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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25 한강다리 6편 (1)

 


▲ 출판사 이소북

 

 

1966년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남해안 통영에서 찢어지는 가난으로부터 도망 나와 서울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길녀’, 그리고 그녀의 친구미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유례없는 인구 집중 거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헤집어 놨던 소설이었다. 이때 작가가만원이라고 불렀던 서울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380만 명이었다. 천만 인구를 상회한다는 요즘에 비추면 애걔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서울의 도시 인프라는 그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여러 곳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3한강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드넓은 한강에 다리는 단 세 개였다. 1한강, 2한강교, 그리고 광진교. 인구는 늘고 차량도 증가했고 강남과 강북 사이의 물동량도 커졌는데 다리 세 개로 그것들을 소화하기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걱정거리는 더 있었다. 6.25때 서울 인구는 1백만이었는데 <서울은 만원이다>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즈음의 인구는 거의 네 배로 불어나 있었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이 인구를 어떻게 피난시켜야 하는가는 그저 노파심이 아닌 식은땀이 날 정도로 막막하고 두려운 질문이었다. 그나마 제2한강교는 전쟁이 터지면 군용으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1966 1 19일 또 하나의 한강다리를 놓는 공사가 시작됐다. 3한강교였다.


 

 

1966년 한강대교 공사 모습(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런데 서울 시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 1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 7천여 명. 원래 조선 시대 내내 이 일대는 경기도 광주부에 속했고 서울시에 편입된 뒤에도 배밭과 채소밭이 가득하여 서울 시민들의 채소, 과일 공급지였던 곳이었다. “강북 사람들 똥을 가져다가 농사를 짓던시골이었다.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어서 그저영등포의 동쪽 동네라는 뜻으로영동이라고 불리던 곳에 제3한강교가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북한이 자주 보이는 이른바못사는 집의 자존심때문에 혀를 찰 때가 많지만 제3한강교 공사가 시작될 무렵에는 남한이 북한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3한강교 공사가 시작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건설부에서 갑자기 황망한 지시가 내려왔다. “당초 설계된 왕복 4차로( 20m)를 왕복 6차로( 26m)로 확장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차량 수가 27천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6차로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평양에 놓고 있는 다리의 폭이 25m이므로 우리는 그보다 1m는 더 넓어야 된다.” 훗날 남한의 63빌딩에 자극 받아 100층이 넘는 류경호텔을 지으려다가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북한의 유치함은 제3한강교 건설 당시에는 남한 쪽이 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3한강교 공사 기간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번 있었다. 우선 1968 1 21일 북한의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간 사건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전쟁의 공포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고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죄로 이승복 소년은 공비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제3한강교의 운명 뿐 아니라 서울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일이 1968 2 1일 일어났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것이다. 그 고속도로는 제 3한강교와 연결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로써 제3한강교는서울 시민 유사시 피난용 다리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으로 그 위상이 급상승하게 된다. 3한강교는 1969년 완공됐고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의 역사에는 굵직한 두 글자가 부상하게 된다. ‘강남’ (江南)

 

 

 


▲ 공무원 아파트 건설(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강남 지역의 땅값의 추이를 보면 우리는 제3한강교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단하게 알게 된다. “1963 63 3.3㎡당 300~400원 하던 압구정동과 신사동 일대의 땅값은 66년 제3한강교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꿈틀대기 시작해 67년에 1000원을 넘어섰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70년에는 단번에 1~15000원으로 폭등했다. 특히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땅값 폭등을 부추겼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작되는 말죽거리에 복덕방촌이 형성됐는데 이 때문에 강남땅값 폭등 현상을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2011.1.10 경향신문) 여기에 당국 또한 강남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공기관 이전, 학교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이전, 유흥업소 강남 이전시 취득세 감면,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한 압구정반포청담도곡동 일대 아파트 지구 신설” (위 신문 기사 중) 등 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강북은 묶고 강남은 푸는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 개발중인 한남 (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러나 여기에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깃들어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을 보면 1971 4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가 1970년 강남의 토지를 사고 팔아 수십억 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바친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윤진우는 당시 실세였던 경호실장 박종규에게 불려가가장 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의 땅을 사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육군 헬기를 타고 과천에서 송파까지 둘러본 그는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의 강남구 일대를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으로 지목했다. 이윽고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자금은 이 일대의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강남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그 땅값이 오르면 다시 되파는, 전형적인 복부인의 수법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돈벌이를 돈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외면할 리가 없었다. 곧 돈과 사람의 거대한 물결이 제3한강교를 건너 강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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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rpenguin

    위의 사진은 '제3한강교'가 아닌 '한강대교' 노량진 방향!

    2015.06.25 12:3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