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한강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7.31 한강다리 7편(마지막편)
  2. 2013.07.25 한강다리 6편 (1)
  3. 2013.07.19 한강다리 5편 (1)
  4. 2013.07.15 한강다리 4편


강남(江南) 개발은 미국 서부 개척과 비슷한 면이 있다. 

허허벌판 인적 없는 곳에 철도가 놓이고 금맥이 발견되면서 “Go West!"를 부르짖으며 서부로 달려갔던 미국인들처럼, 서울 시민들은 전쟁이 터질 경우 3-40만 명을 수용할 방공호를 겸하여 지어졌던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쭉 뻗은 한남대교를 건너 황량하게 펼쳐진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강남으로!’를 부르짖으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땅 장사를 하고 그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정치 자금을 조성하는 가운데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 하는 토지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골드 러시’였지만 한국은 ‘랜드 러쉬’였다. 


당시 정부의 기조는 ‘강북 인구 분산’이기도 했다.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의 도심 기능을 어떻게든 분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도 강남 개발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72년 초 양택식 서울 시장은 이런 기자회견을 한다.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강남에 터를 닦은 것이 유흥업소들이었다. 대규모 유흥업소들이 연속부절로 강남에 자리잡았고 강북 도심에서 간단히 1차를 끝낸 주당들은 “2차!”를 부르짖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제3한강교를 향해 ‘쏘았다.’ 


이윽고 75년 구자춘 서울 시장은 ‘한강 이북 지역 택지 개발 제한 조치’를 발표한다. 강북의 임야나 토지가 택지로 개발되는 일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묶인 돈과 욕망 역시 제3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게 된다. 



 

▲ 영동지구 주택건립공사(1973년 청담) 출처: http://bit.ly/17gNY5R



1971년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를 필두로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 강변에 아파트의 성채가 쌓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즈음까지만 해도 아파트 이름은 마포 아파트나 와우 아파트 같은 식으로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현대건설이 그 브랜드 이름을 아파트에 붙여 ‘명예를 걸고’ 만들었음을 과시하면서 이후로는 건설사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아파트 이름으로 하는 시대가 열린다.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는 1978년 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유명해지면서 제3한강교 건설 후 변화한 강남의 위상을 웅변으로 보여 주게 된다. 바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사원용으로 지은 900여가구 가운데 600여가구를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 등에게 특혜 분양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70년대 이후 부유층의 주거지로 이름 높은 그 이름은 그렇게 형성됐다. 




 

 

▲ 경기고 종로구 화동 교사 마지막 졸업식(76') / 정신여고 이전 공사 기공(78') (출처: http://bit.ly/17gNY5R)



사람이 살려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이들도 길러야 하고 교육도 시켜야 했다. 힘깨나 쓰고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이 대거 강남으로 몰려가면서 강북에 있던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들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강남으로 옮긴다. 

수십 년 명문이었던 경기고가 76년 강남으로 옮겼고 휘문고등학교도 그 뒤를 따랐으며 서울고등학교도 한강을 건넜다. 여고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명여고, 숙명여고 등이 강남행을 단행함으로써 강남은 완전한 신천지로 변했다. 


그 신천지에 지칠 줄 모르고 사람을 풀어놓은 파이프라인이 바로 제3한강교였다. 



 

▲ 출처: 다음 뮤직 http://music.daum.net/album/main?album_id=7211&song_id=255872



작달막한 제주도 출신 여가수 혜은이가 디스코 열풍을 불러 온 노래 <제3한강교>를 발표할 무렵(1979)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외국같이 변한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 제목으로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다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뒤의 가사는 원래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였다. 그런데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 난감한 가사로 변신하고서야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막 태어난 또 하나의 서울. 흥청망청의 여흥과 일확천금의 욕망, 그리고 좌절과 박탈의 슬픔이 공존하던 시기의 강남, 그리고 제3한강교를 오가던 젊음들에게는 오히려 원래의 가사가 더 어울릴 수도 있었으련만 강남에 땅 한 자락 사 놓고 톡톡히 재미를 봤던 당시의 ‘지도층’들은 노래 가사에는 그렇게 엄숙했다. 


그래도 제3한강교 아래로 한강과 세월은 유구하게 흘렀고 1982년에는 ‘한남대교’로 그 이름이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 출처: http://encykorea.aks.ac.kr/

 


팍팍한 시골 생활 접고 불안하기만 한 희망을 찾아 서울로 이사 오던 가족들은 한남대교 건너 아득히 바라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았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와 그 너머에 우뚝 솟은 남산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으로 곧장 연결되는 다리이자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한남대교에서 자살하려 했다는)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빛과 그림자의 다리이며, 말년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 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달릴 때 지나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역사의 다리이기도 하다. 


한남대교는 그렇게 서울을 바꾼 다리였고 또 하나의 서울과 옛 서울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출판사 이소북

 

 

1966년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남해안 통영에서 찢어지는 가난으로부터 도망 나와 서울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길녀’, 그리고 그녀의 친구미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유례없는 인구 집중 거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헤집어 놨던 소설이었다. 이때 작가가만원이라고 불렀던 서울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380만 명이었다. 천만 인구를 상회한다는 요즘에 비추면 애걔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서울의 도시 인프라는 그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여러 곳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3한강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드넓은 한강에 다리는 단 세 개였다. 1한강, 2한강교, 그리고 광진교. 인구는 늘고 차량도 증가했고 강남과 강북 사이의 물동량도 커졌는데 다리 세 개로 그것들을 소화하기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걱정거리는 더 있었다. 6.25때 서울 인구는 1백만이었는데 <서울은 만원이다>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즈음의 인구는 거의 네 배로 불어나 있었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이 인구를 어떻게 피난시켜야 하는가는 그저 노파심이 아닌 식은땀이 날 정도로 막막하고 두려운 질문이었다. 그나마 제2한강교는 전쟁이 터지면 군용으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1966 1 19일 또 하나의 한강다리를 놓는 공사가 시작됐다. 3한강교였다.


 

 

1966년 한강대교 공사 모습(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런데 서울 시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 1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 7천여 명. 원래 조선 시대 내내 이 일대는 경기도 광주부에 속했고 서울시에 편입된 뒤에도 배밭과 채소밭이 가득하여 서울 시민들의 채소, 과일 공급지였던 곳이었다. “강북 사람들 똥을 가져다가 농사를 짓던시골이었다.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어서 그저영등포의 동쪽 동네라는 뜻으로영동이라고 불리던 곳에 제3한강교가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북한이 자주 보이는 이른바못사는 집의 자존심때문에 혀를 찰 때가 많지만 제3한강교 공사가 시작될 무렵에는 남한이 북한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3한강교 공사가 시작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건설부에서 갑자기 황망한 지시가 내려왔다. “당초 설계된 왕복 4차로( 20m)를 왕복 6차로( 26m)로 확장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차량 수가 27천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6차로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평양에 놓고 있는 다리의 폭이 25m이므로 우리는 그보다 1m는 더 넓어야 된다.” 훗날 남한의 63빌딩에 자극 받아 100층이 넘는 류경호텔을 지으려다가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북한의 유치함은 제3한강교 건설 당시에는 남한 쪽이 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3한강교 공사 기간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번 있었다. 우선 1968 1 21일 북한의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간 사건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전쟁의 공포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고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죄로 이승복 소년은 공비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제3한강교의 운명 뿐 아니라 서울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일이 1968 2 1일 일어났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것이다. 그 고속도로는 제 3한강교와 연결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로써 제3한강교는서울 시민 유사시 피난용 다리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으로 그 위상이 급상승하게 된다. 3한강교는 1969년 완공됐고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의 역사에는 굵직한 두 글자가 부상하게 된다. ‘강남’ (江南)

 

 

 


▲ 공무원 아파트 건설(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강남 지역의 땅값의 추이를 보면 우리는 제3한강교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단하게 알게 된다. “1963 63 3.3㎡당 300~400원 하던 압구정동과 신사동 일대의 땅값은 66년 제3한강교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꿈틀대기 시작해 67년에 1000원을 넘어섰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70년에는 단번에 1~15000원으로 폭등했다. 특히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땅값 폭등을 부추겼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작되는 말죽거리에 복덕방촌이 형성됐는데 이 때문에 강남땅값 폭등 현상을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2011.1.10 경향신문) 여기에 당국 또한 강남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공기관 이전, 학교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이전, 유흥업소 강남 이전시 취득세 감면,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한 압구정반포청담도곡동 일대 아파트 지구 신설” (위 신문 기사 중) 등 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강북은 묶고 강남은 푸는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 개발중인 한남 (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러나 여기에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깃들어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을 보면 1971 4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가 1970년 강남의 토지를 사고 팔아 수십억 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바친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윤진우는 당시 실세였던 경호실장 박종규에게 불려가가장 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의 땅을 사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육군 헬기를 타고 과천에서 송파까지 둘러본 그는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의 강남구 일대를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으로 지목했다. 이윽고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자금은 이 일대의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강남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그 땅값이 오르면 다시 되파는, 전형적인 복부인의 수법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돈벌이를 돈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외면할 리가 없었다. 곧 돈과 사람의 거대한 물결이 제3한강교를 건너 강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drpenguin

    위의 사진은 '제3한강교'가 아닌 '한강대교' 노량진 방향!

    2015.06.25 12:30 [ ADDR : EDIT/ DEL : REPLY ]




▲ 제2한강교 개통식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62년 제2한강교 기공식 사진을 보면 한쪽에 이런 표어가 적혀 있다. “한 손 두 손 가는 곳에 늘어나는 우리 살림” 당시 한국은 막 독립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내 최초로 국내 자본과 기술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돈은 정상적인 경로로 마련한 것이라기보다는 5.16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그 이전의 ‘부정축재자’들로부터 몰수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헌납된 재산이 그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제3공화국 당시의 쑥덕거림처럼 부정 축재자들의 환수 재산으로 다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또 다른 부정들이 다리를 파먹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리가 완공된 5년 뒤 상판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로도 제2한강교는 여러 번 구멍이 나거나 교각 이음쇠에 문제가 발생해 통제되는 일이 많았다. 1978년 10월 31일 경향신문은 분노에 차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통한지 1년이 못돼 결딴나는 포장도로나 10년이 못 가서 구멍이 뚫리는 다리는 무슨 까닭인가. 만일 공법상 규정된 철근 시멘트 모래 자갈의 배합비율과 필요한 공기 등을 엄격히 지켰던들 과연 그처럼 맥없이 망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길은 닦이고 다리는 놓였다. 제2한강교의 건설로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동네는 오늘날의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일대였다. 서교동과 동교동은 일제 때부터 이 일대는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진창밭으로 변해 버렸던 허허벌판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대의 신촌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시내버스의 종점도 신촌 시장 일대에 있었고 그 이상은 그저 채소밭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교동과 동교동 사이에는 제2한강교로 향하는 대로가 뚫렸고 다리의 북안(北岸) 합정동에는 강변도로가 놓이게 된다. 합정동의 동명(洞名)은 과거 천주교 박해 시절 천주교인들의 목을 치던 망나니들이 그 칼을 씻거나 물고문에 이용했다는 우물 합정(蛤井)에서 연유된 것인데 이 으스스한 우물도 강변도로 개발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또  제2한강교는 망원동 이동, 즉 성산동, 상암동 수색 등지의 개발도 촉진시켰다. 1968년 10월 22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보도된 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시내버스가 들어갈만한 대로가 없어 서울시에 속하면서도 농촌을 연상할 만큼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경치 좋은 시골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지게 된다. 1968년의 서울 시장은 '김현옥.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리던 그는 이 일대를 이렇게 바꿀 계획을 세웠다. “제2한강교의 유엔 탑 부근으로부터 한강 둑을 따라 노폭 30미터의 새로운 도로를 뚫고 난지도 앞을 스쳐 중동, 북가좌동의 기존도로와 연결된 다음 응암동과 북가좌동의 중간지점에서 신사동의 기존도로와 교차하게 하고 다시 대광동을 지나 불광동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동교동을 기점으로 한강과 신촌, 수색간 철도의 중간지점을 타고 수색 쪽으로 노폭 25미터의 도로가 신설한다.” (위 신문 기사) 


 


▲ 1970년대 제2한강교(출처: e-영상역사관 film.ktv.go.kr)



이렇게 주변이 단장되고 개발된 이후 제2한강교는 ‘카 퍼레이드’의 다리로 각광받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시청으로 들어오는 최단 거리에 놓여진 제2한강교는 ‘국위선양’을 한 스포츠 스타나 기능 올림픽 선수단, 또는 환심을 사야 할 외국 국가 원수가 들어올 때마다 벌여 주었던 카 퍼레이드가 단골로 펼쳐진 다리였다. 




 ▲ 이애리사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74년 국제 콩쿨 대회에서 입상한 정명훈도 공항에서 제2한강교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카 퍼레이드를 펼쳤고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탁구의 샛별 이애리사를 위시한 선수단도 제2한강교를 자랑스럽게 지났다. 최초로 북한을 이겼던 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선수단을 위해서는 100여대의 군용 지프가 김포공항에 총출동했고 이들은 경찰 사이드카의 엄호를 받으며 제2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 무하마드 알리(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그 이름도 전설스러운 무하마드 알리가 나비처럼 가뿐하게 수도 서울에 입성한 것도 제2한강교를 지나서였고 오늘날 양화대교를 지나는 수많은 ‘봉고차’의 유래가 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 (봉고 대통령이 직접 밝힌 바, 한국정부가 새로이 개발된 신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의 카 퍼레이드도 제2한강교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갔다. 남북한의 외교전이 치열하던 시절, 국제 무대에서 한 표가 아쉬웠던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 손님들에게 카 퍼레이드는 기본이었고 제2한강교는 단골이었고 그 일대의 학생들은 툭하면 수업 작파하고 길거리에 늘어서서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던 것이다. 


제2한강교는 1980년대 이후 한강 개발 사업이 펼쳐지고 다리들이 많이 늘어서게 되면서 숫자로 구별이 힘들게 되면서 ‘양화대교’로 개칭된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일종의 관문 구실을 했으며 영등포 일대와 동교, 서교,망원, 성산 동 인근 지역을 환골탈태시켰던, 최초의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양화대교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일제히 실시된 안전도 검사에서 “서울 시내 15개 교량 중 최악의 상태” (1994년 10월 28일 경향신문 보도)라는 불명예를 쓰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의 대상이 된다. 결국 1965년 완성됐던 양화대교 구교는 완전히 헐고 재시공에 들어가야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문래동이다. 시내를 다녀오려면 어김없이 양화대교를 지나야 하고 다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내가 서울의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다리를 지났던 수십만 수백만의 한국인, 외국인 모두 그랬을 것이다. 가끔 택시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널 기회가 있을 때 혹 택시 기사 분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만난다면 양화대교의 추억을 떠 보시라. 아마 도착할 때까지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화대교는 그만큼의 오랜 역사와 사연들이 배어 있다.  실로 많은 부끄러움과 슬픔, 또 한 켠으로는 영광과 기쁨의 추억 위에 세워져 있는 다리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중앙선 코레일

    2015.04.01 18:03 [ ADDR : EDIT/ DEL : REPLY ]


노래 가사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수은등이 손짓하는 제2한강교 / 오작교 사연 싣고 강물은 굽이친다/ 

한 많은 백사장아 봄을 묻지 마라. 

아아 오늘도 기다리네. /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 견우성이 눈물짓는 제2한강교/ 

보라는 발자욱에 세월은 흘러간다. 

노 잃은 뱃사공아 한을 품지 마라 / 아아 불빛이 흔들리네 /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 


 


▲ 제2한강교(양화대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김세레나의 1966년 앨범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2한강교 건설의 첫 삽이 떠진 것은 1962년, 완공은 1965년이었다. 한강인도교가 완공된 것이 1917년이었으니 (광진교를 제외하면) 거의 반세기만에 새로운 다리가 한강에 걸쳐진 것이었다. 제2한강교는 영등포 당산동과 마포 합정동을 잇는 다리였고 오늘날의 양화대교다. 



 

 

 

▲ 절두산 / 양화진 외국인 묘지(출처: 민족문화백과사전/양화진외국인서교사묘원)



이 일대에는 서울 지역 한강의 3대 나루터라 할 양화진이 있었다. 수운(水運)을 통해 바다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울에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했던 이 양화진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대 이후 간간히 그 존재를 드러낸다.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목 잘라 죽인 것이 오늘날의 ‘절두산’ 아래 양화 나루터 근처였고 그들을 처형하기 전 망나니들이 칼을 씻은 우물이 있던 곳이 오늘의 합정동이었다. 


조선의 개화를 꿈꾼 재기 넘치는 인물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당한 뒤 그 시신이 실려와 토막 났던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고 구한말 수운이 편리한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설치해 달라는 주한 외교사절들의 요청에 응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다. 그러니 김세레나 노래처럼 그 백사장에는 한도 많았을 것이고 나루터를 떠난 사공의 한숨 소리도 여전히 배어 있었을 것이다. 




 

▲ 서울 화력발전소(당인리 발전소)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합정동과 영등포 당산동을 잇는 제2한강교의 목적은 다양했다. 서울에서 김포공항이나 인천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 또 당인리 화력 발전소에 물품을 실어 나르려고 할 때 등등 다리의 필요성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포화상태의 제1한강교 교통량을 분산하고 영등포 등 도시 외곽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요긴한 다리였다. 


그러나 이 다리 건설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국방상의 것이었다. 평야지대로 인민군의 기갑 부대의 주요 공격 축선이 될 수 있는 서부전선, 즉 ‘문산 일대로의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 다리 건설의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한강다리 1백년 - 서울특별시)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 다리는 오로지 군사용으로만 사용되게 못박혀 있었다. 즉 ‘유사시 군용 다리’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전쟁의 공포와 상흔은 그렇게 칼자국처럼 도시의 심장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 제2한강교 가설공사 (출처: e영상역사관 ehistory.korea.kr)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곧 도로를 까는 일이었다. 한강이야 임자가 없으니 맘대로 공사해서 도로를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 다리의 남안(南岸)과 북안의 땅은 거의 임자가 있었다. 아무리 관(官)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지만 다리 양쪽에 널린 사유지들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다. 


정부에서는 매입 단가를 평당 4천원 정도로 책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세 배인 1만 2천원은 받아야 한다고 공론이 돌아갔고 역시 그 일대에 땅을 일부 소유하고 있던 한 회사의 총무부장은 주민들의 위세에 묻어가 한몫 수입을 올릴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경영주에게 불려간다. 

“우리가 그 땅을 평당 얼마 주고 샀나?” 

“네? 평당 3원 주고 샀었지요. 생판 아무것도 없었을 땐데요.” 이 말을 하자마자 총무부장은 벼락같은 호통을 듣는다. 

“임자는 평당 3원에 산 것을 4000원에 가져가겠다는데 1300배의 이익을 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라에서 필요하다는데 당장 서울시에 내주지 못하겠는가.” 


회사의 이름은 유한양행. 그리고 총무부장에게 호통을 친 회장의 존함은 유일한이었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또는 명성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고 했던 그의 어록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한양행은 “땅값인상 투쟁”에서 빠졌고 다른 지주들도 대충 그에 상응하는 액수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제2한강교는 지어지기 시작했고 공사 3년만인 1965년 1월 27일 완공됐다. 



이로써 서울 도심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거리는 4km, 시간은 20분 정도가 단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홍제동~신촌 구간의 도로가 개설되어 이 다리와 직결됨으로써 영등포~서부전선의 거리가 약 6km 정도 줄어들었으며, 시간도 48분이 단축되어 연간 3000만원 어치 가량의 휘발유가 절약되었다고 한다. <한국건설기네스(Ι)길> (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중) 


 


▲ 양화대교 개통식(출처: 희망서울)



또한 이 공사는 설계에서부터 준공까지 모든 과정을 오롯이 국내 기술진의 힘으로만 끝낸 최초의 다리였다. 그러다 보니 사연도 많고 기쁨도 컸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초보적 교량 건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특히 4~5차례에 걸친 홍수 피해로 공기가 지연돼 30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공기 단축을 위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를 무사히 완공시킨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경사였다. 다리 준공식에 토목계 원로 200여 명을 초청하였고 현대건설 무교동 사옥에서 대대적인 준공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현대건설 60년사 중) 


그러고 보면 순수한 한국인의 돈과 힘만으로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는 이 제2한강교가 처음이었다. 한강철교와 인도교와 광진교는 일본이 만들었고 끊어진 다리를 잇는 데에도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와 함께.




Posted by 국토교통부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