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수도이며 조선왕조의 초석이 되었던 전주 한옥마을과 주변 문화 유적지를 지난 9월 19일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이 방문했습니다. 친절했던 문화해설사분의 안내로 탐방이 이뤄졌는데요.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전주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1930년을 전후로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마을을 만들어 나간 것이 그 시작점이라고 합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정신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우리의 선조들이 한옥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전주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도심 속에 700여 채의 한옥군락이 형성된 도시로 알려질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했던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할아버지인 목조대왕 이안사가 태어나 살았던 곳으로 전주 이씨의 발상지입니다. 결과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는 조선의 근본이 된 땅이자 나라를 건국한 근원지였던 것인데요. 오목대는 이안사가 풍광을 즐기며 노닐던 곳이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이곳에 들러 전승 축하 잔치를 벌인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목대와 오목대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목대 탐방로에는 500년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전주 한옥마을은 자신의 문화와 향기를 지켜낸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마을이라는 의미인 국제 슬로시티 인증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를 담고있는 표석입니다. 이 경기전 앞 하마비는 암수 한쌍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이고, 웅장하고 품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태종 10년에 건립한 경기전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입니다. 백성들에게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었고, 왕씨에서 이씨로 임금의 성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국 여섯 개의 도시(평양, 경주, 개경, 한양, 영흥, 전주)에 어진을 모셨다고 합니다. 태종 때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는데, '경사스러운 이 땅에 임금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경기전으로 세종대왕이 개명했다고 합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 시대에는 집을 지을 때 규제가 엄격했다고 하는데요. 지름 50cm인 둥근 '두리기둥'은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리기둥이 많은 경기전은 단순한 사당의 개념이 아닌 왕이 사는 궁궐을 의미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두리기둥 밑에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은 구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공간부터는 천상으로 이어지는 의미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진전이 피해를 입었는데요. 그러나 경기전 어진은 전쟁 중에도 전주의 많은 선비들이 7년동안 정읍의 내장산에서부터 북한에 있는 묘향산까지 이동하며 끝까지 지켜냈고, 현재는 국보 제317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전국 4대 사고(전주, 충주, 성주, 서울)에 똑같은 복사본을 보관했는데, 왜군이 모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그 이유는 역시 전주의 선비들이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어진과 실록을 목숨걸고 지키려 노력했던 결과라고 합니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분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태조의 60세 때 모습이며, 27개가 그려졌지만 현재 전주 어진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진은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사람만의 분위기를 잘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3명의 화가가 함께 궁궐에서 생활하며 정숙한 마음으로 길일에만 조금씩 태조의 어진을 그려나갔다고 하는데요. 3개 조로 나눠 어진을 그렸고, 그 중 가장 실력 좋은 사람이 얼굴을 그렸다고 합니다.



어진은 기름종이로 본을 떠 비단에 옮겨 그렸는데요. 비단 뒷면에 색을 칠하는데, 한올씩 비단에 색을 넣기 대문에 오랜 시간 동안 그렸다고 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채색법은 우리만의 독특한 초상화 화법으로 '배채법'이라고 합니다. 어진을 그렸을 당시에는 포토샵과 같은 컴퓨터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태조의 어진에서 곤룡포가 파란색인 이유는 조선의 건국자라는 의미, 즉 시작의 의미를 표현한 색이라고 합니다. 다른 임금들은 모두 빨간색을 입었는데 태조만 파란색의 곤룡포를 입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조선 시대의 왕들은 매미의 5가지 장점을 닮아야 좋은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매미 모양의 모자인 익선관을 쓰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매미를 가장 고고하고 신령한 곤충으로 생각해 최고의 지덕을 가진 곤충이라고 예찬했다. 문(文), 청(淸), 염(廉), 검(儉), 신(信)은 매미의 다섯 가지 덕목인데, 왕이 정사를 보기 위해 모자를 쓸 때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만 했다. 오덕의 교훈은 매미의 입이 마치 선비의 갓끈과 같이 곧게 뻗은 것처럼 왕은 배우고 익혀 선정을 베풀어야 하며, 매미가 이슬이나 나무진을 먹고 사는 것처럼 청결해야 하고, 농부가 가꾼 곡식이나 채소를 해치지 않는 것처럼 청렴해야 하며, 다른 곤충과 달리 집이 없는 것을 본받아 검소해야 하며, 늦가을이 되면 때를 맞춰 죽을 정도로 절도를 지키는 것을 배워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익선관의 교훈』, 최요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서울에서 전주까지 가마를 타고 왔는데, 이를 '어진 가마'라 한다고 합니다. 임금님이 행차하듯 어진도 똑같이 200~300여 명이 8일 동안 모셔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어진을 옮길 때 평상시에는 가마를 타지만, 임진왜란과 같은 유사시에는 '흑장통'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어진을 말아서 옮겨다니며 피난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인데요. 조선왕조 519년 동안 27분의 어진을 그렸지만 현존하지 않고, 어진박물관에 전시된 것만 남아있습니다. 즉, 우리가 알고있는 세종대왕의 모습은 추상화인 셈이지요.









전동성당은 1908년에 땅을 사서 1931년 까지 지은 건물이며, 호남 최초의 서양식 근대 건물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비잔틴 양식이 가미된 것인데요. 이곳에 성당을 지은 이유는 신해박해 때 윤지충, 권상현이 처형을 당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통해 윤지충, 권상혁 두 순교자는 복자가 됐습니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신부의 작품인데요. 마치 엄마의 자궁 속처럼 신비롭고 편안하며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무형문화재 한지발장 명인인 '유배근'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한지만들기 체험을 했는데요. 꽃잎 등 재료를 고르고, 닥나무 물을 양쪽으로 흔들어 평평하게 만든 뒤 물기를 빼줍니다. 그 위에 재료들로 꾸미기를 하고 다시 닥나무 물을 평평하게 펴서 올려준 다음, 꾸민 한지 위에 붙여줍니다. 물기를 말린 후 철판 위에서 천천히 말리면 한지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지만들기 체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한 황실 '승광재'가 있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이었는데요. 한지 만들기 체험을 기다리며 한 번 방문하고, 이후에 다시 한 번 방문해봤습니다.  비록 이석 할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승광재를 조용히 둘러볼 수 있었는데요. 예전에 TV에서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도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승광재 입구에 있는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강의 제목을 보며 아픈 역사의 산 증인이신 이석 할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역사를 아직은 잘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집안의 큰 어르신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는데요.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면 세상을 보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을 부모님께 자주 들었습니다. 승광재를 방문한 이후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될 수있었습니다.









울에 위치한 북촌 한옥마을은 도시와는 다른 평안함을 주는 곳이라 가족과 함께 자주 방문했던 곳입니다. 북촌 한옥마을과는 다른 모습의 작은 시골 마을일 것이라 생각하며 방문했던 전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문화 유적지이자 힐링의 공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었는데요.



특별히 많은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천천히 한옥마을 주변을 걸어다니거나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즐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국제 슬로시티라는 말의 의미가 더욱 와닿았는데요.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키려는 피나는 노력과, 나를 빼앗겼지만 정신마저 빼앗기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한옥마을을 만든 전주 선조들의 애국심에 큰 감동을 받았던 탐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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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전주 한옥마을 탐방과 함께 한지만들기 체험을 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은 이목대와 오목대였는데요. 태조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토벌한 뒤 이곳 오목대에서 개선잔치를 하며 새 나라를 만들겠다는 뜻을 다졌다고 합니다. 






▲ 오목대에서 바라 본 전주 한옥마을 풍경





그리고 이목대와 오목대의 가운데 글자인 '목'자는 목조대왕의 '목'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목대와 오목대는 서로 떨어져 있어 다리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전주 이씨의 맥을 없앤다고 연결된 길을 잘라 지금은 육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목대는 자만마을이라고도 하며 자손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면 번영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목조대왕구거유지'라고 고종이 직접 쓴 비석도 남아있습니다. 






▲ 500년된 당산나무






그리고나서 전주 한옥마을의 500년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를 보러 갔습니다. 당산나무는 주로 팽나무와 느티나무를 쓰며,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합니다.



당산나무 앞에서 전주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한옥마을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인데, 나라를 망했지만 이 마을에는 일본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한옥을 한 채씩 만들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에 한창 아파트가 유행하고 있을 때에도 전주 한옥마을은 개발을 하지 않아 지금의 모습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700여 채의 한옥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제 슬로우시티로 지정돼 있습니다.






▲ 하마비





다음으로 조선 왕조를 건립한 것을 기념해 전주에 세웠다는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기전으로 갔는데 경기전 앞에 하마비라는 비석이 떡하니 서있었습니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태조가 있으니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고 세워둔 비석이 바로 하마비인 것이지요. 



경기전의 하마비가 일반적인 하마비와 비교했을 때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암수 두마리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라고 합니다. 경기전으로 들어가면서 두리기둥을 봤는데, 역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라 그런지 기둥하나도 궁궐의 양식이었습니다.






▲ 태조 이성계 어진





왕의 초상을 어진이라고 해서 어진전이라고도 불렸지만, 태종이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줬다고 합니다. 어진전은 전주 외에도 개경, 평양, 한양, 경주에도 있었지만 경기전만 남았고, 원래 태조의 어진을 27개 그렸지만 지금은 딱 하나가 남았다고 합니다. 이 어진은 13명의 화가가 나눠서 그렸는데,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이 얼굴을 담당했다고 하며, 어진을 그릴 때는 비단을 사용한 배채화 기법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 영화에 나온 대나무 숲





문 옆에는 수복청이라고 제사상을 준비하는 건물이 있었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매화나무가 있었습니다. 매화나무는 호문목이라고 하는데 선비가 글을 읽는 것을 듣고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전 안에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이 대나무 숲은 '왕이 된 남자'라는 드라마와 '역린'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던 유명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 전주사고





또한, 경기전 안에는 세종 21년에 설치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전주사고가 있었는데,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임진왜란 때 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조가 전주사고의 실록을 보고 4개의 사본을 더 만들었지만, 현재는 2개만이 남아있다네요.



조경묘는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이성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옆에는 어진을 소장한 어진박물관도 있었는데, 이곳에는 어진을 옮길 때 쓰던 가마가 있었습니다. 엄청 길고 넓었던 가마였는데 이 가마를 신연이라 한다고 합니다. 어진은 피난을 갈 때에도 행렬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옮기기가 힘들다고 하며, 어진을 모신 건물의 정자각 돌추부에는 화재막이용 거북이 암수가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한지를 만들러 갔습니다.






한지만들기 체험 모습





한지를 만드는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한지 틀을 이용해 닥나무물을 넣고 흔들어 한지의 기본 틀을 만듭니다. 그리고 틀 안에 있는 재료를 부직포 위에 올려놓은 후 원하는 꽃을 이용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꾸며줍니다. 다시 한 번 앞의 과정을 반복한 뒤, 꾸며둔 한지를 다시 만든 한 겹의 한지로 덮어줍니다. 그 다음에 부직포를 기계로 탈수시킨 뒤 뜨거울 철판 위에 올려 말려주면 우리나라의 전통 한지가 완성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지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신 선생님이 무형문화재에 등록된 한지발장 유배근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전주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전란 속에서도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켜냈던 애국심과 국제 슬로우시티로 지정된 전주의 모습이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끝으로, 자유시간을 활용해 고종 황제의 손자인 황손 이석 할아버지를 만나뵀는데요. 짧게 인터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석 할아버지 인터뷰>






▲ 이석 할아버지와 어린이 기자

 




어린이 기자 :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시고, 몇 번째 자손이신가요?


이석 할아버지 : 아버지는 의친왕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기골이 장대해 조선 왕실의 대를 잇기 위해 많은 자손을 두셨는데, 저는 11번째 아들이랍니다.


어린이 기자 :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좋아하는 왕은 어떤 분이신가요?


이석 할아버지 : 세종대왕님을 가장 좋아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만드셨기 때문인데요. 그리고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저와 효령대군의 얼굴을 합쳐 만든 것입니다.


어린이 기자 : 미래의 어린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이석 할아버지 :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은 역사를 소중히 생각해 역사 제대로 알기를 꼭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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