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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8 한강다리 1편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꼽는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은 단연 한강일 것이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가 이 정도의 큰 강을 끼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집트의 카이로가 나일 강의 하구에 건설된 도시라지만 카이로 도심을 통과하는 나일강의 폭은 한강에 비해 좁고 통과하는 도심의 길이도 한강에 비해 짧다. 카이로의 도심 자체가 서울에 비해 작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런던은 템즈 강, 파리는 세느 강을 끼고 있다고 하지만 한강의 위용에 비할 바는 못 된다. 




▲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출처: 공간정보 오픈플랫폼)



1킬로미터가 넘는 강폭을 자랑하는 한강이 서울 도심을 W자로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 그리고 그 위에 겹겹이 놓인 한강 다리들의 모습은 가히 서울의 시각적 이미지의 주요 얼개가 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한강 유역은 중요한 교통로와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쟁탈전은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거니와 조선 왕조가 그 수도를 북악산 남쪽, 한강 북쪽의 한양 땅으로 정하면서 한강은 한 나라의 수도를 지탱하는 젖줄로 부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은 서해를 북상하여 한강으로 올라 짐을 부렸다. 새우젓 장수들이 주로 이용했던 마포 나루, 상인들과 거간꾼들이 들끓던 송파 나루는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고 강원도에서 뗏목에 실려온 목재들은 오늘날의 뚝섬 근방에 부려졌다. (이 목재장수들이 번 돈이 ‘떼돈’의 어원이 됐다고 한다.) 


한강은 그렇게 편리한 교통로이면서 동시에 장벽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올라가 남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또 한강을 건너 판교역 지나 삼남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나루터에서 나룻배가 떴지만 건너려는 사람은 많고 배는 적어 ‘과적’으로 인한 안전 사고가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전한다. 




▲ 배다리 설치방법(출처: 서울의 하천)



가끔은 임금님들도 한강을 건널 일이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너는 수도 있었지만 그리 ‘폼’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이용한 것이 주교(舟橋), 즉 배다리였다. 왕릉이 한강 이남에 조성된 경우 후대 임금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경기도 관찰사 책임하에 종종 부교가 조성되곤 했다.  그 가운데 정조는 한강 도하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에 조성해 두고 수시로 방문했던 그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규모 수원행을 계획하던 중 기존의 배다리 건설이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개선 지침이라 할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직접 써서 신개념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지시한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재미있는 건 그 시대의 배다리 건설 후보지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주요 한강 다리가 놓인 지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주교지남>에 등장하는 배다리 건설 후보지는 노량, 동호(동호대교 일대), 그리고 동작대교가 근처 용산의 동빙고 서빙고 일대였다. 이 가운데 배다리 건설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노량이었다. 이유 또한 과학적이다.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 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 그러므로 이들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이들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신병주 교수의 <배다리 이야기> 중) 


김홍도의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통해 정조의 배다리는 역사에 남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최대 아홉 명의 사람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어가를 옹위하고 있으며 배들 위에는 송판이 깔리고 그 위에는 잔디까지 놓였다. 임금이 지남을 알리는 홍살문까지 세 개나 세워졌으니 과히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정조 때의 배다리 공사는 배의 수효, 난간의 규격, 배들의 닻 문제, 노량의 밀물과 썰물 시기와 유속, 동원된 배들의 보상 문제 등 치밀한 구석까지 일일이 계산하고 시행한 대역사였고 정조는 그렇게 설치된 배다리를 넘어 여러 번 남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이 배다리를 놓는 배들은 경강선, 즉 한강의 수로 교통을 담당하는 배들이었고 임금의 행차가 끝나면 이 배들은 뿔뿔이 흩어져 배다리는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왕 배다리 만드는 것 영구적인 배다리를 만들어도 좋았겠지만 소심한 조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외국 군대나 반란군이 쉽사리 서울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길조차 닦지 않았던 나라니 오죽하랴마는. 


정조가 설치한 주교사(舟橋司)는 1882년까지 존속하다가 철폐된다. 이제 배다리를 놓을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배다리 없이, 심지어 배를 타지 않고 한강을 건너는 시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주교사 철폐 후 7년 뒤, 1889년 고종은 미국 공사로 나갔다 들어온 이하영이 가지고 들어온 장난감 기차에 혹한다. 쇠줄을 이어 궤도를 만들고 태엽 장치로 그 위를 달리는 모형 기차 앞에서 고종은 찬탄을 금치 못했고 몸소 태엽을 감으며 즐거워했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요청했을 때 고종은 이를 허락하며 장난감 궤도 위를 씩씩하게 달리던 모형 기차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한강주교환어도(소장: 국립고궁박물관)

 




▲ 공사 당시 모습(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후 모스의 경인선 사업권은 곧 일본에게 넘어갔고 일본은 경인선 공사에 박차를 가하는데 최대의 난공사 구간은 역시 넓디넓은 한강이었다. 일찍이 정조가 건넜던 노량 일대가 선정됐지만 홍수와 혹한 때문에 몇 번씩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홍역을 치렀고 40만원의 공사비를 잡아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0년 7월 5일 마침내 한강 철교가 준공됐다. 이는 그야말로 한 시대의 변화였다.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경인가도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톡톡히 재미를 보던 오늘날의 서울 오류동 주막거리에 곡소리가 났고 오류동 주모들이 정거장 건설 기념 축하 잔치에 난입하여 잔치에 초청된 기생들의 머리채를 잡는 사건도 있었다. 또 서울 장안의 짚신 장수들은 장사 다 해먹었다며 정거장 앞에 짚신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며 아이고 데이고 통곡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 향토문화대전 -구로구편 중)



 

▲ 한강철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20세기가 어슴푸레 밝아오던 즈음, 한강 위에는 한강다리가 처음으로 섰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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