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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23 [간척시리즈] 2편 - 서산


간척은 땅을 얻는 대신 갯벌을 잃는다. 1992년 전국 1호로 쌀 품질을 인증받은 ‘계화미’는 간척사업의 소산이었지만 원래의 갯벌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과 풍요로운 수산 자원들은 그 덕분에 사라졌다. 또한 거기에 식구들의 끼니를 기대고 살던 수많은 사람들 역시 눈물을 삼키며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좁은 국토와 많은 인구”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의 트라우마, 그리고 개발의 성과와 그를 통한 이익 창출이라는 장밋빛 전망은 일제 시대 이후 서남해안 곳곳의 지도를 바꿔 놓았다. 이 간척 사업의 성패와 이해(利害)를 떠나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또 잊을 수 없는 굵직한 추억을 남긴 곳을 들자면 충남 서산일 것이다. 




▲ 서산마애삼존불(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서산은 예로부터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미소’라 일컬어지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사비에서 바다로 나가는 경로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으로 가는 백제의 사신과 상인들은 멀고 험한 바닷길을 나서기 전 마애삼존불 앞에서 합장하며 자기 자신과 일행의 안위를 빌었는지도 모른다. 기실 서산 앞바다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할 만한 곳이었다.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해미읍성에서 보듯 바다로부터의 침략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무서운 건 서산, 태안 일대의 험한 바다였다. 삼국 시대 이래 헤아릴 수 없는 배들이 서산 앞바다의 험한 물길에 그 수명을 다했던 것이다. 



충청남도 안면도는 과거 색다른 지명으로 불렸다. “쌀썩은여”. 

이 기이하고 생경한 이름에는 바로 서산(태안) 앞바다의 무서움을 증명하는 사실이 숨어 있다. 영호남에서 세미(稅米)로 거둬들인 쌀들을 가득 싣고 서울로 향하던 조운선들이 이 일대의 강한 조류에 휘말리거나 암초에 부딪쳐 수도 없이 침몰했고 거기에 실린 쌀들이 바다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데에서 나온 지명이었던 것이다. 


얼핏 이 ‘쌀썩은여’에서 일어난 주요 사고만 봐도, 태조 4년(1395년)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했고, 태종 14년(1414년)에 전라도 조운선이 무려 66척이나 가라앉아 200여 명의 생목숨이 물에 묻혔으며 5천800석의 세곡이 바닷물 속에서 썩는 신세가 됐다. 그 이후로도 사고는 끊이지 않아 이곳은 난행량(難行梁-지나기 어려운 바다)라고 불렸다. 

세조 때 이걸(安行梁)으로 바꿔 봤지만 이름 바꾼다고 팔자 바뀌는 것이 아니기는 사람이나 바다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안면도가 섬이 된 것은 이 참극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발버둥친 조상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이 위험한 ‘안행량’을 피하기 위해 고려 시대부터 운하를 팠고 마침내 인조 대에 공사를 성공시켜 육지와 안행량 사이의 수로를 뚫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 안면도는 이때부터 ‘섬’이 됐다.


이 험한 바다를 끼고 있는 서산에는 또 하나 특이한 이름의 지명이 존재한다. ‘부석면’ (浮石面)이다. 이는 경북 영주의 유명한 고찰 부석사에 등장하는 부석(浮石)과 동일한 이름이며 유사한 전설에 휘감겨 있다. 의상 대사가 서산 부석면 도비산에 절을 지으려 하자 동네 사람들이 방해했고 의상을 사모했던 당나라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신하여 큰 돌을 허공에 띄워 위협하여 동네 사람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경북 영주의 부석(浮石)은 부석사 경내에 남아 있는데 반해 충남 서산의 부석은 바다 위에 뜬 채로 절 공사를 지켜보았다고 한다.



▲안면도 (출처: http://encykorea.aks.ac.kr)



실제로 부석면 앞바다에는 ‘검은여’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만조 때에도 그 윗부분은 완연히 드러나 있어 문제의 ‘부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석에는 또 다른 전설 하나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 부석은 ‘쌀 위에 있는 부석’으로서 ‘그 아래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흘 동안 먹을 곡식이 잠겨 있다’는 것이다. (서산민속지- 서산문화원, 1991)


 전설은 전설일 뿐이지만 왠지 의미심장한 예언 같기도 하다. 실제로 간척 사업이 벌어질 때 서산 앞바다의 물살은 수십 톤짜리 바위도 둥둥 떠내려 보낼 정도였으니 이는 곧 떠다니는 돌, 즉 부석(浮石)이었을 것이요, 간척 사업이 마무리된 뒤 엄청난 농토가 생겨나 비행기로 농약을 뿌려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석 밑에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가 사흘 먹을 곡식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현실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험한 물길의 대명사였던 서산의 톱니같은 해안을 간척으로 바꿔 보겠다는 꿍심을 품은 것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일제 시대 현장사무소까지 차리고 간척사업을 진행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돌을 띄우는” 강한 조류와 조수간만의 차는 끈질긴 일본인들조차 두 손을 들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 설정된 서산 간척지 A,B 지구는 그 후로도 오랫 동안 고스란히 미간척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땅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주한미군 개발처’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기술진까지 초빙한 가운데 간척 사업을 벌여 ‘보리 11만석 쌀 36만 석 등 90억환의 수입을 올릴 예정’(동아일보 1962년 1월 15일자)이라는 등 서산 간척 사업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서산 간척 사업을 경제개발 2차 5개년 계획의 주요 사업으로 다룰 것을 지시한다. (동아일보 1965년 10월 9일자) 



 

▲ 서산 간척지A지구(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러나 일본인 대신 한국인이 간척을 한다고 해서 물살이 느려지거나 조수간만의 차가 줄어들 리는 없었다. 공사를 담당한 농업진흥공사는 7억 3천여만원을 쏟아 부어 가까스로 300미터의 방조제를 설치했지만 그 이상의 여력은 없었다. 그로부터 무려 13년간 공사는 중단됐고 방조제는 방치됐다. ‘부석’은 여전히 거센 물살 위에 떠 있었고 바다를 옥토로 만들겠다는 꿈은 망상으로 치부됐다. 이 서산 앞바다에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것은 1978년이었다. 


“정부는 내년부터 총규모 4조 4천 8백억원을 투입, 63만 5천 ha의 국토를 확장하고 59만 6천 ha의 새로운 농토를 조성하는 서남해안 59개 지구 대규모 간척농지개발계획안을 마련, 그 전모를 발표했다.” (경향신문 1978년 8월 19일자) 여기에 따르면 정부는 “1천억씩을 쏟아부어도 45년이 걸리는 바, 정부의 재정형편상 단독개발이 어렵고 민간대기업의 대대적인 참여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후일 90년대의 현대건설을 이끌게 되는 이내흔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호출을 받는다. 


 “서산간척 사업을 시작하니 준비하라.”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