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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24 한강다리 2편


한강철교는 섰다. 그러나 이는 기차를 위한 다리일 뿐 사람의 통행을 위한 시설은 일체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원래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부여할 때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못박아 두었지만 모스로부터 이 부설권을 사들인 일제는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보도 시설을 빼 버린다. 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강을 건너갔지만 사람들은 괴물 같은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룻배를 탈 수 밖에 없었고 뱃사공은 아직까지는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나루터의 종말은 다가왔다. 1916년 한강인도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도교 공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였다. 황제 폐하나 타는 것으로 알았던 자동차는 1911년 단 2대에 불과했지만 1915년 경에는 70대로 늘었고 1917년에는 마침내 100대를 돌파하여 114대에 이르고 있었다. (CN뉴스 2011.3.14 이덕수의 길따라 기록따라) 또 서울시 인구도 늘었고 강남•북을 잇는 교통로 확보가 절실해진 것이다. 




▲ 한강 인도교 건설현장(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총독부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본교의 가설은 교통연락상 가장 긴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교(架橋)가 기획된 일이 없고 겨우 도선(渡船)에 의해 연락된데 불과함으로써 교통기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번에 철도국의 한강구철교(漢江舊鐵橋)의 고재(古材)인 60m의 횡형(橫桁) 10연을 매수하고 부족 재료는 새로 구입하여 가교공사의 시행을 결정”(조선총독부 토목사업지 - 1937) 하기에 이른다. 즉 한강인도교의 기초는 한강철교를 짓고 남았던 자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인도교 공사는 1917년 10월 완공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인 셈이다. 당시에는 노들섬에서 노량진간의 440미터 구간을 한강대교, 노들섬에서 용산까지의 구간을 한강소교라고 나누어 불렀다고 전한다. 



▲ 한강 대교(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먼 훗날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한강 위에 세워진 모든 다리에 비상 조사가 실시된 바 있었다. 이때 일제 때 시공된 한강대교의 기초는 오히려 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다리였다. 한강대교가 지어진 뒤 한강대교는 온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의 명물이 된다. 한강인도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엉기적 엉기적 우마차들이 지나는 가운데 기생과 부잣집 한량들을 태운 자동차들은 날렵하게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한강 다리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세태를 비관한 염세자들이 즐겨 자살을 택한 곳이 하필이면 한강다리였던 것이다. 더구나 교각이 아치 형태로 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던 한강대교는 지금은 아예 함부로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칠이 되어 있거니와 일제 강점기에는 “일촌대기(一寸待期: 잠깐만 참으시오!) 라는 팻말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스토-ㅂ’/항구의 종점이올시다/때때로 임자 없는 모자들이 난간에 걸려서는/‘인생도 잘 있거라’고 바람에 펄럭입니다/그러므로 기둥 밑에는 아가씨들을 위하여/ 커다란 눈물 박기(그릇)가 놓여 있습니다.”는 김기림의 시 <한강인도교>는 그 비극의 단면을 노래하고 있거니와 당시 경성부 용산경찰서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듯 한강다리 북단에 파출소를 설치하여 다리를 순찰하고 밤에도 등을 대낮같이 밝히는 한편 자살 방지를 위한 슬로건 공모까지 했다고 한다. 응모작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년 삼월 다시 피지마는 인생 한번 죽어지면 다시 오지 못하리라” (중앙일보 2010.10.12 분수대)


우리나라 홍수(洪水) 역사 중 최악의 홍수로 기록된 을축년 대홍수 (1925) 때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도 피해를 입는다. 7월 중순부터 내리 부은 비는 금새 한강다리의 턱밑까지 강물을 치오르게 했는데 그 경황에도 일부 서울 시민들은 전차 타고 물 구경한다고 한강인도교 위에 집결했다 한다. 그러나 이 구경거리는 곧 엄청난 괴물로 변한다. 당인리 발전소가 물에 잠기고 오늘날의 용산 일대도 물바다가 됐다. 한강 다리 역시 용산 쪽으로 났던 소교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다시금 한강다리가 이어진 것은 1929년이었고 이는 1935년 경 그 폭이 확장되어 오늘과 비슷한 형태의 한강대교가 된다. 



 

▲ 광진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런데 1936년 오늘날의 서울 동부 지역, 당시로 보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일대였던 광나루에 또 하나의 다리가 놓여진다. 이 광나루는 서울에서 경기도 동부지역으로 가거나 원주를 거쳐 강원도로, 또는 충주 방면으로 길을 잡아 부산 동래까지 가는 교통의 출발지로 한강변의 중요한 나루터 중 하나였다. 발동 기선이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날랐으나 1930년대쯤엔 포화상태에 이르러 다리 건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광진교’다. 한강다리로는 두 번째로 지어진 다리이지만 그 이후로 ‘대교’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후일 제2 한강교, 제3 한강교로 다리에 번호가 매겨질 때 그 일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버티게 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광진교가 ‘대교’로 사람들 머리 속에 각인되기에는 좀 빈약했다고나 할까. 해방 때까지 한강을 잇는 다리는 한강철교, 그리고 한강인도교, 광진교 세 다리 뿐이었다. 



해방이 오고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이 빚어진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죄어들어왔다. 이미 남쪽으로 피난간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생각하지 않던 서울 시민들은 바야흐로 귀를 찌르는 포성과 국군 패잔병들의 참상을 보고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가기 시작한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위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들끓고 있었다. 광진교도 있었지만 광나루와 서울 도심과는 차이가 있었던 바 피난민들은 대부분 한강대교로 몰렸다. 헌병들이 호각을 불고 심지어 위협사격을 가하며 막아 봤지만 목숨을 내건 피난민들이 다리에 달라붙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새벽 2시 30분경 피난민들이 다리 위에서 남행을 재촉하고 있을 즈음, 국군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서 서울 사수전을 펼치고 있었을 시간, 한강인도교에는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솟았다. 서울 종로에서도 들었다는 사람이 있을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약 800 여명 (추산일 뿐 정확한 수효는 누구도 모른다)의 생목숨과 함께 한강인도교의 거대한 교각 또한 한강물에 빠져들었다. 아군의 손에 의해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