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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5 대한민국 고층건물의 역사 1편 (1)


인간이 집이라는 것을 짓고 건물을 세우기 시작한 이래, 망치를 휘두르고 못을 박으며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이후 “더 높은 곳을 향하여”는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한 욕망이었다. 하늘을 향해 쌓아 올리려다 그만 신의 벌을 받아 그때까지 함께 쓰던 언어가 통하지 않게 됐다는 바벨탑의 전설이나 지금도 이집트의 사막에 버티고 선 대(大) 피라미드들을 보면 그 뜨거울 소망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마을과 마을, 나라와 나라는 보다 높은 건축물들을 짓는 경쟁을 자주 벌였고 그 유산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 황룡사 9층탑 모형(출처: http://bit.ly/1cQkRL3)


고층 건물과는 별 인연이 없어 뵈는 것 같지만 우리나라에도 고층 건물을 지을 역량은 충분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은 볼 수 없는 황룡사 9층탑이 되겠다. 황룡사는 불국사의 8배나 큰 규모였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절 마당에는 또 9층으로 된 목탑 (말이 탑이지 이 황목조 9층 건물에 가까운)이 있었다. 한창 삼국 통일의 꿈을 키워가던 패기만만한 신라는 9층마다 나라의 이름을 쓰고 탑이 완성되면 그들이 다 신라에 조공을 올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렇게 수백 년을 버티며 경주 하늘을 찌르던 황룡사 9층탑에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고려 중기 몽골의 침략군이 경주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목탑에 불을 질렀다. 황룡사 목탑은 며칠 동안 불타며 경주 백성들의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 



▲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출처: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황룡사가 불타 없어진 이후 700여 년간 그 일대는 폐허가 된 채 무심한 후세들이 일구는 논밭과 집들로 뒤덮여 갔다. 그러던 중 1964년 마을을 철거하고 황룡사지 발굴을 시작해 많은 유물을 발굴하는 와중에 사리구를 간직했음직한 심초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사리구는 없었다. 적잖은 실망을 했지만 2년 후 또 다른 기쁨이 찾아왔다. 발굴 당시의 조사위원이었던 황수영 박사는 누군가로부터 진귀한 물건을 감정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도중 그만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잃어버렸던 사리구였던 것이다. 이 사리함에는 황룡사 9층탑의 규모가 자세하게 적힌 글이라 할 <찰주본기>가 적혀 있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황룡사 목층탑의 높이는 무려 80미터. 오늘날 30층 아파트와 맞먹는 규모였다. 비록 신라 땅에 세워졌지만 백제 기술자에 의해 세워진 것이니 백제에도 유사한 기술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하늘을 찌르는 탑과 건물들을 이 나라 곳곳에 세우고 있었을 터. 


그 이후 우리나라의 고층 빌딩의 역사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높이보다는 넓이를 추구했다고나 할까. ‘아흔 아홉 칸 집’을 자랑하긴 해도 아흔아홉 자 높이를 자랑하는 건물은 없었다. 복층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 이후였고 ‘고래등’같은 기와집만 부러워하던 한국인들은 하늘 향해 우뚝 서서 두 팔 벌린 듯 몇 층씩 쌓아 올리던 외국 공사관이며 성당이며 집들을 바라보며 경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고층 빌딩이 들어선 것은 한창 고속 성장을 누리던 1970년에 이르러서였다



 ▲ 삼일빌딩(출처: http://bit.ly/1c8q66Z)



김두식 회장이 설립한 삼미그룹의 모태인 대일목재공업이 1968년 사옥건물로 쓸 삼일빌딩을 짓기 시작해 1970년 완공한 것이다. 건물의 설계자는 서강대 본관, 프랑스 대사관,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 김중업이었다. 건물을 31층으로 한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3.1절의 의미도 개입되었다고 하는데 청계천변에 우람하게 선 삼일빌딩은 일대 장안의 화제가 된다. 시골 촌로들이나 꼬마들이 삼일빌딩 앞에 서서 그 층 수를 세는 모습은 흔했고 박정희 대통령도 즐겨 삼일빌딩 스카이라운지를 찾아 자신의 통치 아래 시시각각 변해 가는 서울의 모습을 굽어봤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작 건축가 김중업은 삼일빌딩의 설계비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31층의 높이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빔을 뚫고 닥트를 배열하여 날씬하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끝내는 설계비조차 받지 못하고, 또한 엄청난 세금에 밀려 성북동 집까지 잃게 되었다. 이로 하여 급기야는 프랑스로 떠나야만 했으니 그 비운의 씨를 뿌린 장본이 바로 삼일로 빌딩이었다.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중)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꼬장꼬장한 건축가였던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불도저 시장 김현옥 물러가라!”를 외쳤고 청계천 빈민들을 아무 대책 없이 경기도 광주 단지에 수용한 상황에서 광주대단지 폭동이 일어나자 역시 시장 양택식을 격하게 비판했다. 이 시절 정부에게 그렇게 댓거리를 한 사람 치고 무사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무지막지한 세금을 두드려 맞고 프랑스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한때 서울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삼일빌딩은 현재 외국 기업의 소유다. 경영난에 몰린 삼미그룹이 1985년 삼일빌딩을 산업은행에 매각했고 2001년 산업은행은 502억 원을 받고 홍콩에 주소를 둔 스몰록인베스트먼트컴퍼니리미티드란 회사에 다시 팔았던 것이다. 이미 그에 필적하는 고층 건물들이 여럿 들어차 버렸기에 한때의 랜드마크이자 무려 16년 동안이나 서울 최고층을 지키던 삼일빌딩의 위용은 이미 옛날 얘기지만 그 검고도 날렵한 건물의 소유자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약간 씁쓸해지는 일이다. 우리의 역사 하나가 넘어간 느낌이랄까.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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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휴...그걸 왜 홍콩의 회사에 넘겨가지고!!
    제발 다시 우리것의 소유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2014.10.25 18:4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