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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15 한강다리 4편


노래 가사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수은등이 손짓하는 제2한강교 / 오작교 사연 싣고 강물은 굽이친다/ 

한 많은 백사장아 봄을 묻지 마라. 

아아 오늘도 기다리네. /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 견우성이 눈물짓는 제2한강교/ 

보라는 발자욱에 세월은 흘러간다. 

노 잃은 뱃사공아 한을 품지 마라 / 아아 불빛이 흔들리네 /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 


 


▲ 제2한강교(양화대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김세레나의 1966년 앨범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2한강교 건설의 첫 삽이 떠진 것은 1962년, 완공은 1965년이었다. 한강인도교가 완공된 것이 1917년이었으니 (광진교를 제외하면) 거의 반세기만에 새로운 다리가 한강에 걸쳐진 것이었다. 제2한강교는 영등포 당산동과 마포 합정동을 잇는 다리였고 오늘날의 양화대교다. 



 

 

 

▲ 절두산 / 양화진 외국인 묘지(출처: 민족문화백과사전/양화진외국인서교사묘원)



이 일대에는 서울 지역 한강의 3대 나루터라 할 양화진이 있었다. 수운(水運)을 통해 바다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울에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했던 이 양화진은 역사적으로, 특히 근대 이후 간간히 그 존재를 드러낸다.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목 잘라 죽인 것이 오늘날의 ‘절두산’ 아래 양화 나루터 근처였고 그들을 처형하기 전 망나니들이 칼을 씻은 우물이 있던 곳이 오늘의 합정동이었다. 


조선의 개화를 꿈꾼 재기 넘치는 인물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당한 뒤 그 시신이 실려와 토막 났던 곳이 바로 양화진이었고 구한말 수운이 편리한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설치해 달라는 주한 외교사절들의 요청에 응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다. 그러니 김세레나 노래처럼 그 백사장에는 한도 많았을 것이고 나루터를 떠난 사공의 한숨 소리도 여전히 배어 있었을 것이다. 




 

▲ 서울 화력발전소(당인리 발전소)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합정동과 영등포 당산동을 잇는 제2한강교의 목적은 다양했다. 서울에서 김포공항이나 인천 방향으로 가려고 할 때, 또 당인리 화력 발전소에 물품을 실어 나르려고 할 때 등등 다리의 필요성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 포화상태의 제1한강교 교통량을 분산하고 영등포 등 도시 외곽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요긴한 다리였다. 


그러나 이 다리 건설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국방상의 것이었다. 평야지대로 인민군의 기갑 부대의 주요 공격 축선이 될 수 있는 서부전선, 즉 ‘문산 일대로의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 다리 건설의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한강다리 1백년 - 서울특별시)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이 다리는 오로지 군사용으로만 사용되게 못박혀 있었다. 즉 ‘유사시 군용 다리’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전쟁의 공포와 상흔은 그렇게 칼자국처럼 도시의 심장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 제2한강교 가설공사 (출처: e영상역사관 ehistory.korea.kr)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곧 도로를 까는 일이었다. 한강이야 임자가 없으니 맘대로 공사해서 도로를 놓으면 그만이지만 그 다리의 남안(南岸)과 북안의 땅은 거의 임자가 있었다. 아무리 관(官)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지만 다리 양쪽에 널린 사유지들을 수용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다. 


정부에서는 매입 단가를 평당 4천원 정도로 책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민들은 어림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세 배인 1만 2천원은 받아야 한다고 공론이 돌아갔고 역시 그 일대에 땅을 일부 소유하고 있던 한 회사의 총무부장은 주민들의 위세에 묻어가 한몫 수입을 올릴 생각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경영주에게 불려간다. 

“우리가 그 땅을 평당 얼마 주고 샀나?” 

“네? 평당 3원 주고 샀었지요. 생판 아무것도 없었을 땐데요.” 이 말을 하자마자 총무부장은 벼락같은 호통을 듣는다. 

“임자는 평당 3원에 산 것을 4000원에 가져가겠다는데 1300배의 이익을 취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라에서 필요하다는데 당장 서울시에 내주지 못하겠는가.” 


회사의 이름은 유한양행. 그리고 총무부장에게 호통을 친 회장의 존함은 유일한이었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또는 명성을 남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고 했던 그의 어록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유한양행은 “땅값인상 투쟁”에서 빠졌고 다른 지주들도 대충 그에 상응하는 액수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제2한강교는 지어지기 시작했고 공사 3년만인 1965년 1월 27일 완공됐다. 



이로써 서울 도심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거리는 4km, 시간은 20분 정도가 단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홍제동~신촌 구간의 도로가 개설되어 이 다리와 직결됨으로써 영등포~서부전선의 거리가 약 6km 정도 줄어들었으며, 시간도 48분이 단축되어 연간 3000만원 어치 가량의 휘발유가 절약되었다고 한다. <한국건설기네스(Ι)길> (이덕수 지음-도서출판 보성각 중) 


 


▲ 양화대교 개통식(출처: 희망서울)



또한 이 공사는 설계에서부터 준공까지 모든 과정을 오롯이 국내 기술진의 힘으로만 끝낸 최초의 다리였다. 그러다 보니 사연도 많고 기쁨도 컸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초보적 교량 건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특히 4~5차례에 걸친 홍수 피해로 공기가 지연돼 30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공기 단축을 위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를 무사히 완공시킨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경사였다. 다리 준공식에 토목계 원로 200여 명을 초청하였고 현대건설 무교동 사옥에서 대대적인 준공 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현대건설 60년사 중) 


그러고 보면 순수한 한국인의 돈과 힘만으로 한강을 가로지른 다리는 이 제2한강교가 처음이었다. 한강철교와 인도교와 광진교는 일본이 만들었고 끊어진 다리를 잇는 데에도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 님이 돌아오실’ 제2한강교와 함께.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