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공간이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집은 점점 발전해 왔다.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집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알아보자.



▲ 구석기 시대 움집<출처 : 두피디아>



▲ 청동기 시대  집터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동굴에서 살면서 동굴 주변에서 사냥과 채집을 했다. 동굴은 비바람을 피하고 사나운 맹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다른 동굴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이다. 땅을 파고 거적으로 덮어서 추위나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집이다. 움집은 아직 벽과 지붕이 나뉘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신석기 시대보다 규모가 훨씬 커져 벽과 지붕이 나뉘고, 철기 시대에 이르면 움집 안에도 벽을 세워 움집 안을 나누어 쓰임새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건축기술이 발전하여 집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워 기둥이 썩을 염려가 없어지고 기와는 흙으로 모양을 만들었다. 또한 가마에 구워서 단단했고 이는 지붕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막고 건물을 아름답게 꾸몄다. 힘이 있는 귀족들은 쓸모에 따라 건물을 여러 채 짓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왕궁, 관부, 사원은 기와를 얹고 민가는 초옥으로 지었음을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 삼국시대 집


▲ 고려시대 집


고려 시대 후기에는 방 전체에 온돌을 깐 온돌방이 나타난다. 온돌방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루가 그 중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온돌방, 마루, 부엌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시대 집의 유형은 양반 주택과 평민 주택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은 유교 윤리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엄격하게 나누었다. 그래서 집이 안주인과 가족들이 생활하는 안채와 바깥주인이 생활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로 나뉘었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 노비들의 방과 작업공간이 있는 행랑채를 지었다. 조선 시대의 평민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는 평민의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살림하는 살림채와 짐승을 기르거나 농기구 따위를 보관하는 부속채로 나뉘어 있었다. 평민들의 집은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여름철이 덥고 습한 남부지방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마루도 넓고 창과 문도 크게 지었다. 겨울이 길어 날씨가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북부지방은 건물이 마당을 둘러싸서 바람을 막게 되어 있었다. 강화도 조약 이후 건축에서도 서양과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고 도시의 모습도 바뀌기 시작했다. 집을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들은 개량한옥을 지어 서민들에게 공급하였고, 한옥의 재료인 나무가격이 크게 올라 외국에서 원조 받은 시멘트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연립주택이나 고층 아파트가 나타났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집은 아파트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아파트는 일제 강점기 말기 조선 주택 영단이 혜화동에 건설한 3층짜리 아파트라고 한다. 지금의 아파트와는 그 모습이 많이 달랐다. 1960년대 마포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 우리나라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2015년.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 많은 집이 생겨나고 있다. 옛날의 집은 처음에 추위와 위험을 피하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집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는 휴식공간으로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집의 모양은 달라졌지만,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다. 미래에는 편안한 공간인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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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읽었습니다

    2015.10.07 16:54 [ ADDR : EDIT/ DEL : REPLY ]
  2. urbanpark

    주거문화가 참 많이 변해왔군요!

    2015.10.08 13:03 [ ADDR : EDIT/ DEL : REPLY ]
  3. 가우스

    잘 읽었습니다.

    2015.10.08 14:28 [ ADDR : EDIT/ DEL : REPLY ]
  4. 앨리스심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죠?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15.10.08 22:15 [ ADDR : EDIT/ DEL : REPLY ]
  5. 주거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익한 기사네요~

    2015.10.10 11:1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6. 한국의 주거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네요!

    2015.10.10 17:30 [ ADDR : EDIT/ DEL : REPLY ]
  7. 주거문화의 발전 과거의 집과 현재의 멋진 빌딩숲. 정말 대단해요

    2015.10.10 20:5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8. ^^

    와 좋은 정보 감사합ㅂ니다^^

    2015.10.10 22:47 [ ADDR : EDIT/ DEL : REPLY ]
  9. 벨빛페넥여우

    체험하며 사회공부가 쏙쏙이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15.10.12 16:38 [ ADDR : EDIT/ DEL : REPLY ]
  10. 너무 잘 쓰셨네요 ㅎㅎ

    2015.10.12 18:42 [ ADDR : EDIT/ DEL : REPLY ]
  11. sysea47

    흥미롭고 정말 재미있는 기사네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2015.10.13 17:24 [ ADDR : EDIT/ DEL : REPLY ]
  12. 옛날 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몹시 걱정이 될 만큼 현재에는 너무나도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걸 느끼네요.

    2015.10.13 17:4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13. 황예지

    아무리 다시봐도 정말 신기해요

    2015.10.15 18:30 [ ADDR : EDIT/ DEL : REPLY ]


조선의 중심 궁궐은 경복궁입니다.

옛날 태조(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을 때 종묘와 사직단을 만든 뒤, 맨 처음으로 세웠던 궁궐이 경복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경복궁은 흥선대원군(고종황제의 아버지)이 건설한 경복궁입니다. 태조가 만든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려서 약 300년 동안 폐허 상태로 있었습니다.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입니다.

광화문 다음으로 있는 문이 흥례문이고, 그 다음으로 있는 문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앞문, 근정문입니다.


경복=‘오랫동안 복이 있기를 빈다.’ 라는 뜻입니다.



正殿(정전)

근정전은 정전이라고 합니다.

정전은 국가 행사나 조회를 열고,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등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근정전의 지붕은 2층이지만 실제로는 1층입니다.

근정전 천장 가운데에는 발톱이 7개 달린 황금색 칠조룡 2마리가 여의주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또, 근정전 내부에는 일월오악도와 그 병풍 앞에 임금님이 앉으시던 어좌가 있습니다.



근정전  

                

便殿(편전)

근정전 뒤에는 사정전과 만춘전, 천추전이 있습니다.

이 건물들은 편전으로, 편전은 왕과 신하들이 같이 공부하고, 국가의 일을 의논하는 곳입니다.

편전 중에 사정전 앞에는 앙부일구라는 해시계가 놓여 있습니다.



  

                                 ▲ 만춘전                                                 ▲ 사정전


 

▲ 천춘전 



寢殿(침전)

편전 뒤에는 침전이 있습니다.

침전은 왕실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왕이 여기서 주무셨다고 합니다.


      

                               ▲ 왕이 주무시던 강녕전                           ▲ 왕비가 주무시던 교태전


기타 경복궁에는 많은 굴뚝이 있습니다. 

만춘전, 강녕전, 교태전(아미산), 자경전(십자생도)등등이 있습니다.


경복궁에는 과학기구도 많습니다.

바람의 세기를 알아보는 풍기대와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는 해시계(앙부일구)는 건물 밖에 있고, 물시계(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에 있습니다.

경복궁에는 과학기구를 보관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흠경각입니다.


▲ 흠경각


  

       ▲ 자경전 굴뚝                                            ▲ 교태전 굴뚝


 ▲ 강녕전 굴뚝



침전 옆에 있는 건물은 소주방입니다.

소주방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왕의 수라를 장만하던 ‘내소주방’, 궁중의 잔치나 제사 음식을 차리던 ‘외소주방’, 간식이나 후식인 떡, 과자, 죽, 차 등을 만들어 올리던 ‘생물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날 소주방의 요리사는 남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리사들은 임금이 드시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저런 행사도 많다 보니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소주방 

※ 자료출처 : 경복궁 홈페이지(www.royalpalace.go.kr)



경복궁 후기(느낌)

원래 초기의 경복궁(태조 이성계)을 현재는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으로 인해 건물 500채 중 50채도 안 남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식을 우리가 계속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던 건물 450채 중 1채인 소주방이 복원되어서 기쁩니다.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은 전각(건물)들이 빨리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국토교통부 3기 김규태 기자입니다.



 ▲ 수문장 교대식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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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페르마

    여러번 가봐서 익숙한 곳이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15.09.10 20:51 [ ADDR : EDIT/ DEL : REPLY ]
  2. sysea47

    경복궁 정말 아름다워요~

    2015.09.11 22:59 [ ADDR : EDIT/ DEL : REPLY ]
  3. 앨리스심

    여러 궁들이 정말 멋지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15.09.11 23:43 [ ADDR : EDIT/ DEL : REPLY ]
  4. 별빛페넥여우

    비 내리는 근정전의 모습이 인상깊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5.09.12 21:58 [ ADDR : EDIT/ DEL : REPLY ]
  5. 씨앗

    경복궁 또 가고싶네요~~!!

    2015.09.13 22:32 [ ADDR : EDIT/ DEL : REPLY ]
  6. G2

    경복궁은 언제 가도 좋더라구요!

    2015.09.15 23:05 [ ADDR : EDIT/ DEL : REPLY ]
  7. 야간개장때 많이 가서 그런지 이렇게 낮에 보는 경복궁의 모습은 또 다르네요.

    2015.09.16 09:3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8. 가도 가도 좋은곳인거 같아요.

    2015.09.16 13:32 [ ADDR : EDIT/ DEL : REPLY ]
  9. Nightshade

    경복궁은 참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드네요.

    2015.09.16 15:50 [ ADDR : EDIT/ DEL : REPLY ]
  10. 젼젼

    정말 경복궁은 언제가도 좋은 것 같아요~ 야간개장때 가면 분위기도 너무 멋있죠!!!

    2015.09.22 01:41 [ ADDR : EDIT/ DEL : REPLY ]
  11. 조선의 궁궐은 참 아름다운 것 같군요!!ㅎㅎ

    2015.10.10 02:06 [ ADDR : EDIT/ DEL : REPLY ]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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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잘 보고 갑니다. ^^ 좋은 하루 되세요.

    2014.09.22 17:1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멋진 그림 잘 봤습니다.^^

    2014.09.24 18:1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조은경

    만화를 잘 그리셨네요~

    2014.09.25 00:03 [ ADDR : EDIT/ DEL : REPLY ]
  4. 주양반디오현경

    한옥마을의 풍경이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한눈에 쏘옥 들어오는 그림이 멋져요!

    2014.09.25 01:55 [ ADDR : EDIT/ DEL : REPLY ]
  5. 김유진

    그림이 선명해서 잘 보이기도 하고 내용도 재미있네요^^

    2014.09.25 18:45 [ ADDR : EDIT/ DEL : REPLY ]
  6. 박진

    잘 봤습니다^^.
    만화를 잘그리시네요.

    2014.09.25 20:09 [ ADDR : EDIT/ DEL : REPLY ]
  7. 그림으로 그리니 간결하고 좋습니다!

    2014.09.25 21:23 [ ADDR : EDIT/ DEL : REPLY ]
  8. 전하진

    우와.. 그림도 잘 그리시네요.. 저렇게 어찌 그리는지.. 잼나게 잘 봤습니다.

    2014.09.25 22:53 [ ADDR : EDIT/ DEL : REPLY ]
  9. 재미있어요

    2014.09.29 22:12 [ ADDR : EDIT/ DEL : REPLY ]
  10. 김태규

    그림 잘 그리셧네요~ 만화 잘봤어요^^

    2014.10.13 21:40 [ ADDR : EDIT/ DEL : REPLY ]
  11. 박경준

    아이디어가 좋으세요.

    2014.10.26 23:49 [ ADDR : EDIT/ DEL : REPLY ]
  12. 신혜연

    만화로 보니 더 잘 이해하기 쉬운것 같아요^^

    2014.10.27 11:20 [ ADDR : EDIT/ DEL : REPLY ]
  13. 이준석

    만화 잘 그리시네요~!

    2014.10.31 21:56 [ ADDR : EDIT/ DEL : REPLY ]
  14. 멋져요!

    2014.11.01 07:3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우리나라 국토교통을 빛낸 위인을 만나다.


시간을 거슬러 국토교통을 빛낸 위인을 만나는 가상 인터뷰! 


네번째 위인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의 바다를 지켜낸 '성웅 이순신' 장군입니다.

 

 



처음에는 이순신 장군님이 우리나라 역사에 매우 중요한 분이지만, 바다를 지킨 분이라 국토교통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고 다시 깨달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우리 국토를 지키기 위해 이순신 장군님은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을. 한국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인 이순신 장군님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순신(1545~1598)

 

서울에서 태어나 아산의 외갓집에서 자랐다. 31세에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되었으나, 꼿꼿한 성품으로 인해 다른 신하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다.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 때 멋지게 왜적과의 싸움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바다의 물살을 이용해 명량대첩 때 한양의 함락 위기를 막았다.


한산대첩 때 학이 날개를 펼치듯이 왜국의 배를 둘러싸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들어 왜적들을 당당하게 물리쳤으나, 노량대첩 때 큰 승리를 거두고 슬프게도 죽음을 맞이했다. 


 

 



  

[기  자]

안녕하세요? 저는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의 이주훈 기자입니다.

 


[이순신]

안녕하세요. 이순신입니다.

 


[기  자]

너무 유명하신 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위인 중 한 분이실 겁니다. 저는 장군님이 화살로 한 번에 적을 맞추고, 칼싸움도 잘하셔서 무척 부러운데요. 어떻게 하면 무예를 그렇게 잘 할 수 있을까요?

 

 

[이순신]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칼과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했어요. 덕분에 무과에 합격할 수 있었구요. 활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전쟁놀이를 좋아했기에 잘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기  자]

임진왜란 때 임금께서 바다에서 싸우지 말고 땅에서 싸우라고 했고, 다른 장수들도 바다에서의 전투는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2척밖에 남지 않은 배로 일본의 300척이 넘는 배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인줄 알면서도 바다에서 싸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순신]

바다를 버리는 것은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 가서 싸우면 왜군들에게 우리나라 국토를 쉽게 빼앗길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구요.

 

 

 

 

 

▲ 한산대첩

 

 

 

 

[기  자]

그렇지만 그렇게 열심히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도 거짓을 말한 신하들의 말을 믿고 장군님을 감옥에 보냈던 임금이 다시 나가서 싸우라고 했잖아요. 정말 저였다면 임금이라도 절대 말을 듣지 않았을텐데 다시 전쟁터에 나가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순신]

내가 나가 싸우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죄도 없이 계속해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나라의 장군된 도리로 백성을 위해 임금이 원망스러워도 나가 싸운 것입니다.

 

 

[기  자]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장군님이 이 나라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칼과 창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몇 천배 더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 아끼시는 마음이 존경스럽습니다.

 

 

[이순신]

그런데 재미있는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위인전 말고도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도 저에 대해 알게된다고 하던데요?

 

 

[기  자]

우와! 정보가 빠르시네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 장군님이 인기입니다. 장군님의 명량대첩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 열풍이 굉장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장군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우리 후손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다니 영광입니다. 저도 한 번 그 영화를 보고싶네요.

 

 

[기  자]

장군님,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목숨걸고 싸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장군님처럼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이순신]

마음이 대견합니다. 우리 어린이들도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저처럼 칼과 활을 잘 다루는 튼튼한 조상님들이 언제나 여러분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대한민국 어린이 힘내세요!

 

 

[기  자]

멋진 장군님, 인터뷰도 재미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로 안녕히 돌아가세요.

 

 




인터뷰를 준비하며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을 감옥에 가둔 임금과 신하들을 벌주고 싶었겠지만, 백성을 생각하는 더 큰 뜻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신 마음과 목숨을 바쳐 싸우다 돌아가신 노량대첩에서의 큰 승리를 통해 지금의 우리 국토를 지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이 없었다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미래에 이순신 장군님처럼 이 나라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님을 성웅이라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님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왜 그분이 그냥 영웅이 아니라 성웅인지 그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참고자료 1>

 

 

거북선

 

임진왜란(1592년)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만든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르는데 크게 이바지한 거북 모양의 철갑선이다. 등에는 창검과 송곳을 꽂아 적이 오르지 못하게 했고, 앞머리와 옆구리 사방에는 화포를 설치했다.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했고,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거북을 한자로 옮긴 '귀선(龜船)'이라고 적혀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어린이 백과)

 

 

 

 

 

 

<참고자료 2>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이 전쟁 중에 쓴 일기. 전쟁 중의 기록이라 하여 난중일기라 부르게 되었다.

난중일기에는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날씨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적혀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글도 보관되어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 어린이 백과, 두산백과)

 

 

 

 

 

 

<참고자료 3>

 

 

유성룡(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중 최고 관직을 지내며 전시 조정을 이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왕조를 재정비, 강화하기 위한 응급책으로 각종 시무책을 제기했다. 본관은 풍산, 자는 이견, 호는 서애·운암이다. 

이순신 장군과는 친구사이로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가까이에서 본 이순신의 이야기도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칼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 했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자료출처 : 네이버 어린이 백과)

 

 

 

 

 

[자료출처]

 

적을 막아라 이순신 / 이경혜 / 한국 톨스토이

바다와 육지에서 외적을 물리치다 / 유현재 / 그레이트 북스

네이버 어린이 백과

두산백과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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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통이네에서...멋지게 재탄생한 기사..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2014.09.29 22:22 [ ADDR : EDIT/ DEL : REPLY ]
  2. 김태규

    기사 잘 읽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 잘 소개해 주셨네요~

    2014.10.24 18:20 [ ADDR : EDIT/ DEL : REPLY ]
  3. 박경준

    우리나라의 훌륭한 영웅이시죠.

    2014.10.26 23:20 [ ADDR : EDIT/ DEL : REPLY ]
  4. 미키

    역시 이순신장군님은 우리나라 위인들중에 1위라고생각합니다

    2016.11.10 21:42 [ ADDR : EDIT/ DEL : REPLY ]
  5. 비밀댓글입니다

    2017.11.17 21:34 [ ADDR : EDIT/ DEL : REPLY ]

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 둥 살 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 신도 완성 추측도(출처: 계룡시)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 데다 큰 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그제야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 무악 지도(출처: 서울시편찬위원회)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 도성 성곽(출처:서울시)



전설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다음 해 ‘도성축조도감’이 시작됐고 그 다음 해(1396)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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