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에서 한양도성 완주를 위한 정기해설 프로그램인 도성길라잡이와 함께 하는 한양도성스탬프투어를 운영한다고 합니다. 해설이 함께하는 이번 프로그램은 3월부터 12월까지 매주 일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됩니다. 4주 동안 꾸준히 참석하면 한양도성 18.6km를 자연스럽게 완주하게 됩니다. 


투어코스는 내사산을 따라 4개 코스(백악, 낙산, 목멱, 인왕)로 구성되며, 매주 2개 코스가 동시에 운영됩니다. 출발장소는 도성의 안과 밖을 연결했던 성문 앞이고, 한양도성 스탬프도 찍을 수 있습니다. 완주자에게는 기념 배지가 제공됩니다. 


▲ 스탬프투어 홍보물


해설은 한양도성 안내해설 자원활동가인 ‘서울KYC 도성길라잡이’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도성길라잡이’는 도성을 찾는 시민들에게 서울 한양도성의 역사와 내력에 대해 해설을 하는 자원활동가들로 2008년부터 한양도성을 안내하고 있습니다.투어신청은 사전예약제로 실시하며, 참가비용은 무료입니다. 접수는 서울시 한양도성 홈페이지(http://seoulcitywall.seoul.go.kr)와 종로구청 역사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jongno.go.kr/tourMain.do)를 이용하면 됩니다.  매주 선착순으로 160명을 모집하고,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참여 가능합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를 즐겨보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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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미있는 좋은 정보감사합니다

    2015.08.27 18:12 [ ADDR : EDIT/ DEL : REPLY ]
  2. 스탬프 투어로 흥미를 가질 수 있다는게 정말 좋은 아이디어내요!

    2015.08.27 19:10 [ ADDR : EDIT/ DEL : REPLY ]
  3. 사과국수

    잊고 있었는데, 올 가을에는 꼭 한번 참여해봐야겠습니다.

    2015.08.27 19:16 [ ADDR : EDIT/ DEL : REPLY ]
  4. 별빛페넥여우

    참~ 즐거운 아이디어네요^^ 여행이 특별하고 기억에 오래남을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2015.08.27 20:00 [ ADDR : EDIT/ DEL : REPLY ]
  5. 여름방학을 알차게보내셨네요^^

    2015.08.27 21:19 [ ADDR : EDIT/ DEL : REPLY ]
  6. 씨앗님

    재미있고 의미있는 프로그램이네요!

    2015.08.27 21:32 [ ADDR : EDIT/ DEL : REPLY ]
  7. 스탬프투어에 욕심이 생기네요

    2015.08.27 22:2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8. 좋은 정보네요

    2015.09.10 15:45 [ ADDR : EDIT/ DEL : REPLY ]
  9. sysea47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2015.09.11 22:40 [ ADDR : EDIT/ DEL : REPLY ]
  10. G Pro

    잘 봤습니다!

    2015.09.16 11:45 [ ADDR : EDIT/ DEL : REPLY ]
  11. 재미있을꺼 같아요.

    2015.09.16 13:45 [ ADDR : EDIT/ DEL : REPLY ]
  12. urbanpark

    서울 살면서 한 번도 못해봤네요... 이번 주말에 시간 내서 해봐야겠어요!^^

    2015.10.10 01:50 [ ADDR : EDIT/ DEL : REPLY ]

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 둥 살 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 신도 완성 추측도(출처: 계룡시)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 데다 큰 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그제야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 무악 지도(출처: 서울시편찬위원회)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 도성 성곽(출처:서울시)



전설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다음 해 ‘도성축조도감’이 시작됐고 그 다음 해(1396)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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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가 정국을 달군 적이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의 뜨거운 쟁점이었으며, 이것이 ‘수도’ 서울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된 끝에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관습상의 수도’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관습상’ 수도는 고조선 이래 수도였던 평양이나 천년 신라의 고향인 경주가 돼야 하지 않는가 따위의 의문은 들지만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할 수 있는 얘기는 당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은 이 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강고한 의식을 드러낸 실례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집착(?)은 심지어 북한 정권에서도 보인다. 북한 정권 역시 1948년 제정된 그들의 헌법상 명기된 수도는 그들이 정권을 휘두르던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이다. 그게 고쳐져서 평양을 수도로 한 건 1972년 12월, 그 이전까지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던 수도 역시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셔블’이 되고 ‘서울’이라는 이름에 이른, ‘수도’(首都)의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서울’이 한강을 끼고 북악을 머리에 인 오늘날의 서울이 된 것은 불과 600여 년 전이었다. 1994년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성대하게 치렀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619년째다,  그리고 이 역사를 만든 건 조선 태조 이성계였다.  




▲ 태조 이성계 초상(http://encykorea.aks.ac.kr/ 어진박물관)



조선 왕조가 탄생한 것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으로부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받은 (또는 빼앗은) 날로부터 시작했다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여전히 이성계는 ‘고려’의 왕이었고 그 수도는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개경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오백년 도읍지’의 개경. 


아마 요즘의 ‘관습 헌법’이상으로 개경을 서울로 여기는 관념이 강력했고 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성계를 동북면 시골뜨기 취급하거나 왕씨 고려를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 태조는 천도를 결심한다. 




▲ 한양도성 배치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성계의 마음은 꽤 급했던 것 같다. 용상에 앉은 지 달포도 안돼 천도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 언급한 장소는 고려 왕조 시절 남경이었던 한양. 북으로 북악산, 동으로 지금의 동대문 근처 낙산, 남으로 용산 지역까지를 망라했던 이 한양 땅은 문종, 숙종, 충선왕 등 고려 왕들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곳이기도 했다. 이 일대에 남경이 설치된 것은 까마득히 옛날인 고려 중기 때부터였으며 공양왕은 실제로 이 지역에 천도를 시도한 바 있었다. “송도 왕씨 다음은 한양 이씨”라는 도참설은 이미 까마득히 옛날의 무신 정권 시절부터 집권자 이의방이나 이의민을 들뜨게 했었거니와 실제로 나라를 얻은 이성계가 천도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남경이 설치된 지 200년 가까이 됐으니 건물이나 도로 등 기본적인 도시 기반이 갖춰져 있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천도 의사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판중추부사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반대론의 일부를 들어보자. “신 등이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새 도읍으로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도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흔히 듣는 변명 중의 하나로 “내 사적 이익을 떠난 공익적으로” 반대한다는 논리이지만 우리는 그 변명이 대개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하물며 송도에 토지와 집이 있는 사람은 남은만이 아니었다. 개국공신 가운데에도 개경에서 태를 묻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생활 근거지 또한 개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도라니. “내 재산과 토지 때문이 아니오라.....”를 내세워 반대할 밖에. 그러나 태조의 마음은 달랐다. 


이후 불거지는 새로운 도읍 결정 과정에서 나온 푸념이긴 하나 이성계는 이렇게 대신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을 명문세가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를 내 어이 모르겠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중지시키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천도 과정은 시행착오와 번복과 재번복의 연속이었다. 즉위한 다음 해에 풍수도참에 능하다는 권중화라는 이가 계룡산 지역의 신도읍지도를 만들어 바쳤고 이성계는 이에 마치 사랑에 눈먼 남자처럼 다급하게 대처한다. 임금의 부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핑계로 계룡산 남하를 만류하던 신하들을 무시하고 계룡산에 이른 이성계는 수도를 그리로 정하고 필요한 공사 건설을 지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 태조 이성계의 속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너무나 부실하게 장만된 것이 문제였다, 지역의 입지나 교통의 문제, 조세 징수의 편리함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신하들의 의견 공유도 없이 일단 땅부터 파고 봤던 일종의 14세기판 불도저 정책이었다. 주변 백성들도 죽을 맛이었다. 계룡산이 있는 충청도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인근의 타도 사람들도 징발돼서 난데없이 계룡산 자락에 모여들었고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는 인적 물적 자원의 주요 징발 대상으로 부상한다.  




▲터만 남은 계룡산 주초석(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계룡산 공사는 강행됐다.  고역에 못이긴 사람들이 탈주를 감행하고 그들을 잡는 대로 목을 치면서도 궁궐의 기초를 다지고 성벽이 들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 수도 건설을 밀어붙이던 이성계는 10개월 뒤 한 장의 상소문을 받는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것이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풍수를 고증해보면 물길의 방향이 좋지 못하옵니다.” 하륜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감탄한 태조는 계룡산의 도성 공사를 중단시켜 버린다. “이곳이 아닌갑다.” 류의 돌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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