건물은 담장을 제외하고는 겨우 두 개 뿐이었다. 하나는 그 당시 간수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굴뚝까지 돌출 되어 있는 빨간 벽돌 건물로 미군 막사와 어우러져 있었다.(그림 14) 나머지는 감옥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그 역시 겨우 하나 남았는데 그나마 미군이 건물을 증축해서 창고로 쓰는 것 같았다.(그림 15) 우리에게는 몹시도 아픈 추억이건만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이쪽과 저쪽 끝에 겨우 하나씩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림 14 간수들이 쓰던 것으로 추정되는 빨간 벽돌건물>

 <그림 15 감옥으로 추정되는 건물>



비록 얼마 남지 않은 흔적이나마 흔적을 보는 순간, 이곳을 일제가 감옥으로 썼던 곳이라면 분명 자국의 병사들을 가두기 위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그들이 악성 사상범이나 정치범으로 몰던, 우리의 독립투사들과 수많은 애국선열들 중에서도, 그들이 비밀리에 문초를 해야 했던 분들이 군 사령부인 이곳에서 못된 고초를 당하셨을 것이다. 그런 흔적이 있어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조금이나마 바랐는데 이건 아예 흔적도 없어진 것 같았다. 훗날 공원을 조성하면서 무언가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아쉬워 그냥 발길을 떼기 싫은 찰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옛 감옥으로 보이는 (그림 15)의 건물 바로 옆에 얼핏 보아도 예사 물건은 아니고 무슨 형틀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그림 16)


 

<그림 16 :  감옥건물 바로 옆에 있던 형틀(?)>


저게 혹시 우리 선열들을 고문하던 기구라면?’ 하는 끔찍한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언젠가 그림에서인지 아니면 사진에서인지 저런 틀을 가지고 고문을 하던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난 현상인지 아니면 정말 보았던 것인지를 밝힐 수 있는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것이 없어지지만 않는다면 훗날 공원 조성을 하면서 반드시 밝혀지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런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 조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결과라면 우리나라 사람 누군가가 보호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저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렇다하게 찾은 것도 없이 빈손으로 담장을 되돌아 나오는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선열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분들이 울부짖는 것 같은데 그를 뒷받침할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여간 마음상하지 않았다.


분명 내 귀에는 그분들의 울부짖음이 환청처럼 들리는데 그 어느 곳에도 흔적이 없다.


하기야 지금 이 곳은 아직 독립을 못한 땅이다. 시멘트 블록과 철조망으로 감싸여 내나라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니 무슨 독립을 논하랴?


어차피 내 나라 전체가 미완의 독립이었다.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 의해 남들의 손에 의해 주어진 독립이다 보니 제대로 주권도 찾지 못했다. 우리나라를 독립시킨 선언의 주체가 된 소련과 중국은 자기들이 불법으로 깔고 앉아있는 우리 영토를 돌려 줄 생각도 안했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찾아주는 대신 중국은 만주라고 부르면서 요동 땅을, 소련은 연해주를 불법으로 깔고 앉아 우리 고구려의 숨결이 숨 쉬는 구려벌을 강탈해 갔다. 그뿐인가? 자기들이 우리에게 독립을 안겨주는 대신 영토를 강탈하면서 잃어버린 대마도는 찾아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과 미국이 동시에 연합국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반도 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 영토의 일부분에 해당하던 한반도마저 남북으로 갈려 일 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다스리던 영토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겨우 남은 것이라고는 휴전선 이남의 손바닥만 한 땅이 전부이거늘, 그 와중에 이렇게 내 땅임을 말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순국선열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내 귀에 들리는 그 울부짖음이 환청이 아니라 나를 질책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면서 아픈 마음을 추스를 길이 없었다.

 

이렇게 돌아보고 나면 울적해 질 것이기에, 그 울적한 마음을 달래 주려고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닐 진대, 마치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기지 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둔치산에 올랐다. 이곳에서는 용산구청 신청사가 바로 코앞이다.(그림 17)


<그림 17 : 기지에서 본 용산구청 신청사>

 

멀리 이미 반환된 유엔사 부지도 보인다. 저 땅을 팔아서 이전비용 15조원을 댄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쓴 웃음이 나왔지만 그렇게라도 108번뇌를 다 하도록 디디지 못했던 우리 땅을 다시 디딜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해 봤다.

 

돌아오는 길목에 미군들이 타 기지나 본국에서 왔다가 묵는 곳이라는 Dragon Hill Hotel(그림 18)의 이름이 용산(龍山)을 영어로 글자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했다는 웃어야 하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하는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설명을 들으면서 출구로 나섰다.


 <그림 18 : Dragon Hill Hotel>



2014227.

두어 시간으로 짧지만, 아마도 내 생에 절대 잊지 못할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 선 곳은 바로 처음 들어가기 위해 수속을 하던 곳이다. 마치 외국에 갔을 때 입국 수속을 하고 출국 수속을 하는 기분이다. 주민등록증을 다시 받아 들고 선 곳은 두어 시간 전에 내가 섰던 그곳이다.  분명 여기가 거기임에 틀림이 없건만!


왜 이리도 오래고 긴 시간 후에 선 아주 낯선 곳으로 여겨진다는 말인가왜 이리도 아주 먼 곳을 다녀와서 오랜 만에 서 보는 곳처럼 여겨진다는 말인가

 

여기가 정말 거기라는 말인가?

멍한 기분을 가눌 수 없어 담배 한 대를 더 물고 나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안내를 해 주신 분을 비롯한 모든 일행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남기고 옥수역으로 향했다그분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공원을 만들겠다는 그 말대로 꼭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오늘 설명을 하면서 앞으로 어떤 테마의 공원을 만들 것이라고 하던 그 말에서 나는 희망을 읽었었다. 그 희망이 나 하나의 희망이 아니라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죽어가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민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희망 있는 미래를 살 수 있기에, 비록 108번뇌를 넘기고도 아직은 남이 점유하고 있는 곳이지만, 공원으로 다시 태어날 때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면서 다가오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찬란했던 우리의 숨결을 전해주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용산의 밤은 내 곁에서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60갑자를 두 바퀴 돌아온 120년 전, 갑오년의 그 함성이 내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열차가 내 앞에 멈춰 서며 문이 열렸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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