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다리'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07.31 한강다리 7편(마지막편)
  2. 2013.07.19 한강다리 5편 (1)
  3. 2013.07.03 한강다리 3편 (2)
  4. 2013.06.24 한강다리 2편
  5. 2013.06.18 한강다리 1편
  6. 2013.06.05 낮보다 야경이 아름다운 대교


강남(江南) 개발은 미국 서부 개척과 비슷한 면이 있다. 

허허벌판 인적 없는 곳에 철도가 놓이고 금맥이 발견되면서 “Go West!"를 부르짖으며 서부로 달려갔던 미국인들처럼, 서울 시민들은 전쟁이 터질 경우 3-40만 명을 수용할 방공호를 겸하여 지어졌던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쭉 뻗은 한남대교를 건너 황량하게 펼쳐진 들판으로 달려나갔다. ‘강남으로!’를 부르짖으면서. 

정부가 앞장서서 땅 장사를 하고 그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정치 자금을 조성하는 가운데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 하는 토지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골드 러시’였지만 한국은 ‘랜드 러쉬’였다. 


당시 정부의 기조는 ‘강북 인구 분산’이기도 했다. 포화 상태에 이른 서울의 도심 기능을 어떻게든 분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도 강남 개발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72년 초 양택식 서울 시장은 이런 기자회견을 한다.


 “사치와 낭비 풍조를 막고 도심 인구과밀을 억제하기 위해 강북 주요지구 내에서는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각종 유흥시설 등의 신규 시설 일체를 불허한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강남에 터를 닦은 것이 유흥업소들이었다. 대규모 유흥업소들이 연속부절로 강남에 자리잡았고 강북 도심에서 간단히 1차를 끝낸 주당들은 “2차!”를 부르짖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제3한강교를 향해 ‘쏘았다.’ 


이윽고 75년 구자춘 서울 시장은 ‘한강 이북 지역 택지 개발 제한 조치’를 발표한다. 강북의 임야나 토지가 택지로 개발되는 일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묶인 돈과 욕망 역시 제3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게 된다. 



 

▲ 영동지구 주택건립공사(1973년 청담) 출처: http://bit.ly/17gNY5R



1971년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를 필두로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등 강변에 아파트의 성채가 쌓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즈음까지만 해도 아파트 이름은 마포 아파트나 와우 아파트 같은 식으로 지역명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현대건설이 그 브랜드 이름을 아파트에 붙여 ‘명예를 걸고’ 만들었음을 과시하면서 이후로는 건설사들이 자신의 브랜드를 아파트 이름으로 하는 시대가 열린다.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는 1978년 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유명해지면서 제3한강교 건설 후 변화한 강남의 위상을 웅변으로 보여 주게 된다. 바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사원용으로 지은 900여가구 가운데 600여가구를 정치인, 언론인, 기업인 등에게 특혜 분양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이다. 70년대 이후 부유층의 주거지로 이름 높은 그 이름은 그렇게 형성됐다. 




 

 

▲ 경기고 종로구 화동 교사 마지막 졸업식(76') / 정신여고 이전 공사 기공(78') (출처: http://bit.ly/17gNY5R)



사람이 살려면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니다. 아이들도 길러야 하고 교육도 시켜야 했다. 힘깨나 쓰고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이 대거 강남으로 몰려가면서 강북에 있던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들도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강남으로 옮긴다. 

수십 년 명문이었던 경기고가 76년 강남으로 옮겼고 휘문고등학교도 그 뒤를 따랐으며 서울고등학교도 한강을 건넜다. 여고도 예외가 아니어서 진명여고, 숙명여고 등이 강남행을 단행함으로써 강남은 완전한 신천지로 변했다. 


그 신천지에 지칠 줄 모르고 사람을 풀어놓은 파이프라인이 바로 제3한강교였다. 



 

▲ 출처: 다음 뮤직 http://music.daum.net/album/main?album_id=7211&song_id=255872



작달막한 제주도 출신 여가수 혜은이가 디스코 열풍을 불러 온 노래 <제3한강교>를 발표할 무렵(1979)이면 이미 강남은 환골탈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외국같이 변한 또 하나의 서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제3한강교를 직접 제목으로 삼았던 혜은이의 노래는 조금 불운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젊음은 피어나는 꽃처럼 / 이밤을 맴돌다가

새처럼 바다처럼 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뒤의 가사는 원래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였다. 그런데 “처음 만나 사랑을 하는데 하나가 된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엄숙하신 심의위원들 때문에 “어제 다시 만나서 다짐을 하고 우리들은 맹세를 하였습니다.” 하는 매우 어정쩡하고 대략 난감한 가사로 변신하고서야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막 태어난 또 하나의 서울. 흥청망청의 여흥과 일확천금의 욕망, 그리고 좌절과 박탈의 슬픔이 공존하던 시기의 강남, 그리고 제3한강교를 오가던 젊음들에게는 오히려 원래의 가사가 더 어울릴 수도 있었으련만 강남에 땅 한 자락 사 놓고 톡톡히 재미를 봤던 당시의 ‘지도층’들은 노래 가사에는 그렇게 엄숙했다. 


그래도 제3한강교 아래로 한강과 세월은 유구하게 흘렀고 1982년에는 ‘한남대교’로 그 이름이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 출처: http://encykorea.aks.ac.kr/

 


팍팍한 시골 생활 접고 불안하기만 한 희망을 찾아 서울로 이사 오던 가족들은 한남대교 건너 아득히 바라보이는 남산타워를 보면서 뿌듯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맛보았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거니와 동서로 고속도로가 뚫린 지금도 “서울에 왔다.”는 느낌을 주는 다리는 역시 한남대교와 그 너머에 우뚝 솟은 남산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으로 곧장 연결되는 다리이자 인기 연예인들의 고백 (한남대교에서 자살하려 했다는)에서 보듯 서울 시내 다리 가운데 투신 자살 빈도가 높아 자살 예방을 위한 긴급 전화가 놓이기도 했던 빛과 그림자의 다리이며, 말년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 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달릴 때 지나갔던 다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구가 마지막으로 한강을 건넌 역사의 다리이기도 하다. 


한남대교는 그렇게 서울을 바꾼 다리였고 또 하나의 서울과 옛 서울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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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한강교 개통식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62년 제2한강교 기공식 사진을 보면 한쪽에 이런 표어가 적혀 있다. “한 손 두 손 가는 곳에 늘어나는 우리 살림” 당시 한국은 막 독립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 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국내 최초로 국내 자본과 기술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돈은 정상적인 경로로 마련한 것이라기보다는 5.16 이후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그 이전의 ‘부정축재자’들로부터 몰수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헌납된 재산이 그 바탕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제3공화국 당시의 쑥덕거림처럼 부정 축재자들의 환수 재산으로 다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또 다른 부정들이 다리를 파먹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리가 완공된 5년 뒤 상판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로도 제2한강교는 여러 번 구멍이 나거나 교각 이음쇠에 문제가 발생해 통제되는 일이 많았다. 1978년 10월 31일 경향신문은 분노에 차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개통한지 1년이 못돼 결딴나는 포장도로나 10년이 못 가서 구멍이 뚫리는 다리는 무슨 까닭인가. 만일 공법상 규정된 철근 시멘트 모래 자갈의 배합비율과 필요한 공기 등을 엄격히 지켰던들 과연 그처럼 맥없이 망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쨌든 길은 닦이고 다리는 놓였다. 제2한강교의 건설로 가장 혁명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동네는 오늘날의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일대였다. 서교동과 동교동은 일제 때부터 이 일대는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진창밭으로 변해 버렸던 허허벌판이었다. 연세대학교 일대의 신촌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시내버스의 종점도 신촌 시장 일대에 있었고 그 이상은 그저 채소밭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교동과 동교동 사이에는 제2한강교로 향하는 대로가 뚫렸고 다리의 북안(北岸) 합정동에는 강변도로가 놓이게 된다. 합정동의 동명(洞名)은 과거 천주교 박해 시절 천주교인들의 목을 치던 망나니들이 그 칼을 씻거나 물고문에 이용했다는 우물 합정(蛤井)에서 연유된 것인데 이 으스스한 우물도 강변도로 개발과 함께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또  제2한강교는 망원동 이동, 즉 성산동, 상암동 수색 등지의 개발도 촉진시켰다. 1968년 10월 22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보도된 바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시내버스가 들어갈만한 대로가 없어 서울시에 속하면서도 농촌을 연상할 만큼 문명의 혜택을 보지 못한 채 경치 좋은 시골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삽시간에 사라지게 된다. 1968년의 서울 시장은 '김현옥.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리던 그는 이 일대를 이렇게 바꿀 계획을 세웠다. “제2한강교의 유엔 탑 부근으로부터 한강 둑을 따라 노폭 30미터의 새로운 도로를 뚫고 난지도 앞을 스쳐 중동, 북가좌동의 기존도로와 연결된 다음 응암동과 북가좌동의 중간지점에서 신사동의 기존도로와 교차하게 하고 다시 대광동을 지나 불광동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동교동을 기점으로 한강과 신촌, 수색간 철도의 중간지점을 타고 수색 쪽으로 노폭 25미터의 도로가 신설한다.” (위 신문 기사) 


 


▲ 1970년대 제2한강교(출처: e-영상역사관 film.ktv.go.kr)



이렇게 주변이 단장되고 개발된 이후 제2한강교는 ‘카 퍼레이드’의 다리로 각광받게 된다. 김포공항에서 시청으로 들어오는 최단 거리에 놓여진 제2한강교는 ‘국위선양’을 한 스포츠 스타나 기능 올림픽 선수단, 또는 환심을 사야 할 외국 국가 원수가 들어올 때마다 벌여 주었던 카 퍼레이드가 단골로 펼쳐진 다리였다. 




 ▲ 이애리사 (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1974년 국제 콩쿨 대회에서 입상한 정명훈도 공항에서 제2한강교를 넘어 시내로 들어가는 카 퍼레이드를 펼쳤고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탁구의 샛별 이애리사를 위시한 선수단도 제2한강교를 자랑스럽게 지났다. 최초로 북한을 이겼던 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선수단을 위해서는 100여대의 군용 지프가 김포공항에 총출동했고 이들은 경찰 사이드카의 엄호를 받으며 제2한강교를 통해 한강을 도하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 무하마드 알리(출처: 국가기록원 theme.archives.go.kr)



그 이름도 전설스러운 무하마드 알리가 나비처럼 가뿐하게 수도 서울에 입성한 것도 제2한강교를 지나서였고 오늘날 양화대교를 지나는 수많은 ‘봉고차’의 유래가 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 (봉고 대통령이 직접 밝힌 바, 한국정부가 새로이 개발된 신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의 카 퍼레이드도 제2한강교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갔다. 남북한의 외교전이 치열하던 시절, 국제 무대에서 한 표가 아쉬웠던 우리나라에 왔던 외국 손님들에게 카 퍼레이드는 기본이었고 제2한강교는 단골이었고 그 일대의 학생들은 툭하면 수업 작파하고 길거리에 늘어서서 태극기를 흔들어야 했던 것이다. 


제2한강교는 1980년대 이후 한강 개발 사업이 펼쳐지고 다리들이 많이 늘어서게 되면서 숫자로 구별이 힘들게 되면서 ‘양화대교’로 개칭된다.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일종의 관문 구실을 했으며 영등포 일대와 동교, 서교,망원, 성산 동 인근 지역을 환골탈태시켰던, 최초의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양화대교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후 일제히 실시된 안전도 검사에서 “서울 시내 15개 교량 중 최악의 상태” (1994년 10월 28일 경향신문 보도)라는 불명예를 쓰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의 대상이 된다. 결국 1965년 완성됐던 양화대교 구교는 완전히 헐고 재시공에 들어가야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문래동이다. 시내를 다녀오려면 어김없이 양화대교를 지나야 하고 다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내가 서울의 도심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다리를 지났던 수십만 수백만의 한국인, 외국인 모두 그랬을 것이다. 가끔 택시를 타고 양화대교를 건널 기회가 있을 때 혹 택시 기사 분의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만난다면 양화대교의 추억을 떠 보시라. 아마 도착할 때까지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화대교는 그만큼의 오랜 역사와 사연들이 배어 있다.  실로 많은 부끄러움과 슬픔, 또 한 켠으로는 영광과 기쁨의 추억 위에 세워져 있는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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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앙선 코레일

    2015.04.01 18:03 [ ADDR : EDIT/ DEL : REPLY ]


한강인도교 폭파는 향후로도 한강의 역사, 우리 도시 건설의 역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뒤 광나루에 걸려 있던 광진교 역시 국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된다. 두 다리 폭파 후 한강은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차단하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전쟁 발발 3일만에 함락될 만큼 전선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수도 서울의 1백만 시민들, 피난을 가다가 다리 위에서 폭발과 함께 사라진 사람들과 그를 지켜보며 망연한 비명을 질렀던 피난민들, 그리고 그 폭발의 순간까지도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며 서울을 지키고 있던 대략 4만 명의 국군 장병들 모두에게 끊어진 한강다리는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나마 있던 다리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모두가 폭파됐다. 철수하지 못한 시민들은 3개월간의 ‘인공치하’를 견뎌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도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서울 수복 기념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부관들이 난색을 표한다. “한강 다리가 철교고 인도교가 죄 끊어져서 서울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맥아더 원수는 아주 간단하고 시원한 한 마디를 남긴다. “Make one." 하나 만들어.


까라면 까는 것이 군대였고 물량과 장비는 넘치는 것이 미군. 그들은 한강철교를 밤새 복구해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를 강북 땅을 밟게 한다. 한강인도교 역시 일단 응급 복구를 받고 1차선으로만 재개통된다. 다리를 다시 지을 여력도 여력이었겠지만 또 언제 인민군이 내려와 우리 손으로 폭파시킬지 모르는 전쟁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한강 인도교 개통식(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1953년 12월 28일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5개월 뒤 한강인도교에서는 색다른 기념식이 열린다. “아직 본교(本橋)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의 편의를 돕기 위해 다리 양쪽에 나무판으로 만든 보도를 깐 것이다.” (경향신문 1983.9.3 이 한 장의 사진 중) 한강대교의 완벽한 재준공도 아니고 사람들 겨우 다닐만한 나무 판을 까는 공사였지만 기념식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이 등장하여 미군 장성과 함께 테이프를 끊는다. 비슷한 시기 이승만 대통령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를 대동하고 광진교 복구 공사 현장에서 기술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강 다리라는 것이 얼마나 다급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끊어진 한강 철교를 포탄 탄피로 대충 이은 다리 위로 차량이 오가야 했고 일반인들은 군사용으로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발급된 ‘도강증’을 지녀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서울에 집을 둔 사람들도 지방에 내려갔다 오려면 도강증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니 끊어진 한강다리가 얼마나 야속해 보였겠는가. 


남북으로 분단된(?) 서울을 본격적으로 이어 보려는 시도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야 재개된다. 폭파는 순식간이었지만 복구는 그렇게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우리 능력으로는 벅찼고 ICA (미국 국제원조처)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 공사를 완성한 것이 현대건설이었다. 공사비는 무려 10억 환 가까이 들어간 이 공사는 돈도 돈이었지만 대단한 난공사였다. 폭파돼 물에 빠진 교량이 장애물 역할을 해 수중 기초공사에 적잖은 애를 먹어야 했고 콘크리트에 파일을 박을 때는 잠수부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 잠수부들이 작업을 하러 한강을 자맥질치며 내려갔다가 혼이 나가서 올라오기도 했다. “불발탄이 강바닥에 쌓여 있습니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들이박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한강대교 복구준공(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전후 복구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라 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는 1958년 5월 16일 ‘한강대교 준공식’으로 그 결실을 맞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다리 위를 걷는다. 8년 전 전쟁 때 일찌감치 후퇴해서 대전에서 “서울 사수”를 방송했던 그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다리 위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원혼들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날 한강 백사장에는 수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몰려들어 새로이 이어지는 한강의 남과 북을 축하했다. 한강인도교는 정식으로 ‘한강대교’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귀에 익은 한강대교의 이름은 사실상 이때를 기점으로 한다. 이후로도 한강대교는 강남북을 잇는 거의 유일한 다리였다 (물론 광진교도 있었지만 그 물동량, 그리고 서울의 중심부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요성에 비추어 한강대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4.19 때 흑석동의 중앙대학생들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기치를 들고 한강을 건너 경무대로 향했던 것도 이 다리였고 그 1년 후 해병대 병력들이 그들의 서울 진입을 막으려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교환했던 것도 한강대교였다. 광진교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외롭게 서울 시민들의 일상을 지켜온 한강대교는 1962년에야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다. 수도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하고 서울 서부 지역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전쟁 시 원활한 군의 이동을 위해 (유사시 군과 민간인이 따로 사용할 다리가 필요했다) 한강다리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제2한강교, 오늘날의 양화대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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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11

    위 한강 철교 폭파된 사진을 활용해 영상을 제작하려고 하는 학생입니다.
    사용가능할까요?

    2014.05.28 00:57 [ ADDR : EDIT/ DEL : REPLY ]
  2. 위 사진은 저희쪽에서도 국가기록원 자료를 가지고 온 사진입니다. 상업적용도로 사용안하시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확한 내용은 국가기록원에 문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확실한 답변드리지 못한점

    2014.05.28 17:3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한강철교는 섰다. 그러나 이는 기차를 위한 다리일 뿐 사람의 통행을 위한 시설은 일체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원래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부여할 때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못박아 두었지만 모스로부터 이 부설권을 사들인 일제는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보도 시설을 빼 버린다. 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강을 건너갔지만 사람들은 괴물 같은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룻배를 탈 수 밖에 없었고 뱃사공은 아직까지는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나루터의 종말은 다가왔다. 1916년 한강인도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도교 공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였다. 황제 폐하나 타는 것으로 알았던 자동차는 1911년 단 2대에 불과했지만 1915년 경에는 70대로 늘었고 1917년에는 마침내 100대를 돌파하여 114대에 이르고 있었다. (CN뉴스 2011.3.14 이덕수의 길따라 기록따라) 또 서울시 인구도 늘었고 강남•북을 잇는 교통로 확보가 절실해진 것이다. 




▲ 한강 인도교 건설현장(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총독부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본교의 가설은 교통연락상 가장 긴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교(架橋)가 기획된 일이 없고 겨우 도선(渡船)에 의해 연락된데 불과함으로써 교통기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번에 철도국의 한강구철교(漢江舊鐵橋)의 고재(古材)인 60m의 횡형(橫桁) 10연을 매수하고 부족 재료는 새로 구입하여 가교공사의 시행을 결정”(조선총독부 토목사업지 - 1937) 하기에 이른다. 즉 한강인도교의 기초는 한강철교를 짓고 남았던 자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인도교 공사는 1917년 10월 완공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인 셈이다. 당시에는 노들섬에서 노량진간의 440미터 구간을 한강대교, 노들섬에서 용산까지의 구간을 한강소교라고 나누어 불렀다고 전한다. 



▲ 한강 대교(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먼 훗날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한강 위에 세워진 모든 다리에 비상 조사가 실시된 바 있었다. 이때 일제 때 시공된 한강대교의 기초는 오히려 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다리였다. 한강대교가 지어진 뒤 한강대교는 온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의 명물이 된다. 한강인도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엉기적 엉기적 우마차들이 지나는 가운데 기생과 부잣집 한량들을 태운 자동차들은 날렵하게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한강 다리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세태를 비관한 염세자들이 즐겨 자살을 택한 곳이 하필이면 한강다리였던 것이다. 더구나 교각이 아치 형태로 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던 한강대교는 지금은 아예 함부로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칠이 되어 있거니와 일제 강점기에는 “일촌대기(一寸待期: 잠깐만 참으시오!) 라는 팻말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스토-ㅂ’/항구의 종점이올시다/때때로 임자 없는 모자들이 난간에 걸려서는/‘인생도 잘 있거라’고 바람에 펄럭입니다/그러므로 기둥 밑에는 아가씨들을 위하여/ 커다란 눈물 박기(그릇)가 놓여 있습니다.”는 김기림의 시 <한강인도교>는 그 비극의 단면을 노래하고 있거니와 당시 경성부 용산경찰서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듯 한강다리 북단에 파출소를 설치하여 다리를 순찰하고 밤에도 등을 대낮같이 밝히는 한편 자살 방지를 위한 슬로건 공모까지 했다고 한다. 응모작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년 삼월 다시 피지마는 인생 한번 죽어지면 다시 오지 못하리라” (중앙일보 2010.10.12 분수대)


우리나라 홍수(洪水) 역사 중 최악의 홍수로 기록된 을축년 대홍수 (1925) 때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도 피해를 입는다. 7월 중순부터 내리 부은 비는 금새 한강다리의 턱밑까지 강물을 치오르게 했는데 그 경황에도 일부 서울 시민들은 전차 타고 물 구경한다고 한강인도교 위에 집결했다 한다. 그러나 이 구경거리는 곧 엄청난 괴물로 변한다. 당인리 발전소가 물에 잠기고 오늘날의 용산 일대도 물바다가 됐다. 한강 다리 역시 용산 쪽으로 났던 소교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다시금 한강다리가 이어진 것은 1929년이었고 이는 1935년 경 그 폭이 확장되어 오늘과 비슷한 형태의 한강대교가 된다. 



 

▲ 광진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런데 1936년 오늘날의 서울 동부 지역, 당시로 보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일대였던 광나루에 또 하나의 다리가 놓여진다. 이 광나루는 서울에서 경기도 동부지역으로 가거나 원주를 거쳐 강원도로, 또는 충주 방면으로 길을 잡아 부산 동래까지 가는 교통의 출발지로 한강변의 중요한 나루터 중 하나였다. 발동 기선이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날랐으나 1930년대쯤엔 포화상태에 이르러 다리 건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광진교’다. 한강다리로는 두 번째로 지어진 다리이지만 그 이후로 ‘대교’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후일 제2 한강교, 제3 한강교로 다리에 번호가 매겨질 때 그 일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버티게 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광진교가 ‘대교’로 사람들 머리 속에 각인되기에는 좀 빈약했다고나 할까. 해방 때까지 한강을 잇는 다리는 한강철교, 그리고 한강인도교, 광진교 세 다리 뿐이었다. 



해방이 오고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이 빚어진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죄어들어왔다. 이미 남쪽으로 피난간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생각하지 않던 서울 시민들은 바야흐로 귀를 찌르는 포성과 국군 패잔병들의 참상을 보고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가기 시작한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위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들끓고 있었다. 광진교도 있었지만 광나루와 서울 도심과는 차이가 있었던 바 피난민들은 대부분 한강대교로 몰렸다. 헌병들이 호각을 불고 심지어 위협사격을 가하며 막아 봤지만 목숨을 내건 피난민들이 다리에 달라붙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새벽 2시 30분경 피난민들이 다리 위에서 남행을 재촉하고 있을 즈음, 국군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서 서울 사수전을 펼치고 있었을 시간, 한강인도교에는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솟았다. 서울 종로에서도 들었다는 사람이 있을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약 800 여명 (추산일 뿐 정확한 수효는 누구도 모른다)의 생목숨과 함께 한강인도교의 거대한 교각 또한 한강물에 빠져들었다. 아군의 손에 의해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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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꼽는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은 단연 한강일 것이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가 이 정도의 큰 강을 끼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집트의 카이로가 나일 강의 하구에 건설된 도시라지만 카이로 도심을 통과하는 나일강의 폭은 한강에 비해 좁고 통과하는 도심의 길이도 한강에 비해 짧다. 카이로의 도심 자체가 서울에 비해 작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런던은 템즈 강, 파리는 세느 강을 끼고 있다고 하지만 한강의 위용에 비할 바는 못 된다. 




▲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출처: 공간정보 오픈플랫폼)



1킬로미터가 넘는 강폭을 자랑하는 한강이 서울 도심을 W자로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 그리고 그 위에 겹겹이 놓인 한강 다리들의 모습은 가히 서울의 시각적 이미지의 주요 얼개가 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한강 유역은 중요한 교통로와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쟁탈전은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거니와 조선 왕조가 그 수도를 북악산 남쪽, 한강 북쪽의 한양 땅으로 정하면서 한강은 한 나라의 수도를 지탱하는 젖줄로 부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은 서해를 북상하여 한강으로 올라 짐을 부렸다. 새우젓 장수들이 주로 이용했던 마포 나루, 상인들과 거간꾼들이 들끓던 송파 나루는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고 강원도에서 뗏목에 실려온 목재들은 오늘날의 뚝섬 근방에 부려졌다. (이 목재장수들이 번 돈이 ‘떼돈’의 어원이 됐다고 한다.) 


한강은 그렇게 편리한 교통로이면서 동시에 장벽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올라가 남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또 한강을 건너 판교역 지나 삼남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나루터에서 나룻배가 떴지만 건너려는 사람은 많고 배는 적어 ‘과적’으로 인한 안전 사고가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전한다. 




▲ 배다리 설치방법(출처: 서울의 하천)



가끔은 임금님들도 한강을 건널 일이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너는 수도 있었지만 그리 ‘폼’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이용한 것이 주교(舟橋), 즉 배다리였다. 왕릉이 한강 이남에 조성된 경우 후대 임금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경기도 관찰사 책임하에 종종 부교가 조성되곤 했다.  그 가운데 정조는 한강 도하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에 조성해 두고 수시로 방문했던 그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규모 수원행을 계획하던 중 기존의 배다리 건설이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개선 지침이라 할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직접 써서 신개념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지시한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재미있는 건 그 시대의 배다리 건설 후보지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주요 한강 다리가 놓인 지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주교지남>에 등장하는 배다리 건설 후보지는 노량, 동호(동호대교 일대), 그리고 동작대교가 근처 용산의 동빙고 서빙고 일대였다. 이 가운데 배다리 건설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노량이었다. 이유 또한 과학적이다.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 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 그러므로 이들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이들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신병주 교수의 <배다리 이야기> 중) 


김홍도의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통해 정조의 배다리는 역사에 남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최대 아홉 명의 사람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어가를 옹위하고 있으며 배들 위에는 송판이 깔리고 그 위에는 잔디까지 놓였다. 임금이 지남을 알리는 홍살문까지 세 개나 세워졌으니 과히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정조 때의 배다리 공사는 배의 수효, 난간의 규격, 배들의 닻 문제, 노량의 밀물과 썰물 시기와 유속, 동원된 배들의 보상 문제 등 치밀한 구석까지 일일이 계산하고 시행한 대역사였고 정조는 그렇게 설치된 배다리를 넘어 여러 번 남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이 배다리를 놓는 배들은 경강선, 즉 한강의 수로 교통을 담당하는 배들이었고 임금의 행차가 끝나면 이 배들은 뿔뿔이 흩어져 배다리는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왕 배다리 만드는 것 영구적인 배다리를 만들어도 좋았겠지만 소심한 조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외국 군대나 반란군이 쉽사리 서울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길조차 닦지 않았던 나라니 오죽하랴마는. 


정조가 설치한 주교사(舟橋司)는 1882년까지 존속하다가 철폐된다. 이제 배다리를 놓을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배다리 없이, 심지어 배를 타지 않고 한강을 건너는 시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주교사 철폐 후 7년 뒤, 1889년 고종은 미국 공사로 나갔다 들어온 이하영이 가지고 들어온 장난감 기차에 혹한다. 쇠줄을 이어 궤도를 만들고 태엽 장치로 그 위를 달리는 모형 기차 앞에서 고종은 찬탄을 금치 못했고 몸소 태엽을 감으며 즐거워했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요청했을 때 고종은 이를 허락하며 장난감 궤도 위를 씩씩하게 달리던 모형 기차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한강주교환어도(소장: 국립고궁박물관)

 




▲ 공사 당시 모습(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후 모스의 경인선 사업권은 곧 일본에게 넘어갔고 일본은 경인선 공사에 박차를 가하는데 최대의 난공사 구간은 역시 넓디넓은 한강이었다. 일찍이 정조가 건넜던 노량 일대가 선정됐지만 홍수와 혹한 때문에 몇 번씩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홍역을 치렀고 40만원의 공사비를 잡아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0년 7월 5일 마침내 한강 철교가 준공됐다. 이는 그야말로 한 시대의 변화였다.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경인가도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톡톡히 재미를 보던 오늘날의 서울 오류동 주막거리에 곡소리가 났고 오류동 주모들이 정거장 건설 기념 축하 잔치에 난입하여 잔치에 초청된 기생들의 머리채를 잡는 사건도 있었다. 또 서울 장안의 짚신 장수들은 장사 다 해먹었다며 정거장 앞에 짚신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며 아이고 데이고 통곡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 향토문화대전 -구로구편 중)



 

▲ 한강철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20세기가 어슴푸레 밝아오던 즈음, 한강 위에는 한강다리가 처음으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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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밤에 야외활동하기 적당한 것 같습니다. 주말에 한강변에 놀러 갔다가 반포대교를 지나는데 너무 아름답더군요. 찾아보니 최근 개봉한 영화 애프터 어스의 주인공 윌 스미스도 작년 내한 당시, 한국의 반포대교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낮보다 야경이 아름다운 다리는 반포대교 뿐만은 아닌데요. 이번 주말은 야경이 아름다운 다리로 나들이를 떠나볼까요?




반포대교 무지개분수



용산구 서빙고동과 서초구 반포동을 잇는 반포대교는 한국 최초의 2층 교량으로 1층은 잠수교, 2층이 반포대교입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분들이라면, 반포대교 무지개분수를 한번쯤 보셨을 텐데요. 음악에 맞춰 무지개분수가 춤을 추는 분수쇼가 펼쳐집니다.


무지개분수 가동시간은 오후 8시부터 시작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반포대교 무지개분수를 보실 분은 405A, 405B, 740, 2016, 6211 버스가 분수쇼 앞에서 하차하니 참고하세요.


무지개분수는 멀리서 바라봤을 때도 아름답지만 한강에 비치는 무지갯빛이 더 아름다우니 서울근교에 거주하신 분들은 평일 저녁에도 다녀오실 수 있겠습니다.



  

  

▲ 반포대교 무지개 분수(출처: 비지트서울 www.visitseoul.com)

  


 <4~6월, 9~10월 무지개 분수 시간>

  평일:12:00/20:00/21:00 

  휴일:12:00/17:00/20:00/20:30/21:00/21:30


<7~8월 무지개 분수 시간>

  평일:12:00/20:00/21:00 

  휴일:12:00/17:00/19:30 / 20:00/20:30/21:00 / 21:30




여수 돌산대교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가사대로 조명에 담긴 여수 밤바다를 소개합니다. 야경이 아름다운 다리임과 동시에 여수의 비경 중의 하나인 돌산대교입니다. 


여수 돌산섬 앞바다에 세워진 이 다리는 수면 위 높이가 20미터나 되는데요. 여수 앞바다의 조류속도가 초속 3m나 되고, 대형선박들이 주로 운행하는 항로에 다리가 지어져 수면 높이를 높게 건설했다고 합니다.


불이 들어오기 전 돌산대교를 지나는 수많은 차량이 아름다운 대교를 만드는데요. 저녁이 되면 들어오는 50여개 이상의 색이 돌산대교를 또 다른 매력의 장소로 만듭니다. 




 

▲ 여수 돌산대교(출처: 여수지방해양항만청 http://bit.ly/10KMZfk)



돌산대교 근처에는 실물크기 거북선이 있어 이순신 장군의 기세를 관람을 하거나, 오동도나 향일암 등을 돌아보는 관광 유람선을 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과 같이 멋진 야경은 전망대에서 찍을 수 있는데요. 돌산대교는 준공기념탑과 공원, 전망대 등이 있어 편안하게 야경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멋진 사진사가 될 수 있는 곳, 돌산대교 전망대로 떠나보세요. 




안동 월영교



경북 안동에 있는 월영교는 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간직되어 있는 나무다리입니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의 다리를 지었다고 해요. 가운데는 월영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달 밝은 밤 달빛을 오롯이 볼 수 있습니다.


도심 속의 야경과는 달리 달빛과 함께 하는 낭만이 있는 안동 월영교를 소개합니다.

 




 ▲ 월영교 (출처: 안동관광 http://bit.ly/11PxkwK)



안동댐에 있는 월영교는 387m로 국내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인데요. 2003년 개통 이후, 목책이 부식되어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2008년 12월에 다시 개통하여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월영교 주변에는 민속박물관과 민속촌, 야외박물관, 등산로 등이 있어 안동여행 코스로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해요. 


화려한 조명보다 은은한 자연의 멋을 느끼고 싶을 때 월영교의 야경이 마음을 안전시켜 줄 것만 같은데요. 4월~10월은 밤마다 멋진 분수쇼도 진행한다고 하니 안동여행 계획을 짜보시는 건 어떤가요? 



 가동기간 : 4월~10월

 가동일시 : 매주 토, 일 

                낮 12시 30분, 오후 6시 30분, 오후 8시(20분간)


          


불빛, 달빛, 물, 다리가 만들어 내는 야경이 어떠셨나요?

야경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있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낮보다 아름다운 다리의 야경을 보며 일상의 찌든 때를 털어내고 마음속에 밝은 빛이 비추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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