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박정희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래서 별 응원도 받지 못했던 태국의 고속도로 사업을 따내 해외 건설의 물꼬를 튼 현대건설의 정주영의 이름값은 이미 꽤 높았다. 소양강댐을 중력댐으로 하자는 일본공영 측의 의견에 동조한 건설부, 수자원공사는 혹여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의 사력댐 주장에 혹할까 봐 불안해 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건설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건설부 장관이 현대 측의 입장을 보고서 말미에 달아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설도 있다.) 

 

“각하. 모래, 자갈로 댐을 짓다가 홍수라도 나면 춘천이 아니라 수도권이 물에 잠깁니다.” 그런데 ‘홍수’나 ‘수도권’ 같은 말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자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을 다 듣고 나더니 장관을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장관 말대로라면 콘크리트 댐이 완성된 다음 몇 십억 톤의 물이 가둬져 있을 때 북한이 댐을 폭격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모네댐/ 에델댐 (출처: http://bit.ly/11g5s0O)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은 1952년 전쟁 중 UN군 공군이 감행한 수풍댐 폭격 작전이나 영국 공군에 의해 수행된 독일의 모네댐, 에델댐 폭격을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UN군의 수풍댐 공격으로 북한은 전력의 90퍼센트를 상실했고 지도부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전해지거니와 만약 댐 자체가 터졌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참화가 일어났을 테고 독일의 댐 폭파는 루르 공업지대에 실제로 심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소양강 댐은 당시로서는 최북단에 건설되는 댐이었다. 북한이 우세한 국력을 바탕으로 수시로 남한을 위협하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 속에 ‘안보’라는 전혀 새로운 요소가 끼어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었다. 

 

“자갈 모래로 된 사력댐이면 포격을 맞아도 풀썩 튀어 올랐다가 주저앉고 말겠지만 만수가 된 콘크리트 댐이 깨져 나가면 무슨 일이 발생하겠소?” 

 

분위기는 180도로 바뀐다. 건설부와 수자원공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각하의 뜻’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소양강댐 설계 문제는 다시 ‘신중한 검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즈음 정주영 회장은 소양강댐을 거의 포기한 채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청와대발 후 폭풍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정주영 회장에 따르면 술을 억병으로 먹은 다음 날 위에 탈이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별안간 팔순을 넘긴 일본공영 회장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현장 재조사 결과 암반이 약해서 콘크리트 댐보다는 사력댐이 낫겠습니다. 가격도 20퍼센트 정도까지는 떨어질 수 있겠습니다. 정사장님이 옳았습니다.” 불도저 정주영의 신화가 또 한 벽돌 쌓이는 순간.  

   


 

▲소양강댐 건설현장/ 박정희 대통령 공사장 시찰(출처: 국가기록원)



마침내 1967년 4월 15일 소양강댐 건설 시작의 종이 울렸다. 1973년 10월15일 완공될 때까지 5년 6개월의 세월과 290억 원의 공사비용이 들어간 대역사. 댐을 만드는 데 들어간 자갈과 흙은 13.5톤 덤프트럭으로 150만 여 번을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고, 당시 국민 1인당 7가마씩 돌아가는 양이었다.  소양강댐이 수용할 수 있는 물은 29억 톤으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600번 채울 수 있었으며, 수도권 주민 2,000만 명의 1년간 사용량이었다. 이 물 자체로 20만kw의 전력을 생산할 뿐 아니라 그 물로 하류의 의암•청평•팔당에 있는 3만4,000kw짜리 발전소 세 곳도 돌린다. (스포츠한국 2009.9.28)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의 준공식에서 이렇게 말하며 흥분했다. “여기, 또 하나 우리 인간이 대자연에 엄청난 도전을 하여 인간의 의지로서 자연을 극복하고 개가를 올린 산 증거를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댐은 사력(砂礫) 공법의 댐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공사가 우리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기술로서 이렇게 훌륭하게 되었다는데 대해서 나는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동양 최대의 댐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정주영 뿐이 아니다. 그의 독려 하에 매일 1천여 명의 인력이 투입되었고 작업은 새벽 6시에서 오후 6시까지 12시간 내내 이어졌다. 산을 깎고 언덕을 발라내는 난공사 속에 흙더미에 깔리고 발을 헛디뎌 벼랑으로 떨어지고 폭발에 날아간 사람이 서른 일곱 명에 달했다. 물론 이것도 공식적인 수치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공사에서 공식 사망자는 77명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 건설의 주역들 스스로 “수백 명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로서는 오지 중의 오지였던 소양강댐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장에서 죽어갔으되 위령비에 이름 석 자조차 올리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생면부지의 고장에 와 목숨을 걸고 일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야말로 소양강댐이라는 대역사의 주인들이었다. 



▲소양강댐 (출처: 대한민국 구석구석)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이들은 바로 소양강 주변에서 살던 주민들. 평생의 터전이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1만 8천 명의 주민들의 한숨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양강댐은 분명 거대한 역사(役事)이자 역사(歷史)의 한 장이었지만 지금까지 돌아본 소양강댐의 건설 과정에서도 우리는 ‘개발독재’의 유령을 만나고, “토건 세력과 국가의 의지가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의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한겨레21 2012.10.12일자) 국가 시책 앞에서 자신의 생활 터전을 ‘당연히’ 그리고 별 보상도 없이 내주고 생판 낯선 땅에서 맴돌다 스러져간 민초들의 사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흡사 재방송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다. 

 

과거는 전설로 남지만 전설은 현실을 덮지 못한다. 500년에 한 번 있는 홍수에도 끄떡없다던 소양강댐은 의기양양한 완공 이후 불과 11년만이었던 1984년 대홍수 때 1차 위기를 맞는다. 최고 홍수위인 200.4미터에 2.6미터 모자란 197.7미터의 수위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500년에 한 번 홍수”란 400밀리미터 정도의 강우량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지만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는 강릉 지역에 하루 877밀리미터의 폭탄 같은 비를 퍼부은 바 있다. 그 호우가 소양강댐 일대에 들이부어진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사력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한 바 폭격에는 강할지 모르나 홍수에는 유난히 약한 댐인데 말이다. 이 같은 자연의 도전에 대해 국토해양부와 한국수자원공사는 2010년 홍수에 대비한 방류능력 증대를 위해 설치한 직경 14m, 길이 1.2km의 월류형 터널식 여수로를 완성함으로써 응전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도전은 이어질 것이고 소양강댐과 그를 지키는 사람들은 또 다른 현명한 응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역사는 소양강 물과 함께 흐를 것이다. 

 

2011년 38년 만에 소양강댐 정상부가 공개됐다. 그 해에 잠깐 들러 소양호를 내려다보던 소회는 매우 복잡미묘했던 기억이 난다. 참으로 평온해 보이는 물과 산과 하늘이었으나 그 평온함 속에 숨은 역사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Posted by 국토교통부



우리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몇몇 거인(巨人)이 있다면 현대그룹의 창시자 정주영 회장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각양각색으로 다를 것이고, 그의 빛의 밝기만큼이나 그 그늘 또한 깊음도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 현대사에 크나큰 발자국을 남긴 거인이었음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에 뛰어들어 “주판알 튕기지 말고 일단 갖다 퍼부어!”라고 호기롭게 외칠 줄 알았던 사업가였으며 이순신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를 외국 은행가들에게 흔들어 보이며 “당신들보다 수백 년 앞서서 우리는 철갑선을 만든 사람들이야!”라고 배짱을 부렸던 간 큰 남자였고, 그의 입버릇처럼 “안돼? 해 봤어?”를 송곳처럼 들이밀면서 지레 포기하려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찔러 대던 부지런한 경영자. 그의 이름이 소양강 댐 공사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 중력댐 방식 (출처:  http://www.damsafety.org)



1967년 현대건설은 건설부가 발주하는 입찰에 응했고 최저 가격을 써내 낙찰을 받는다. 그러고 나서 회의에 들어가보니 소양강댐이 콘크리트 중력(重力)댐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중력댐이란 댐 자체의 무게로 저수지의 물을 지탱하는 콘크리트 댐을 말하는 것이다. 일제 시대 지어진 수풍댐을 비롯, 한국에 건설된 댐의 대부분이 중력댐이었다. 구조이론이 간단하고 지진에 대한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강점을 지닌 설계였지만 정주영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구석이 한 둘이 아니었다. 



 

▲섬진강댐/소양강댐(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선 소양강댐은 섬진강 댐에 대하면 댈 것도 아닌 대규모인데 이걸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만든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콘크리트와 철근은 대관절 어디서 조달하느냐는 의문이 치밀었다. 1967년이면 오늘날 우람한 포스코 제철소가 들어서 있는 포항 해변에는 삭막한 모래사장과 싸구려 횟집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제철소도 없는데다가 그 무량대수(無量大數)같은 콘크리트는 또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오래 갈 것도 없이 그 공급처는 일본 밖에 없었다. 

 

 이 소양강댐의 건설 자금은 식민 통치의 보상격으로 일본에 청구하여 받아낸 돈에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 한 많고 피맺힌 돈으로 댐을 짓는데 또 그 댐에 무한정으로 들어갈 재료비를 다시금 일본에게 뜸 잘 든 밥상으로 갖다 바쳐야 하는가. 정주영은 부아가 치밀었다. “설계비에 기초 자재비, 기술 용역비는 물론 철근, 시멘트, 엄청난 물량의 기자재 값까지 전부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하자는 속셈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정주영 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중에서) 

 



▲ 사력댐 방식 (출처: http://www.damsafety.org)



후일 유조선을 가라앉혀 간척사업을 전개했던 ‘정주영 공법’의 창시자의 머리는 분주하게 돌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우리나라 산하라면 어디나 차고 넘치는 모래와 자갈이었다. 댐은 재료에 따라 그 종류가 나뉜다. 우선 콘크리트 댐, 그리고 사암(沙岩)의 사(沙)자와 역암(礫岩)의 력(礫)자가 합쳐진 글자로 구성된 사력댐, 즉 모래와 자갈로 만든 사력댐이 그것이다. 현대건설은 태국에서 댐 건설에 입찰해 본 경험도 있어 전혀 댐 문외한은 아니었기에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주영은 당장 실무자를 파견하여 “해 봐”라고 지시한다. 조사 결과는 OK. 콘크리트 댐에 비해서는 그 경제성 면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용기 백배한 정주영은 동양 최대의 수풍댐 건설에 빛나며, 댐 건설에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일본 유수의 대기업 일본공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사력댐으로 합시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일단 ‘관존민비’(官尊民卑) 문화가 만연하던 시절 근엄하기 짝이 없던 공무원들이 버티고 있었고 자부심으로 그득한 일본 설계사가 있었다. 이 국가적 대공사에 일본 회사가 설계해 주고 건설부 승인까지 난 댐을 자신들 마음대로 바꿔 보겠다고 나선 맹랑한 건설사가 그렇게 곱게 보일 리는 없었으리라. 먼저 공무원들의 호통부터 울려 나왔다. “뭘 어떻게 변경하자는 거요?” 기가 죽어버린 실무진들을 제치고 정주영이 열심히 설명했으나 일본공영의 반응은 “니가 댐을 알아?” 분위기였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지방도시 10여 곳의 상수도 건설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등 경제적 효과를 설명하던 정주영은 매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한다. 일본공영 부회장 하시모토의 극언이었다. “당신 어디서 댐 공부했나? 무식한 소리 하지도 마라.” 정주영은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남긴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던 모양이다. “동경대 출신인 그가, 내가 학교 거의 공부를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내 기를 죽이자고 그렇게 나왔다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식민지를 겪고 전쟁으로 온 국토가 초토화된 나라, 자본이라고는 식민지 시대를 헐값으로 보상받은 돈 밖에 없었고, 기술이라고는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다였으며, “뭘 아는” 사람, 또는 “어디서 공부한 사람”은 7년 가물의 콩만큼 귀했던 나라의 한계이자 슬픔이었다. 그렇게 사력댐을 하자고 고집하던 정주영 자신도 그 강철같은 신념의 한구석에는 과연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을진대, ‘피 같은’ 자금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일제 시대 한국인들이 흘린 핏값 그 자체였던 대일 청구 자금을 집행해야 하는 공무원들 입장으로서도 머리가 터져 나갈 듯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자존심을 다친 듯 으르렁거리는 일본공영을 따르는 게 좋은 건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현대건설 사장을 믿을 것인지. 대세는 “대세를 따르자”는 것이었다. 대세란 당연히 일본의 설계대로 중력댐으로 밀자는 것이었다. 천하의 정주영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 봤는데”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하게 풀렸다. 



▲소양강댐 전경(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건설부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력댐보다는 중력댐이 좋다는 식으로 보고하면서 말미에 단 사족이 뜻밖의 열쇠가 된 것이다. “현대 정 사장 주장대로 사력식으로 건설하면 자칫 큰 일 날 수 있습니다. 건설 도중에 큰 비라도 오면 댐이 무너져 서울이 다 물에 잠길 테고, 그럼 정권이 흔들립니다.” (스포츠 한국 2009.9.26) 현대 정주영이라면 익히 알던 박정희 대통령이 혹여 다른 선을 통해 정주영의 경제성 주장에 설득될까 봐 두려워 오금을 박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이 소양강 댐의 운명을 바꾼 한 마디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Posted by 국토교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