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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5 [대학생기자단] 전주 한옥마을 체험 따라잡기 (1)
  2. 2013.08.20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2편






안녕하세요?! 국토교통부 대학생 기자단 최서진, 황외성 기자입니다

지난 919일 국토교통부 어린이 기자단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방문 했는데요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학생 기자단이 그 길을 함께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른 아침 양재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오전
10시경 전주 한옥마을에 도착했습니다도착하자마자 한옥마을 탐방이 시작 되었는데요. 먼저 태조 이성계의 정기가 서려있다는 오목대로 향했습니다.



오목대는 1380년 고려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친 태조 이성계가 승전잔치를 벌인 곳입니다. 조선왕조를 개국 하고 나서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오목대라고 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강점기 시절에는 조선의 맥을 끊는다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오목대의 중간에 길을 만들었다는 슬픈 역사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목대에서 내려와서 한옥마을 중심에 있는 전동성당으로 향했습니다
. 최초의 순교지로도 유명한 전동성당은 프랑스 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순교의 뜻을 기르고자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일제강점기에 설계해서 건물이 명동성당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군이 전주읍성을 헐면서 버린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지었다고 하는데요.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이였습니다.


이 붉은 벽돌을 이용해서 지은 건물은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에서 나온 돌로 주축돌을 삼았다고 합니다
.



호남지역 최초로 건립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과 대조적으로 그 앞에는 태조 이성계의 영전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으로 향했습니다.



1410년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고 제사를 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 이라고 했습니다경기전은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의 발상지로 전주 이씨인 이성계의 왕조인 조선의 발상지라고 여겨졌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어진을 보니 늠름하고 위엄이 돋보이는 인상을 받았습니다점심식사 후 무형문화재 명인 유배근 선생님의 지도와 함께 한지발 체험을 했습니다.



한지발을 짜는 시간은 고됨의 연속이고 담양에서 사온 대나무를 일일이 얇게 깎아 좀이 슬지 않도록 소금을 넣어 5시간을 삶아 내야 하며 이를 다시 3번에 걸쳐 앏고 깔끔하게 다듬어야 비로소 발을 짜는 준비가 끝납니다.



일단 발을 짜기 시작하면 쉴 틈도 없다고 합니다말총을 일일이 엮어 짜는 전통 한지 발은 유배근 선생님이 더욱 정성을 쏟는 품목 이였습니다.

유배근 선생님은 판지의 우수성을 위해서 평생을 고민하며 우리 전통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한지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국내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에서 한지만들기 체험에 대한 문의가 들어와서 일본에서도 우리 한지의 우수성과 명인의 솜씨를 널리 펼치고 있습니다.



어린이 기자들도 한지를 직접 만들어 보았는데요한지의 제작과정은 첫째 닥다무를 채집하고, 닥나무를 증기로 찌고, 질을 벗기는 작업 후에 물에 담가 불려서 겉 껍질을 벗깁니다.

그 후 잿물에 삶고 닥메로 두들기고 물통
(보걸이)에 넣어 잿물을 빼냅니다.



건져서 물기를 빼낸 후 표백통에 넣은 후 지통에 넣고 닥풀과 함께 혼합합니다.



다음 발로 뜬 다음에 철판에 만들어 완제품으로 창호지나 백선지 피지 등을 생산합니다열심히 집중해서 나만의 한지를 만드는 어린이 기자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어린이 기자단들과 함께 하면서 어린이 기자단들의 취재열정에 저희도 더욱 더 취재를 열심히 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앞으로도 어린이 기자단들의 활발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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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세한 기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14.09.30 22: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충남 계룡시에는 ‘신도안면’(新都案面)이라는 면이 있다. 바로 새 도읍지로 결정되어 근 열 달 동안 백성들이 죽을 둥 살 둥 궁궐 공사에 동원됐던 곳이다. 그 공사에 쓰인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 신도안은 오늘날 육해공군 본부가 들어와 면 전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어 있으니 여느 땅과는 다른 팔자(?)를 지닌 것 같기도 하다. 



           

▲ 신도 완성 추측도(출처: 계룡시)



어쨌든 하륜은 계룡산 천도에 반대하면서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과 풍수상 오히려 계룡산 지역이 좋지 못하다는 논의를 폈다. 신도읍으로 계룡산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풍수였는데 오히려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나라의 남쪽에 치우친 데다 큰 강도 끼고 있지 않아 교통도 불편하고 기타 등등의 여건들이 그제야 태조의 눈과 귀에 들어온 듯 했다.  


다시 고려의 남경, 즉 한양 지역이 수도 후보지로 떠올랐고 하륜이 새 도읍 후보지로 제시한 곳은 무악이었다. 무악이란 오늘날의 무악재와 안산 사이를 말하는 지역이다. 만약 이 무악으로 도성이 결정되었다면 오늘날 신촌골에 들어서 있는 것은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아니라 경복궁과 창덕궁일지도 모른다.


 

             

▲ 무악 지도(출처: 서울시편찬위원회)



태조 이성계는 장군으로서 전투를 지휘할 때도 그랬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태조 이성계는 몸소 그곳을 둘러보러 나선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8월. 이성계는 무악으로 행차하여 야영을 하면서 도읍지 후보 시찰에 나선다. 한강변에 위치하고 나라의 중심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무악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 나라의 도읍지가 들어서기에는 좀 협소하다는 것이 하나고, 둘째는 역시 풍수였다. 풍수지리를 맡아보던 서운관 관리들은 무악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러자 한때 고려를 호령하던 맹장이었던 터프가이 이성계가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대들은 입만 열면 불가하다는 말만 들먹이는데, 그 근거가 도대체 뭐란 말이냐? 만약 이곳이 불가하면 대체 어느 곳이 가하단 말이냐?” 풍수가 어떻고 무엇이 길하고 불길하고 하는 논의에 질릴 대로 질린 빛이 역력한 왕이었으나 서운관 관리 유한우는 그 앞에서 대놓고 이렇게 대꾸한다.  


“고려 태조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후 임금들이 다른 곳에 궁을 지어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송도(개경)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았사오니 다시 궁궐을 지어 도읍을 정하심이 좋겠습니다.” 유한우의 속내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결기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지만 이성계의 분노는 활활 타오를 밖에. 그는 근처에 그렇게 길한 땅이 없다면 옛 백제 수도든 신라의 수도든 그리고 갈 것이라며 어깃장을 놓으며 신하들을 압박했다.

  



▲ 정도전(문화체육관광부 지정영정, 권오창 화백)



어디가 길하고 어디가 흉한지를 주로 따지던 논쟁에서 새로운 논거를 끌어들인 것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중국의 고사를 들어가며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의 치세가 잘 이뤄지고 그렇지 않고는 결국 다스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이지 풍수지리상의 성쇠에 갈음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지기(地氣)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은 그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말을 다시 읊는 것에 불과하며, 신의 말한 바도 옛 사람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술사들의 말은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사람이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문제지 땅의 기운 따위가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가히 정도전다운 말이다. 21세기에도 어디가 터가 안 좋고 기가 세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소리가 횡행하는 요즘에도 귀 기울일 말일 터이고.

 


무악을 떠난 태조 이성계가 다시 주목한 것이 한양이었다. 나라를 열자마자 도읍지를 옮겨보려고 했던 바로 그 땅. 

이성계는 한양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이라는 지명의 뜻은 한강 이북 고을이라는 뜻이다. 북은 양(陽)이었고 남은 음(陰)이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서운관 관리들도 “개경이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이곳 한양”이라며 거들었고 임금이 왕사로 대접하던 무학대사 역시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탄해서 도읍지로 적당할 것 같습니다.” 고 한양을 지지한다.  이성계는 얼굴을 편다.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즉 한양은 풍수상으로도 좋았다고 하지만 결국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도읍지로 낙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결정이 내려진 것은 무악에 들렀다가 서운관 관리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따르면 한양 도성 성벽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도성을 쌓을 자리를 결정짓지 못해 고민하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어느 선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녹아 사라졌다. 태조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하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이 한양성을 쌓았던 것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는 것. 




▲ 도성 성곽(출처:서울시)



전설도읍지가 결정된 뒤 태조 이성계의 행동은 그야말로 불도저와 같았다. 성벽 공사가 시작됐고 종묘와 궁궐 건설도 흡사 ‘속도전’을 벌였다.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경복궁 건설을 시작했는데 두어 달도 안 지난 9월 29일에 이를 1차로 완성시킨다. 물론 제대로 된 궁궐이 아니었지만..... 다음 해 ‘도성축조도감’이 시작됐고 그 다음 해(1396) 정월에 도성 공사가 시작됐는데 11만 8천명의 인력이 투입돼 1월 9일부터 2월 29일까지 단 49일만에 대충의 성벽을 두르는 1차 공사를 끝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진행된 초강행군이었다. 비록 성문조차 달리지 않은 미완성의 공사였지만 인왕산, 낙산, 남산을 에두르는 한양성벽은 이때 완성됐다. 모든 성벽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각 지역을 표시하여 지역민들이 쌓은 구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불러올려 수리를 시켰다고 하니 백성들의 고충을 알만하다. 


개경에서 벗어나려는 태조 이성계의 마음은 그렇게 조급했다. 눈앞의 욕망과 이익 때문에 밀어붙이는 개발과 공사의 뒷감당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거니는 18킬로미터 성벽의 기초가 단 49일만에 완성됐다는 사실을 돌이켜보자. 그 성벽이 튼튼할 리 없었다, 결국은 세종 때 30만명의 인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는 필연적인 재앙이 되어 후대를 덮쳤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이 수도로 굳어지기에는 아직 우여곡절이 많이 남아 있었다.       



6백 년 전 수도이전, 한양천도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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