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 둥 살 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 신도 완성 추측도(출처: 계룡시)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 데다 큰 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그제야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 무악 지도(출처: 서울시편찬위원회)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 도성 성곽(출처:서울시)



전설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다음 해 ‘도성축조도감’이 시작됐고 그 다음 해(1396)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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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가 정국을 달군 적이 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의 뜨거운 쟁점이었으며, 이것이 ‘수도’ 서울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의 대상이 된 끝에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관습상의 수도’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관습상’ 수도는 고조선 이래 수도였던 평양이나 천년 신라의 고향인 경주가 돼야 하지 않는가 따위의 의문은 들지만 차치하고, 일단 확실히 할 수 있는 얘기는 당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은 이 나라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강고한 의식을 드러낸 실례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집착(?)은 심지어 북한 정권에서도 보인다. 북한 정권 역시 1948년 제정된 그들의 헌법상 명기된 수도는 그들이 정권을 휘두르던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던 것이다. 그게 고쳐져서 평양을 수도로 한 건 1972년 12월, 그 이전까지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던 수도 역시 평양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서울’이란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셔블’이 되고 ‘서울’이라는 이름에 이른, ‘수도’(首都)의 순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 ‘서울’이 한강을 끼고 북악을 머리에 인 오늘날의 서울이 된 것은 불과 600여 년 전이었다. 1994년 서울시가 ‘정도 600년’을 성대하게 치렀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619년째다,  그리고 이 역사를 만든 건 조선 태조 이성계였다.  




▲ 태조 이성계 초상(http://encykorea.aks.ac.kr/ 어진박물관)



조선 왕조가 탄생한 것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으로부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받은 (또는 빼앗은) 날로부터 시작했다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여전히 이성계는 ‘고려’의 왕이었고 그 수도는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개경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오백년 도읍지’의 개경. 


아마 요즘의 ‘관습 헌법’이상으로 개경을 서울로 여기는 관념이 강력했고 왕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성계를 동북면 시골뜨기 취급하거나 왕씨 고려를 추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서 태조는 천도를 결심한다. 




▲ 한양도성 배치도(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성계의 마음은 꽤 급했던 것 같다. 용상에 앉은 지 달포도 안돼 천도 얘기를 꺼내든 것이다. 이때 언급한 장소는 고려 왕조 시절 남경이었던 한양. 북으로 북악산, 동으로 지금의 동대문 근처 낙산, 남으로 용산 지역까지를 망라했던 이 한양 땅은 문종, 숙종, 충선왕 등 고려 왕들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곳이기도 했다. 이 일대에 남경이 설치된 것은 까마득히 옛날인 고려 중기 때부터였으며 공양왕은 실제로 이 지역에 천도를 시도한 바 있었다. “송도 왕씨 다음은 한양 이씨”라는 도참설은 이미 까마득히 옛날의 무신 정권 시절부터 집권자 이의방이나 이의민을 들뜨게 했었거니와 실제로 나라를 얻은 이성계가 천도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남경이 설치된 지 200년 가까이 됐으니 건물이나 도로 등 기본적인 도시 기반이 갖춰져 있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계의 천도 의사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판중추부사이자 개국공신 남은의 반대론의 일부를 들어보자. “신 등이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새 도읍으로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도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흔히 듣는 변명 중의 하나로 “내 사적 이익을 떠난 공익적으로” 반대한다는 논리이지만 우리는 그 변명이 대개 사실이 아님을 안다. 하물며 송도에 토지와 집이 있는 사람은 남은만이 아니었다. 개국공신 가운데에도 개경에서 태를 묻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생활 근거지 또한 개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도라니. “내 재산과 토지 때문이 아니오라.....”를 내세워 반대할 밖에. 그러나 태조의 마음은 달랐다. 


이후 불거지는 새로운 도읍 결정 과정에서 나온 푸념이긴 하나 이성계는 이렇게 대신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을 명문세가들이 모두 싫어하는 바를 내 어이 모르겠느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중지시키려는 심산이다.”

 

그러나 천도 과정은 시행착오와 번복과 재번복의 연속이었다. 즉위한 다음 해에 풍수도참에 능하다는 권중화라는 이가 계룡산 지역의 신도읍지도를 만들어 바쳤고 이성계는 이에 마치 사랑에 눈먼 남자처럼 다급하게 대처한다. 임금의 부인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적들이 들끓는다는 핑계로 계룡산 남하를 만류하던 신하들을 무시하고 계룡산에 이른 이성계는 수도를 그리로 정하고 필요한 공사 건설을 지시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 태조 이성계의 속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너무나 부실하게 장만된 것이 문제였다, 지역의 입지나 교통의 문제, 조세 징수의 편리함 등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과 신하들의 의견 공유도 없이 일단 땅부터 파고 봤던 일종의 14세기판 불도저 정책이었다. 주변 백성들도 죽을 맛이었다. 계룡산이 있는 충청도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인근의 타도 사람들도 징발돼서 난데없이 계룡산 자락에 모여들었고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전라도는 인적 물적 자원의 주요 징발 대상으로 부상한다.  




▲터만 남은 계룡산 주초석(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계룡산 공사는 강행됐다.  고역에 못이긴 사람들이 탈주를 감행하고 그들을 잡는 대로 목을 치면서도 궁궐의 기초를 다지고 성벽이 들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 수도 건설을 밀어붙이던 이성계는 10개월 뒤 한 장의 상소문을 받는다.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것이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풍수를 고증해보면 물길의 방향이 좋지 못하옵니다.” 하륜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감탄한 태조는 계룡산의 도성 공사를 중단시켜 버린다. “이곳이 아닌갑다.” 류의 돌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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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최남단, 남아프리카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이 있다. 우리에게 아프리카 하면 뜨거운 태양 아래 사막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4계절이 있으며, 다양성의 조화가 있는 지역이다. 대서양과 인도양 그리고 남극해가 만나는 곳이며, 사막과 사바나도 있으며, 펭귄도 있다. 이러한 다양성과 함께 이곳에는 3개의 수도가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대의 도시는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이지만 이곳은 수도가 아니며, 3개의 수도는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 입법수도인 케이프타운(Cape Town), 사법수도인 블룸폰테인(Bloemfontein)으로 구성되어 있다.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프리토리아, 케이프타운, 블룸폰테인, 출처 : google map



‘부부젤라’로 유명하고 2010년 아프리카 대륙에서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이곳에는 왜 3개의 수도가 있는 것일까?




<아프리카 속의 온화한 기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향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면적이 우리나라의 약 12배 이상으로 세계 25위, 인구는 약 4,860만 명으로 세계 26위, GDP는 4,199$로 세계 28위에 해당하는 국가다. 우리나라와 인구수가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비교적 잘 사는 국가로, 국가 규모로 봤을 때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있는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곳은 남반구에 위치함에 따라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다. 4계절이 존재하지만 연교차가 크지 않아 쾌적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케이프타운은 지중해성 기후(Cs)를 나타내므로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땅이 되었다.



 기온 ℃

 총 강수량(㎜) 

 강수 일 수(일)

 1일 최소

 1일 최대

1월

 14.7

25.6 

125 

15.9 

2월 

14.1 

25.1 

90 

11.2 

3월 

13.1 

24.0 

91 

11.9 

4월 

10.3 

21.1 

54 

8.6 

5월 

7.2 

18.9 

13 

2.9 

6월 

4.1 

16.0 

2.0 

7월 

4.1 

16.7 

1.0 

8월 

6.2 

19.4 

2.1 

9월 

9.3 

22.8 

27 

3.7 

10월 

11.2 

23.8 

72 

9.8 

11월 

12.7 

24.2 

117 

15.2 

12월 

13.9 

25.2 

105 

14.9 


▲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도시, 요하네스버그의 기후

(출처 : 세계기상기구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http://www.wmo.int/)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코이산 족(Khoisan race)이라는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황갈색의 피부색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부시먼 족으로도 유명하다.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일찍부터 많은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던 이민국가 사례와는 달리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화한 기후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약 2000여 년 전 줄루족(Zulu)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이후 스와지(Swaz), 코사(Xhosa), 소토(Sotho)족 등으로 분화되었다. 


1488년, 포르투갈 선원이 케이프타운 반도의 희망봉을 발견하여 남아프리카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졌고, 1652년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케이프타운(Cape Town) 일대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들의 선조로 보어인(Boer; 농민)이라고 불린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거주하였으며, 현재도 11개의 언어와 고대 풍습이 남아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주요 도시들의 역사>



1899년 영국인들이 케이프타운을 점령하여 먼저 정착한 네덜란드인이었던 보어(Boer)인들은 남아프리카 북쪽 지방에 오렌지 자유국(Orange Free State; 현 남아공 자유주)과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후 1910년, 이 3개의 국가가 연합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오렌지 자유국은 이후 자유 주(Free State)로 개편 되었고, 이곳에는 사법수도인 블룸폰테인(Bloemfontein)이 주도(州都)로 자리 잡고 있다. 트란스발 공화국은 트란스발 주(Transvaal)로 개편되었는데,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와 최대 상공업도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트란스발 주는 1994년 분할, 폐지되었으며, 트란스발 주의 일부 지역에 가우텡 주(Gauteng)가 설립되었다. 새로 지정된 주도(州都)로 요하네스버그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곳 가우텡 주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가 위치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와 주요 지역의 형성, 변천과정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아직 생소한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굵직한 역사를 담고 있다. 




<다양성의 국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세 수도>



항구도시이자 입법도시인 케이프타운(Cape Town)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회의 소재지이며, 희망봉과 더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도시다. 사법수도인 블룸폰테인(Bloemfontein)은 오렌지 자유국의 수도였지만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최고재판소를 비롯하여 자유주의 주정부, 주의회 등이 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는 초기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로 건설된 곳이며,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 연방의회의사당과 대통령관저가 있으며, 정부청사가 있는 곳이다. 



 

▲ 케이프타운 의회(Parliament of Cape Town), 케이프타운 희망봉

사진제공자 : Volker5571, Achim57 

 



▲ 블룸폰테인의 사법부, 하비 로드

사진제공자 : Helgoland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럽과 가까운 항만인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먼저 성장을 하게 되었지만, 영국과의 갈등아래 있던 네덜란드인이 내륙지역으로 옮겨가며,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발견으로 인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내륙지방이 본격적으로 개발 되었다. 내륙 개발은 넓은 국토의 새로운 개발과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었지만, 다양한 정치적 갈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정치적 전환점에 따라 또 다른 미래를 맞이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마침내 2010년 월드컵까지 치르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와 유니언 빌딩(Union Buildings)

사진제공자 : jmaluw, Daan Prinsloo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는 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의 약 50㎞ 북쪽에 위치하며, 전체 국토면적을 고려해볼 때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인구는 약 390만 명 광역권을 포함하면 약 790만 명이며, 프리토리아는 약 130만 명, 광역인구를 고려하면 약 200만 명이다. 인접한 도시임을 고려하면 약 1,000만 여명에 가까운 대도시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케이프타운의 인구는 약 290만 명, 블룸폰테인은 약 36만 명이다. 


우리나라와 인구가 비슷한 국가임을 고려할 때 상대적으로 특정 지역에 과밀화된 느낌은 덜하다. 그리고 특히 요하네스버그의 인구와 경제력 등을 비교했을 시 수도가 3개인데 반해 경제와 정부의 기능을 엄격히 분리하였으며, 특히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3가지를 모두 분리시켜 수도가 3개인 특수성이 있다.


이때까지 살펴봤던 다른 이민국가가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구구성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백인 13.6%, 흑인 75.2%, 아시아계 및 혼혈인 8.6%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상대적으로 백인의 비율이 낮은 국가다. 역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국민은 백인이 아니며, 전 국토에 살고 있던 수많은 국민들의 잠재력이 인종차별정책으로 통합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새로운 탄생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 대부분이 모두 함께 성장을 누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하려는 노력 끝에 결과물이 최근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가 3개인 것은 역사적인 특수배경이 있었지만, 국민통합 이후 국토균형개발을 이루어낼 수 있는 기반도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성장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가 기대되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해외의 도시계획 - 행정수도 이전편

> 남미 최대의 국가, 브라질

>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터키

> 불모지의 땅에 만든 풍요로운 공간, 호주

> 자유와 평등의 나라, 미국




주지오(朱志悟) - 1987년 1월생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 정치행정학부(행정학 전공)를 졸업하여, 동아대학교 도시계획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국내외 도시에 관심이 많으며, 현재 주 연구 분야는 도시정책, 부동산/주택 분야이다. 현재 ‘부산사랑의 도시 이야기’라는 도시․부동산 관련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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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호주의 한 매체가 자국의 자원개발업체인 링크에너지가 약 20조 호주달러(한화 약 2경 3,000조원)의 가치가 있는 석유 유전을 발견했다고 알렸다. 지하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매우 부러운 것이다. 


호주는 면적이 약 774만㎢으로 우리나라보다 77배나 넓은 나라다. 그러나 인구는 2,200만 여명으로 우리나라 절반도 되지 않는다. 적은 인구임에도 GDP가 약 1조 6천억 달러로 세계 12위를 차지한다. 2012년 기준 1인당 GDP를 보면 무려 68,915달러(자료:International Monetary Fund)로 23,679달러를 기록한 우리나라의 약 3배에 가까운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다.


영국 시사경제주간지인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Best 10을 선정하였다. 그 중 우리에게도 익숙한 호주의 멜버른(Melbourne), 시드니(Sydney), 애들레이드(Adelaide), 퍼스(Perth)까지 총 4곳이나 차지했다. 이들은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도 큰 교훈을 주는 도시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Canberra)로 호주의 주요 도시 중 유일하게 항만이 아닌 내륙에 위치한 도시다. 그렇다면 호주는 어떠한 국가며, 수도는 어떤 곳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 시드니(Sydney), 멜버른(Melbourne), 애들레이드(Adelaide), 퍼스(Perth)

(출처 : google map, 사진제공자 sylvain cathala, ApolloBayLaurie, itsiph, 김민석)




<불모지의 땅에서 인류의 찬란한 문명이 피어오르다>



호주는 1700년대 후반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개발된 신대륙이다. 앞서 본 브라질과는 달리 녹지가 풍부하지 않고, 척박한 사막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인류는 이곳을 개발하는데 성공했고, 현재 시드니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세계의 미항(美港)으로 발전하였다. 




▲ 호주 위성지도. 대륙의 대부분이 불모지이지만 많은 지하자원이 있다.

(출처 : google map, mininghistory.asn.au)



영국에는 1688년에 항해가 W.댐피어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1770년 제임스 쿡(James Cook, 1728~1779)에 의해 대륙 동쪽 해안이 조사되었고, 이후 호주를 식민통치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는 1776년 미국이 독립함에 따라 새로운 개척지를 필요로 했던 것도 작용했다. 1788년 1월 26일 죄수 883명, 군인 252명, 기타 선원 433명 총 1568명이 11척의 배를 통해 호주 시드니 지역에 도착하였다. 호주는 이날을 기념하여 오스트레일리아의 날(Australia day)로 규정하고 있다. 이후 지속적인 이민으로 1800년대 후반기에 이민자가 300만 명(원주민 제외)을 넘어서게 되었다. 



 


▲ 호주(Australia) 신대륙을 발견한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출처: www.answers.com, kids.britannica.com)



현재도 호주는 영국 연방국가로 엘리자베스 2세를 국왕으로 한다. 그러나 국왕은 명목적인 것으로써 실제 국가는 6개의 주와 2개의 특별구역이 지정되어있다. 국기는 영국의 유니언 기(Union Flag)를 사용하며 7각별 5개와 5각 별1개로 별자리 남십자자리(Crux) 모양이다. 




▲ 호주의 국기



호주는 대륙 국가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드니, 맬버른 같은 해안가에 거주하고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섬나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도 캔버라(Canberra)는 내륙에 있다. 이것은 모국(母國)인 영국과의 정치적 독립과 연관이 있다. 1901년에 호주 연방이 정식 출범하였고 캔버라를 새로운 수도로 지정하여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호주의 아름다운 계획도시, 수도 캔버라>



캔버라는 인구기준으로 제1도시인 시드니에서 287km, 제2도시 멜버른에서 662km 떨어져(도로 이동거리 기준) 있다. 지도를 보면 캔버라도 해안가에 건설된 것 같지만, 해안에서 약 100km정도 떨어진 거리이다. 독자적인 국가로 탄생하는 과정에서 불모지 땅에 수도를 건설한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만들고 국가의 심장이 되는 곳을 가다듬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진행되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 수도 캔버라의 위치. 다른 주요 도시들과는 달리 항구도시가 아닌 곳이다.(출처 : google map)



호주는 이민국가로서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이 다소 부족해 정체성 확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는 그 나라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따라서 호주는 캔버라를 통해 역동성을 보여주려 했다.


1911년, 수도건설을 위해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실시하였고 시카고 출신의 도시계획가인 월터 벌리 그리핀(Walter Burley Griffin, 1876~1937)의 계획안이 선정되었다. 그리핀의 계획안은 전원도시의 개념으로 도시계획에 예술성을 극대화시켰고, 수도라는 특징을 살려 상징적이고 기하학적인 계획안을 수립하였다. 



 


▲ 캔버라의 도시계획과 위성지도, 호수를 기준으로 국가의 상징성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 :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D.C / google map)



특히 중심부에 있는 설계자의 이름을 딴 벌리 그리핀 호수는 몽롱글로강(Molonglo River)을 활용한 인공호수다. 이를 통해 도시의 쾌적성을 극대화시켰고, 호수 아래위로 방사형 도로망을 구축하여 수도의 위용과 도로, 광장 계획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국가 규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호주는 평면적 도시 확장이 가능하다. 따라서 캔버라의 주거단지는 저밀도의 전원도시 형식을 띄고 잘 형성된 도로와 중심기능을 통해 도시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 캔버라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기타 주요 상징적 건물(출처 : google map)



캔버라의 큰 규모의 상징적인 건물들은 국가의 위상을 대변해준다. 다른 대도시는 고층건물이 많은데 비해 캔버라는 넓고 웅장한 건물이 녹지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며 예술을 불어넣었다. 개척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황무지의 땅이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뤄 찬란한 인류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 캔버라의 국회와 드넓은 광장 (출처 : google earth)




<여유로운 국가 호주에서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보다>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다. 넓은 땅을 가진 나라도 아니고, 많은 지하자원을 가진 나라도 아니다. 이러한 곳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현재는 2012년 IMF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세계 15위, 무역규모 세계 8위를 차지하여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도성장에 모든 지역이 수혜를 본 것은 아니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축으로 발전하였으며, IMF이후로는 대기업과 수도권 중심의 개발 집중이 더욱 심해져 수도권 과밀화와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이에 따라 수도권의 기능을 분산시켜 세종시와 기타 지역으로 정부청사와 혁신도시 이전을 계획하여 실행하고 있다. 이것은  고도성장을 이룩한 시대적 배경에 그늘졌던 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한 풍요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한반도라는 공간(Space)에 담긴 지역특성과 문화를 느껴야 할 시기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지역주민들의 소속감을 증진시켜 또 다른 미래를 향한 국토를 만들어가야 한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지만 장소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곳이며,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왔던 다양한 삶의 기억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의 국토를 즐기고, 관찰하고, 소중히 여겨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Story)가 담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국민정서안정과 정신적 풍요로움을 달성하여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외의 도시계획-행정수도 이전 편]

남미 최대의 국가, 브라질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곳, 터키 

> 자유와 평등의 나라, 미국




주지오(朱志悟) - 1987년 1월생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 동아대학교 정치행정학부(행정학 전공)를 졸업하여, 동아대학교 도시계획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후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국내외 도시에 관심이 많으며, 현재 주 연구 분야는 도시정책, 부동산/주택 분야이다. 현재 ‘부산사랑의 도시 이야기’라는 도시․부동산 관련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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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3.05.02 16:07 [ ADDR : EDIT/ DEL : REPLY ]
  2. 배월영

    올려주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호주의 역사적 배경부터 현재상황까지 총망라해서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진,그림,지도까지 함께여서 마치 현장에 간 것같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어 더 흥미롭네요.앞으로도 유익한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2013.05.02 16:10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