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5.22 포항제철 3부
  2. 2013.05.22 포항제철 2편
  3. 2013.05.22 포항제철 1편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 사장과 횟집 밖에 없었고 해병대 1사단의 존재에 경기가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되던 도시 포항. 그런데 수백 년 전에 이 포항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리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이성지. 풍수의 대가였던 그는 포항 일대의 황량한 모래밭을 일컬어 부르던 어룡사(魚龍沙)를 방문한 길에 “후일 이곳에 수만 명이 모여 살 것이다.” 아니 이런 사막 같은 모래밭에 어떻게 수만 명이 들어와 산단 말이냐, 그 말만큼은 믿지 못하겠다, 친구들이 코웃음을 치는 가운데 이성지는 이런 시를 읊는다. 


“어룡사에 대나무가 나면 가히 수만 명이 살 곳이니라. 서쪽 문명이 동방에 오면, 돌이켜 보니 모래밭이 없어졌더라.” (竹生魚龍沙 可活萬人地 西器東天來 回望無沙場)  (http://blog.posco.com/20 에서 인용)


따지고 보면 대나무 같이 곧은 제철소 굴뚝들이 들어서고 그것들은 서방의 철강 기술을 근거로 지어진 것이며 악명 높은 모래밭은 사람들의 터전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이성지의 예언은 맞아 떨어진 셈이다. 하지만 포항이 제철소를 유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진국들의 입지 조사 결과에서도 포항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 포항제철 전경(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하지만 정부는 2년간의 고심 끝에 최종적으로 포항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한다. 지리적으로 부산과 대구 등 대도시가 부근에 있어 노동력 확보가 쉽고, 건설 중이던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며 주변 낙동강과 태화강이 지척에 있어 공업용수 확보에 어려움이 없으며, 조수 간만의 차가 적고 수심이 깊은 항만을 지녔다는 것이다. 


하나 더 중요한 요인을 들자면 안보적 우려였다. 인민군에게 밀려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던 6.25 전쟁의 쓰라림의 기억이 포항을 결정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포항도 인민군에게 함락되긴 했지만 그 시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것이다. 혹자는 포항제철을 비롯, 남동임해공업단지 자체가 이 안보적 요소 때문에 건설됐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휴전 20년을 치닫고 있었지만 그만큼 전쟁의 상흔은 나라의 곳곳에서 시커멓게 발견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포항 제철 건설은 결정됐지만 이번에는 나라 밖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회사간의 이견과 비관적인 전망 등으로 인해 해외 각국 8개 회사가 조직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가 일단 와해됐다.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보고서도 한국에 제철소는 가망이 없다고 판정했다. “한국의 제철소 건설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추어 경제성이 의심된다. 노동•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을 우선하라”는 것이었다. 판 벌여놓으니 물주가 발을 빼는 형국.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이 미국으로 날아가 IBRD를 설득했으나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당신의 애국심은 알겠지만 사업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 낭패를 보고 실의에 빠진 박태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 그러나 대일청구권 자금은 농•어업에만 투자할 수 있는 것으로 양국 국회의 비준이 끝난 상황이었다. 박태준은 일본으로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조정하고 일본 제철사의 지원까지 받아낸다. 이때 도움을 준 일본의 야하타 제철(후일의 신일본제철)에는 또 하나의 거짓말 같은 역사적 사연이 얽혀 있는데 그 제철소는 90여 년 전 청일전쟁 때 청나라의 배상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회사였다. 일본이 왕년의 천자(天子)의 나라를 무찌르고 아시아의 변방 국가에서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른 계기이자 상징이었던 야하타 제철소가 이번에는 왕년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사활을 건 제철소 건설을 돕게 된 것이다. 



 

▲ 포항제철 건설현장 (출처: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이렇게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의 씨나마 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박태준이 제창한 것은 ‘우향우 정신’이었다. 이 제철소를 만드는 돈은 선열들의 피땀 값이니 이걸 모래사장에 헛되이 쓸어 넣는다면 우리 역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로 뛰어들어 죽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만우절의 거짓말 같은 일이 현실화된다. 한가한 어촌 마을과 진배없는 허허벌판 위에서 포항제철 기공식이 대통령과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장 건설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장 이하 전사원들이 일치 단결해서 우리 민족의 하나의 역사적 사업이 될 수 있는 이 포항 종합 제철 공장을 여러분들 손으로 완공한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이 공장을 훌륭한 공장으로 건설해 주기를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연설 도중에도 세찬 바닷바람에 실린 모래들이 행사장을 뒤덮을 듯 날아다녔고 참석자 중에는 이 공장이 과연 지어질 수 있을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포항의 모래 바람은 수백 년 전부터 유명했다. 하루 종일 작업한 것이 자고 일어나면 모래투성이에 엉망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고 박정희 대통령 자신 브리핑을 받다가 눈이고 코고 가리지 않고 들어가는 모래 때문에 재채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고 하니 그 어려움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회장에게 그답지 않은 불안한 어투로 물었다고 한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 되기는 되는 기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천하의 박태준도 그날 위경련을 일으킬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고 한다. 그렇게 상황은 열악했고 조건은 험난했다. 




▲ 1973년 포항제철 (출처: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그러던 중 마침내 1973년 6월 새벽이 왔다. ‘어룡사’(魚龍沙), 즉 바다의 용들이 펼쳐놓은 모래밭에 대나무 같은 제철소 굴뚝이 서고 사람들이 모여 뼈를 깎고 피와 땀이 범벅이 된 노력 속에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날이었다. “박태준 회장 등 임직원들은 45m 높이의 작업대에 올라섰다. 용광로 군데군데 뚫린 손가락 굵기의 송풍구 사이로 벌건 쇳물이 끓고 있었다. 용광로 출선구(쇳물이 나오는 구멍)를 임시로 막아둔 진흙만 쇠파이프로 뚫으면 쇳물이 쏟아져 나와야 했다. 하지만 "뚝"하는 소리와 함께 쇠파이프가 두 동강이 났다. 박태준의 표정은 굳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 벽 두께 2m가 되는 구멍을 산소불로 직접 뚫는 사투가 시작됐다. 2시간 30분이 지났을까. "펑"소리와 함께 오렌지색 섬광이 치솟았다. 용암 같은 황금빛 쇳물이 흘러나왔다. "나왔다. 만세!" 박태준은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조선일보 2011년 12월 15일자)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단 한 장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사진사 또한 쏟아져 나오는 쇳물에 감격한 나머지 쇳물만 내처 찍어대다가 미처 만세 부르는 사람들의 정경은 그 한 장을 찍는데 그쳤던 것이다. 미칠 것 같은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의 가운데에 박태준은 좀 어정쩡한, 또는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다. 후일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기쁨보다는 이제 시작이다, 고생이 더 남았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랬다 실상 시작일 뿐이었다. 불모의 모래밭은 국제적으로도 알아주는 철강 지대로 변모했고 스승 일본을 능가하는 제철소로 화하여 그 굴뚝으로 ‘대나무숲’을 이뤘으며 그 굴뚝 아래에서 수만 명이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철판 하나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고 몇 번의 실패에 이를 악물던 수십 년 세월은 오늘날의 세계적 대기업 포스코와 그 모태인 ‘포항의 기적’으로 보상받았다. 


 


▲ 포항제철 작업 모습 (출처: 국가기록원 http://www.archives.go.kr)



상전벽해(桑田碧海), 즉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다’라는 고사성어가 가장 단시일에, 가장 극명하게 현실화된 사례를 들자면 196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언젠가 6.25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군 참전용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포스코 공장을 둘러보고 온 길이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들 모두는 기적을 이룬 사람들이다. 당신들 한국인들 모두. 나는 이제 한국에 왔던 것이 자랑스럽다. 죽어간 동료들도 그럴 것이다.” 그는 "All of you"를 유독 강조했다. 포항의 기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항제철 시리즈

> 포항제철 1편

> 포항제철 2편



Posted by 국토교통부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남과 북은 살벌한 군사적 대치를 이어가면서 저마다 폐허가 된 국토를 복구하고 국민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발전을 모색해야 했다. 북한은 어느 미국 공군 조종사들이 증언한 바 “석기 시대로 돌아간” 수준이었고 남한도 그보다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일단 먼저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북한이었다. 그리고 재기의 선봉이자 상징은 역시 철강 산업이었다. 일본인들이 지었던 제철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고 황해제철소, 4.13 제철소 등이 연달아 지어졌으며 철광부터 시멘트까지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북한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믿기 어려운 통계이긴 하지만 북한의 공업 생산액 성장률은 1958년 42%, 1959년 53%에 이르고 있었다. (프레시안 2013.4.19 “북한이 쥔 양날의 칼 전쟁” 기사 중) 



 

▲ 삼화제철소 전경(출처: 공감코리아, 포스코홍보실 http://bit.ly/14G9MvU)



남한도 ‘산업의 쌀’이라 불리며 산업화 사회의 기본 사양이 되는 철강 산업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주목할 것은 강원도 삼척 지역에 있던 삼화제철소다. 삼화제철은 원료의 부족과 기술 부족으로 개점휴업 상태이다가 전쟁 말기에 근근이 다시 가동된다. 그러나 그 길은 험난했다. “1952년과 53년에 부흥 사업비 3억 4,357만 환을 투입하여 8기의 고로 (철광석등의 원료를 사용하여 선철(銑鐵)을 만드는 제선(製銑)과정의 핵심 설비) 중에서 3기를 보수하고, 54년부터 가동하였지만 석 달도 되지 않아 연료난과 자금난으로 57년까지 휴업하게 된다.”

( http://blog.daum.net/ekdmawoalqmffhrm/36543 에서 인용) 


인천 지역에도 제철소가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삼화제철소가 있는 동해안 지역을 주목하고 그 일대에 종합제철공업단지를 지을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1958년 8월 26일 상공부가 양양 지역을 주요 입지로 한, 연간 선철 생산 2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밝힌 것이다. "이 계획은 ICA(국제협력기금) 자금 3000만 달러, 내자 150억 환으로 1965년까지 선철 20만 톤 생산 규모의 시설을 건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은 10월 4일 상공부 산하 철강자문위원회가 정부에 건의함으로써 재확인되었는데, 외자 3475만 달러, 내자 248억 3500만 환으로 1965년까지 대한중공업공사가 맡아 건설하되 제철 방식은 고로용광법과 직접환원제철법(RN법)을 병용하고 제강 방식은 LD(Linz-Donawitz) 방식으로 한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포스코 35년사 중) 



 

▲ 양양 광산(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런데 왜 이승만 정권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주목했을까? 이는 사실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였다. 없는 형편에 외국에서 철광석 원료를 사올 수 없으니 국내산 철광석을 이용해야 했고 양양철광은 1933년 일본의 석정광업소에 의해 개발된 이후 1980년대까지 국내 철광 생산량의 60%를 생산해 내던 곳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외자유치 실패와 정부 부처간의 미숙한 일 처리 등 다양하지만 뻔한 이유로 이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61년 민주당 정부 역시 동해안 일대에 제철소를 들여놓을 계획을 세우지만 그 정권이 단명(短命)에 그침으로써 동해안 제철소의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1공화국과 2공화국 정권의 야심 찬 그러나 소박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더라면 양양 삼척 묵호 일대에 제철공업단지가 어떻게든 들어섰을 것이고 아마 ‘강원도의 힘’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휘되었을지도 모른다. 설악산 정상에서 우람한 종합제철소의 굴뚝을 보며 감회에 젖거나 동해안으로 피서 왔다가 제철소 견학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 역시 국토 어딘가에 종합제철소를 지으리라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기회만 나면” 그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1962년 민정 이양 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제철소 입지를 고르는 한편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몇 차례 실패를 맛본 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미국 대통령 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유수의 철강지대인 피츠버그 공업지대를 찾아가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 회장을 만나 사업실현에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1966년 12월 코퍼스를 중심으로 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 ((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이 그 닻을 올리게 된다. 참가국은 미국 프랑스 서독 영국 이탈리아. 


어찌 어찌 물주들을 구했으니 이제는 어디에 그 보따리를 풀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양양의 국내 철광석은 그 품질 문제로 매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철광석을 수입해 올 것이라면 우선 필요한 것이 항구였다. 그럼 어디로 할 것인가. 항구라는 이름이 앞에 붙는 도시 태반이 그 고려 대상이 된다. 동해안의 삼척, 묵호, 속초, 월포, 포항, 울산과 남해안의 부산, 진해, 마산, 삼천포, 여수, 보성, 목포 그리고 서해안에 있는 군산, 장항. 비인, 아산, 인천 등 총 18개 지역이 후보군에 오른 것이다. 


일단 정부는 선진국들에게 자문을 요청한다. 일본측 조사단은 울산 염포리와 마산, 삼천포를 추천했고 미국 기술진 역시 삼천포와 울산을 꼽는다. 이들의 평가와는 별도로 각 항구도시들은 제철소 유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각 도시에서 시민들이 주최하는 유치 대회가 개최되어 “제가 반드시 제철소를 우리 고장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각 지방 사투리들이 들끓었다. 청와대까지도 정치인들을 앞세운 로비로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후보 도시 가운데에는 인구 2만이 좀 넘는, 도시라고 하기엔 좀 무안한 포항도 있었다.



 

▲ 1967년경의 포항시가지 (출처: 포스코 블로그 http://blog.posco.com/40)



주민들 태반이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도시의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뜻밖에도 해병 1사단이었다. 이를 잘 드러내 주는 일화가 있다. 해병대원들이 휴가를 나와 포항 시내에서 워낙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니자 이에 분개한 시장과 유지들이 해병 1사단장을 찾아간다. “부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대책을 세워 주시오.” 이에 해병 1사단은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휴가 장병들을 트럭에 몰아넣고 터미널에서 하차시켜 포항 시내에서 사고를 치지 않고 고향으로 직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포항 시내 음식점과 술집들이 당장 파리를 날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아뿔싸 싶었던 포항 시장은 다시 1사단장을 찾아간다. “저기... 없었던 일로 해 주시겠습니까.” (매일신문, 박병선 동부지역 본부장의 글 중 일부 인용) 포항은 그런 곳이었다.   



포항제철 시리즈

항제철 1편

> 포항제철 3

 


Posted by 국토교통부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를 기억하시는지. 싸움을 해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물고 할퀴고 정도를 되풀이하던 유인원 무리 가운데 하나가 짐승의 정강이 뼈를 주워 든다. 그리고 그 정강이뼈로 누군가를 후려치자 그는 맥없이 고꾸라져 버리고 정강이 뼈를 치켜든 유인원의 집단은 승리를 맛본다. 그 도구를 하늘로 던졌을 때 영화는 수억 달러의 돈이 들어간 최첨단 우주비행선으로 오버랩 된다. 인간이 도구를 쓰기 시작한 이래의 수백만 년의 시간을 영화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결국 정강이 뼈는, 정강이 뼈를 든 손은 ‘영장류’에서 ‘인류’로 나아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음을 표현했다고나 할까. 



 

 

▲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틸 컷(출처: 네이버 영화 http://bit.ly/11PEGhj)



그렇듯 인간은 도구를 쓰면서 비약적인 발전의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구석기 시대는 그로부터 수백만 년을 헤아린다. 즉 아프리카의 원숭이에서 조금 벗어난 별종의 생물이 돌 깨서 만든 타제석기 (요즘은 뗀석기라고 부른다)를 쓴 이래 그 후예들은 수백만 년 동안 또는 수십만 년 동안 고만고만한 석기를 사용해 왔던 것이다. 그를 좀 더 예리하게 갈아 만든 석기를 사용한 이른바 신석기 시대는 1만년 전에나 겨우 시작됐고 청동기와 철기는 더욱 그보다 더욱 짧다. 그 가운데 철기의 발명은 인류 역사의 또 하나의 획을 긋는다.

 

원소명 Fe, 기호 26번인 철은 가장 안정적인 원자핵을 갖고 있고, 지구의 지각에서는 산소와 규소, 알루미늄 다음으로 많은 원소이며 지구 무게의 약 35%를 차지한다고 한다. 철은 청동기보다 녹는점이 높았다. 즉 철의 발견은 더욱 더 발전된 야금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철기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알려진 중동 지역의 힛타이트 왕국에서는 제련된 철이 은(銀)의 40배 가격으로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철기 제련 방법은 엄격하게 비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 상리 출토 철기 및 청동기(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러나 인간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으랴. 철기는 급속도로 유포되어 청동기를 압도했다. 일단 구리보다 단단했고 재료를 구하기도 쉬웠다. 인류 문명의 본격적인 발전은 철기 시대의 도래와 때를 같이 한다. 철기로 된 도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했으며 더 우세한 기술로 만들어진 철기 무기와 갑옷들은 그를 갖추지 못한 세력을 격멸하고 정복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또 철기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족속들은 절치부심 더 강력한 철기에 골몰했고 그러면서 철기는 점점 더 발전했다. 언젠가 방영됐던 드라마 <주몽>에서 등장한 ‘철검’의 의미를 기억해 보면 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철의 생산지는 곧 각축의 현장이었고 동시에 번영의 초석이었다. 고구려가 오늘날 중국의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요동이 철의 주요한 산지였기 때문이다. 끝내 요동의 주인이 된 고구려는 기병과 말을 전부 쇠로 감싼 개마무사(鎧馬武士)들의 중기병 집단을 운용하는 동북아시아 최강의 무력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찍이 철이 많이 나서 당시 중국인, 왜인들까지 몰려들어 철을 샀고 철기가 화폐처럼 쓰이기도 했다는 변한 지역 (낙동강 이서)은 이후 가야와 신라의 무력 기반이 되기도 했다. 병사들의 온몸과 말까지 감싼 철기는 상대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만 명의 병사들을 철기로 무장시켰던 철 생산력은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에서 오히려 둔화된다. 특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던 조선 시대에서 광업은 견제와 통제의 대상이었다. 


“1430년(세종 12년) 무렵 전국에는 66개의 철광과 17개의 제련소가 있었지만 철광석 채광활동은 농한기에도 규제됐다. 구리채광은 1423년(세종 5년) 동전을 주조하기로 결정하면서 촉진됐지만 그래셤의 법칙이 적용된 동전이 화폐가치 하락 등으로 유통되지 않으면서 화폐주조도 1445년(세종27년) 막을 내렸다. 구리 채광은 무기재료를 얻기 위한 명목으로 그저 명맥만 지속했다.”

(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http://blog.hankyung.com/raj99/19126467 중) 야금 장인들의 수와 활동 또한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으니 제철 기술이 발전할 여지는 매우 적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전기에 비해서는 광공업이 활성화되기는 하지만 조선의 제철 기술은 여전히 형편이 좋지 않았다. 그것이 비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신미양요 때 광성진 전투였다. 조선군의 대포가 미군의 함포에 댈 것이 못되었고 광성진을 흠씬 포격한 미군은 이윽고 상륙하여 성벽을 기어오른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조선군들은 용감히 맞서 싸운다.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황현의 <매천야록> 중) 이는 미국측의 기록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다.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백 여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엘버트 가스텔) 


그런데 그들은 왜 무기를 잃었으며 왜 칼은 부러졌을까. 그것은 철의 차이였다. 근대적 제철 기술의 산물인 강철 총검에 부딪친 조선군의 칼과 창은 맥없이 휘거나 부러져 버렸던 것이다. 흙을 뿌리며 덤비는 조선군은 물론 용감했지만 이는 황망하게 무기를 잃은 이들의 절망적인 몸부림이었다. 흡사 흑요석 창을 휘두르던 잉카 제국의 용사들이 철제 무기 앞에 쓰러져 가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 겸이포 제철소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가내 수공업이나 동네 대장간이 아니라 근대적 제철소에서 철을 생산하는 것을 구경이나마 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1918년 황해도 송림시에는 일본의 미쓰비시 제철이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고 함경북도 청진에도 제철소가 서지만 철강 산업 자체가 일제 군수공업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제철소에선 주로 상품이 아닌 선철을 생산했고 그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실려갔다. 숙련된 기술자들은 죄다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그저 공장의 노예일 뿐이었다. 1920년 겸이포 제철소에 폭탄이 던져질 만큼 착취와 학대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보낸 후 해방이 왔지만 전쟁이 덮쳤고 그나마 있던 모든 시설은 잿더미가 됐다. 그것이 신생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포항제철 시리즈 

> 포항제철 2편

> 포항제철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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