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대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7.25 한강다리 6편 (1)
  2. 2013.07.03 한강다리 3편 (2)
  3. 2013.06.24 한강다리 2편
  4. 2013.06.18 한강다리 1편

 


▲ 출판사 이소북

 

 

1966년 소설가 이호철은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남해안 통영에서 찢어지는 가난으로부터 도망 나와 서울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길녀’, 그리고 그녀의 친구미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유례없는 인구 집중 거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헤집어 놨던 소설이었다. 이때 작가가만원이라고 불렀던 서울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380만 명이었다. 천만 인구를 상회한다는 요즘에 비추면 애걔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당시의 서울의 도시 인프라는 그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여러 곳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3한강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드넓은 한강에 다리는 단 세 개였다. 1한강, 2한강교, 그리고 광진교. 인구는 늘고 차량도 증가했고 강남과 강북 사이의 물동량도 커졌는데 다리 세 개로 그것들을 소화하기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걱정거리는 더 있었다. 6.25때 서울 인구는 1백만이었는데 <서울은 만원이다>가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즈음의 인구는 거의 네 배로 불어나 있었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이 인구를 어떻게 피난시켜야 하는가는 그저 노파심이 아닌 식은땀이 날 정도로 막막하고 두려운 질문이었다. 그나마 제2한강교는 전쟁이 터지면 군용으로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1966 1 19일 또 하나의 한강다리를 놓는 공사가 시작됐다. 3한강교였다.


 

 

1966년 한강대교 공사 모습(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런데 서울 시민들은 그 사실을 거의 몰랐다. 정부에서 요란스레 떠들지도 않았고 남산 넘어 한강 건너 다리가 향하는 곳은 1963 1 1일에 겨우 서울에 편입된 촌동네였기 때문이다. 다리를 짓기 시작할 당시 그 일대 인구는 겨우 2 7천여 명. 원래 조선 시대 내내 이 일대는 경기도 광주부에 속했고 서울시에 편입된 뒤에도 배밭과 채소밭이 가득하여 서울 시민들의 채소, 과일 공급지였던 곳이었다. “강북 사람들 똥을 가져다가 농사를 짓던시골이었다. 뚜렷한 동네 이름도 없어서 그저영등포의 동쪽 동네라는 뜻으로영동이라고 불리던 곳에 제3한강교가 놓이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북한이 자주 보이는 이른바못사는 집의 자존심때문에 혀를 찰 때가 많지만 제3한강교 공사가 시작될 무렵에는 남한이 북한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3한강교 공사가 시작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 건설부에서 갑자기 황망한 지시가 내려왔다. “당초 설계된 왕복 4차로( 20m)를 왕복 6차로( 26m)로 확장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차량 수가 27천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6차로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평양에 놓고 있는 다리의 폭이 25m이므로 우리는 그보다 1m는 더 넓어야 된다.” 훗날 남한의 63빌딩에 자극 받아 100층이 넘는 류경호텔을 지으려다가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북한의 유치함은 제3한강교 건설 당시에는 남한 쪽이 심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3한강교 공사 기간에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러 번 있었다. 우선 1968 1 21일 북한의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하려다가 실패로 돌아간 사건은 한국인들의 뇌리에 전쟁의 공포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고 있었고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죄로 이승복 소년은 공비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제3한강교의 운명 뿐 아니라 서울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될 일이 1968 2 1일 일어났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된 것이다. 그 고속도로는 제 3한강교와 연결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로써 제3한강교는서울 시민 유사시 피난용 다리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으로 그 위상이 급상승하게 된다. 3한강교는 1969년 완공됐고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서울의 역사에는 굵직한 두 글자가 부상하게 된다. ‘강남’ (江南)

 

 

 


▲ 공무원 아파트 건설(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강남 지역의 땅값의 추이를 보면 우리는 제3한강교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단하게 알게 된다. “1963 63 3.3㎡당 300~400원 하던 압구정동과 신사동 일대의 땅값은 66년 제3한강교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꿈틀대기 시작해 67년에 1000원을 넘어섰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70년에는 단번에 1~15000원으로 폭등했다. 특히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땅값 폭등을 부추겼다. 경부고속도로가 시작되는 말죽거리에 복덕방촌이 형성됐는데 이 때문에 강남땅값 폭등 현상을말죽거리 신화라고 불렀다.” (2011.1.10 경향신문) 여기에 당국 또한 강남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 “공무원아파트 건설, 공공기관 이전, 학교와 고속버스터미널의 강남이전, 유흥업소 강남 이전시 취득세 감면, 대규모 주택공급을 위한 압구정반포청담도곡동 일대 아파트 지구 신설” (위 신문 기사 중) 등 할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강북은 묶고 강남은 푸는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 개발중인 한남 (출처: 문화복덕방 http://me2.do/FjyKT2Jn)

 

 

그러나 여기에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깃들어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의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 3권을 보면 1971 4월의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지시로 서울시 도시계획과장 윤진우가 1970년 강남의 토지를 사고 팔아 수십억 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하여 바친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윤진우는 당시 실세였던 경호실장 박종규에게 불려가가장 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의 땅을 사 모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육군 헬기를 타고 과천에서 송파까지 둘러본 그는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지역 일대”, 즉 오늘날의 강남구 일대를장래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곳으로 지목했다. 이윽고 청와대에서 흘러나온 자금은 이 일대의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강남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그 땅값이 오르면 다시 되파는, 전형적인 복부인의 수법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 땅 짚고 헤엄치기처럼 쉬운 돈벌이를 돈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외면할 리가 없었다. 곧 돈과 사람의 거대한 물결이 제3한강교를 건너 강남으로 진출하게 된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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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rpenguin

    위의 사진은 '제3한강교'가 아닌 '한강대교' 노량진 방향!

    2015.06.25 12:30 [ ADDR : EDIT/ DEL : REPLY ]


한강인도교 폭파는 향후로도 한강의 역사, 우리 도시 건설의 역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뒤 광나루에 걸려 있던 광진교 역시 국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된다. 두 다리 폭파 후 한강은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차단하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전쟁 발발 3일만에 함락될 만큼 전선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수도 서울의 1백만 시민들, 피난을 가다가 다리 위에서 폭발과 함께 사라진 사람들과 그를 지켜보며 망연한 비명을 질렀던 피난민들, 그리고 그 폭발의 순간까지도 인민군과 전투를 치르며 서울을 지키고 있던 대략 4만 명의 국군 장병들 모두에게 끊어진 한강다리는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나마 있던 다리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모두가 폭파됐다. 철수하지 못한 시민들은 3개월간의 ‘인공치하’를 견뎌야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도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서울 수복 기념식을 치르고자 했다. 그러자 부관들이 난색을 표한다. “한강 다리가 철교고 인도교가 죄 끊어져서 서울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맥아더 원수는 아주 간단하고 시원한 한 마디를 남긴다. “Make one." 하나 만들어.


까라면 까는 것이 군대였고 물량과 장비는 넘치는 것이 미군. 그들은 한강철교를 밤새 복구해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를 강북 땅을 밟게 한다. 한강인도교 역시 일단 응급 복구를 받고 1차선으로만 재개통된다. 다리를 다시 지을 여력도 여력이었겠지만 또 언제 인민군이 내려와 우리 손으로 폭파시킬지 모르는 전쟁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한강 인도교 개통식(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1953년 12월 28일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 5개월 뒤 한강인도교에서는 색다른 기념식이 열린다. “아직 본교(本橋)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의 편의를 돕기 위해 다리 양쪽에 나무판으로 만든 보도를 깐 것이다.” (경향신문 1983.9.3 이 한 장의 사진 중) 한강대교의 완벽한 재준공도 아니고 사람들 겨우 다닐만한 나무 판을 까는 공사였지만 기념식에는 신익희 국회의장이 등장하여 미군 장성과 함께 테이프를 끊는다. 비슷한 시기 이승만 대통령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를 대동하고 광진교 복구 공사 현장에서 기술자들을 격려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강 다리라는 것이 얼마나 다급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끊어진 한강 철교를 포탄 탄피로 대충 이은 다리 위로 차량이 오가야 했고 일반인들은 군사용으로 가설된 배다리를 건너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발급된 ‘도강증’을 지녀야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서울에 집을 둔 사람들도 지방에 내려갔다 오려면 도강증을 받아야 가능했다. 그러니 끊어진 한강다리가 얼마나 야속해 보였겠는가. 


남북으로 분단된(?) 서울을 본격적으로 이어 보려는 시도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야 재개된다. 폭파는 순식간이었지만 복구는 그렇게 어려운 법이다. 그나마 우리 능력으로는 벅찼고 ICA (미국 국제원조처)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이 공사를 완성한 것이 현대건설이었다. 공사비는 무려 10억 환 가까이 들어간 이 공사는 돈도 돈이었지만 대단한 난공사였다. 폭파돼 물에 빠진 교량이 장애물 역할을 해 수중 기초공사에 적잖은 애를 먹어야 했고 콘크리트에 파일을 박을 때는 잠수부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 잠수부들이 작업을 하러 한강을 자맥질치며 내려갔다가 혼이 나가서 올라오기도 했다. “불발탄이 강바닥에 쌓여 있습니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들이박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한강대교 복구준공(출처:국가기록원 http://theme.archives.go.kr/next/daily/searchArchive.do)



전후 복구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라 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는 1958년 5월 16일 ‘한강대교 준공식’으로 그 결실을 맞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다리 위를 걷는다. 8년 전 전쟁 때 일찌감치 후퇴해서 대전에서 “서울 사수”를 방송했던 그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 다리 위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원혼들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이날 한강 백사장에는 수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몰려들어 새로이 이어지는 한강의 남과 북을 축하했다. 한강인도교는 정식으로 ‘한강대교’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귀에 익은 한강대교의 이름은 사실상 이때를 기점으로 한다. 이후로도 한강대교는 강남북을 잇는 거의 유일한 다리였다 (물론 광진교도 있었지만 그 물동량, 그리고 서울의 중심부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요성에 비추어 한강대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4.19 때 흑석동의 중앙대학생들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기치를 들고 한강을 건너 경무대로 향했던 것도 이 다리였고 그 1년 후 해병대 병력들이 그들의 서울 진입을 막으려는 헌병들과 총격전을 교환했던 것도 한강대교였다. 광진교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외롭게 서울 시민들의 일상을 지켜온 한강대교는 1962년에야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된다. 수도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하고 서울 서부 지역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전쟁 시 원활한 군의 이동을 위해 (유사시 군과 민간인이 따로 사용할 다리가 필요했다) 한강다리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제2한강교, 오늘날의 양화대교였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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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11

    위 한강 철교 폭파된 사진을 활용해 영상을 제작하려고 하는 학생입니다.
    사용가능할까요?

    2014.05.28 00:57 [ ADDR : EDIT/ DEL : REPLY ]
  2. 위 사진은 저희쪽에서도 국가기록원 자료를 가지고 온 사진입니다. 상업적용도로 사용안하시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확한 내용은 국가기록원에 문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확실한 답변드리지 못한점

    2014.05.28 17:3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한강철교는 섰다. 그러나 이는 기차를 위한 다리일 뿐 사람의 통행을 위한 시설은 일체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원래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부여할 때에는 한강철교에 ‘보행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길 한쪽 또는 양쪽에 보도를 시설할 것’을 못박아 두었지만 모스로부터 이 부설권을 사들인 일제는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보도 시설을 빼 버린다. 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강을 건너갔지만 사람들은 괴물 같은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룻배를 탈 수 밖에 없었고 뱃사공은 아직까지는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나루터의 종말은 다가왔다. 1916년 한강인도교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도교 공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는 자동차였다. 황제 폐하나 타는 것으로 알았던 자동차는 1911년 단 2대에 불과했지만 1915년 경에는 70대로 늘었고 1917년에는 마침내 100대를 돌파하여 114대에 이르고 있었다. (CN뉴스 2011.3.14 이덕수의 길따라 기록따라) 또 서울시 인구도 늘었고 강남•북을 잇는 교통로 확보가 절실해진 것이다. 




▲ 한강 인도교 건설현장(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총독부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본교의 가설은 교통연락상 가장 긴요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교(架橋)가 기획된 일이 없고 겨우 도선(渡船)에 의해 연락된데 불과함으로써 교통기관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이번에 철도국의 한강구철교(漢江舊鐵橋)의 고재(古材)인 60m의 횡형(橫桁) 10연을 매수하고 부족 재료는 새로 구입하여 가교공사의 시행을 결정”(조선총독부 토목사업지 - 1937) 하기에 이른다. 즉 한강인도교의 기초는 한강철교를 짓고 남았던 자재들이었던 것이다. 이 인도교 공사는 1917년 10월 완공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인 셈이다. 당시에는 노들섬에서 노량진간의 440미터 구간을 한강대교, 노들섬에서 용산까지의 구간을 한강소교라고 나누어 불렀다고 전한다. 



▲ 한강 대교(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먼 훗날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 한강 위에 세워진 모든 다리에 비상 조사가 실시된 바 있었다. 이때 일제 때 시공된 한강대교의 기초는 오히려 별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다리였다. 한강대교가 지어진 뒤 한강대교는 온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의 명물이 된다. 한강인도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엉기적 엉기적 우마차들이 지나는 가운데 기생과 부잣집 한량들을 태운 자동차들은 날렵하게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한강 다리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했다. 세태를 비관한 염세자들이 즐겨 자살을 택한 곳이 하필이면 한강다리였던 것이다. 더구나 교각이 아치 형태로 되어 있어 올라가기가 쉬웠던 한강대교는 지금은 아예 함부로 오르지 못하도록 기름칠이 되어 있거니와 일제 강점기에는 “일촌대기(一寸待期: 잠깐만 참으시오!) 라는 팻말이 자살을 시도하는 이들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다. 


““‘스토-ㅂ’/항구의 종점이올시다/때때로 임자 없는 모자들이 난간에 걸려서는/‘인생도 잘 있거라’고 바람에 펄럭입니다/그러므로 기둥 밑에는 아가씨들을 위하여/ 커다란 눈물 박기(그릇)가 놓여 있습니다.”는 김기림의 시 <한강인도교>는 그 비극의 단면을 노래하고 있거니와 당시 경성부 용산경찰서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듯 한강다리 북단에 파출소를 설치하여 다리를 순찰하고 밤에도 등을 대낮같이 밝히는 한편 자살 방지를 위한 슬로건 공모까지 했다고 한다. 응모작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명사십리 해당화는 명년 삼월 다시 피지마는 인생 한번 죽어지면 다시 오지 못하리라” (중앙일보 2010.10.12 분수대)


우리나라 홍수(洪水) 역사 중 최악의 홍수로 기록된 을축년 대홍수 (1925) 때 한강철교와 함께 한강대교도 피해를 입는다. 7월 중순부터 내리 부은 비는 금새 한강다리의 턱밑까지 강물을 치오르게 했는데 그 경황에도 일부 서울 시민들은 전차 타고 물 구경한다고 한강인도교 위에 집결했다 한다. 그러나 이 구경거리는 곧 엄청난 괴물로 변한다. 당인리 발전소가 물에 잠기고 오늘날의 용산 일대도 물바다가 됐다. 한강 다리 역시 용산 쪽으로 났던 소교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다시금 한강다리가 이어진 것은 1929년이었고 이는 1935년 경 그 폭이 확장되어 오늘과 비슷한 형태의 한강대교가 된다. 



 

▲ 광진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그런데 1936년 오늘날의 서울 동부 지역, 당시로 보면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 일대였던 광나루에 또 하나의 다리가 놓여진다. 이 광나루는 서울에서 경기도 동부지역으로 가거나 원주를 거쳐 강원도로, 또는 충주 방면으로 길을 잡아 부산 동래까지 가는 교통의 출발지로 한강변의 중요한 나루터 중 하나였다. 발동 기선이 차량과 사람을 실어 날랐으나 1930년대쯤엔 포화상태에 이르러 다리 건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광진교’다. 한강다리로는 두 번째로 지어진 다리이지만 그 이후로 ‘대교’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후일 제2 한강교, 제3 한강교로 다리에 번호가 매겨질 때 그 일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수십 년을 버티게 된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저 광진교가 ‘대교’로 사람들 머리 속에 각인되기에는 좀 빈약했다고나 할까. 해방 때까지 한강을 잇는 다리는 한강철교, 그리고 한강인도교, 광진교 세 다리 뿐이었다. 



해방이 오고 좌우익의 극심한 갈등이 빚어진 이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죄어들어왔다. 이미 남쪽으로 피난간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을 믿고 피난을 생각하지 않던 서울 시민들은 바야흐로 귀를 찌르는 포성과 국군 패잔병들의 참상을 보고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가기 시작한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 위에는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들끓고 있었다. 광진교도 있었지만 광나루와 서울 도심과는 차이가 있었던 바 피난민들은 대부분 한강대교로 몰렸다. 헌병들이 호각을 불고 심지어 위협사격을 가하며 막아 봤지만 목숨을 내건 피난민들이 다리에 달라붙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새벽 2시 30분경 피난민들이 다리 위에서 남행을 재촉하고 있을 즈음, 국군 5개 사단이 한강 이북에서 서울 사수전을 펼치고 있었을 시간, 한강인도교에는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솟았다. 서울 종로에서도 들었다는 사람이 있을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리고 약 800 여명 (추산일 뿐 정확한 수효는 누구도 모른다)의 생목숨과 함께 한강인도교의 거대한 교각 또한 한강물에 빠져들었다. 아군의 손에 의해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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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꼽는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은 단연 한강일 것이다. 인구 천만의 대도시가 이 정도의 큰 강을 끼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집트의 카이로가 나일 강의 하구에 건설된 도시라지만 카이로 도심을 통과하는 나일강의 폭은 한강에 비해 좁고 통과하는 도심의 길이도 한강에 비해 짧다. 카이로의 도심 자체가 서울에 비해 작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런던은 템즈 강, 파리는 세느 강을 끼고 있다고 하지만 한강의 위용에 비할 바는 못 된다. 




▲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출처: 공간정보 오픈플랫폼)



1킬로미터가 넘는 강폭을 자랑하는 한강이 서울 도심을 W자로 가르며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 그리고 그 위에 겹겹이 놓인 한강 다리들의 모습은 가히 서울의 시각적 이미지의 주요 얼개가 되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한강 유역은 중요한 교통로와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쟁탈전은 국사 교과서에도 등장하거니와 조선 왕조가 그 수도를 북악산 남쪽, 한강 북쪽의 한양 땅으로 정하면서 한강은 한 나라의 수도를 지탱하는 젖줄로 부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곡창 지대에서 올라오는 조운선은 서해를 북상하여 한강으로 올라 짐을 부렸다. 새우젓 장수들이 주로 이용했던 마포 나루, 상인들과 거간꾼들이 들끓던 송파 나루는 항상 사람들로 들끓었고 강원도에서 뗏목에 실려온 목재들은 오늘날의 뚝섬 근방에 부려졌다. (이 목재장수들이 번 돈이 ‘떼돈’의 어원이 됐다고 한다.) 


한강은 그렇게 편리한 교통로이면서 동시에 장벽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올라가 남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또 한강을 건너 판교역 지나 삼남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나루터에서 나룻배가 떴지만 건너려는 사람은 많고 배는 적어 ‘과적’으로 인한 안전 사고가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전한다. 




▲ 배다리 설치방법(출처: 서울의 하천)



가끔은 임금님들도 한강을 건널 일이 있었다. 배를 타고 건너는 수도 있었지만 그리 ‘폼’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이용한 것이 주교(舟橋), 즉 배다리였다. 왕릉이 한강 이남에 조성된 경우 후대 임금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강을 건너야 했는데 경기도 관찰사 책임하에 종종 부교가 조성되곤 했다.  그 가운데 정조는 한강 도하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에 조성해 두고 수시로 방문했던 그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규모 수원행을 계획하던 중 기존의 배다리 건설이 막대한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개선 지침이라 할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직접 써서 신개념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지시한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 중 하나가 다산 정약용이었다. 


재미있는 건 그 시대의 배다리 건설 후보지를 살펴보면 오늘날에도 주요 한강 다리가 놓인 지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주교지남>에 등장하는 배다리 건설 후보지는 노량, 동호(동호대교 일대), 그리고 동작대교가 근처 용산의 동빙고 서빙고 일대였다. 이 가운데 배다리 건설 지역으로 선정된 것은 노량이었다. 이유 또한 과학적이다. 



“동호는 물살이 느리고 강 언덕이 높은 것은 취할 만하나 강폭이 넓고 길을 돌게 되는 것이 불편하다. 빙호는 강폭이 좁아 취할 만하나 남쪽 언덕이 평평하고 멀어서 물이 겨우 1척만 불어도 언덕은 10척이나 물러나가게 된다. (…) 그러므로 이들 몇 가지 좋은 점을 갖추고 있으면서 이들 몇 가지 결함이 없는 노량이 가장 좋다.” (신병주 교수의 <배다리 이야기> 중) 


김홍도의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를 통해 정조의 배다리는 역사에 남게 된다. 이 그림을 보면 최대 아홉 명의 사람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어가를 옹위하고 있으며 배들 위에는 송판이 깔리고 그 위에는 잔디까지 놓였다. 임금이 지남을 알리는 홍살문까지 세 개나 세워졌으니 과히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정조 때의 배다리 공사는 배의 수효, 난간의 규격, 배들의 닻 문제, 노량의 밀물과 썰물 시기와 유속, 동원된 배들의 보상 문제 등 치밀한 구석까지 일일이 계산하고 시행한 대역사였고 정조는 그렇게 설치된 배다리를 넘어 여러 번 남행길에 나선다. 그러나 이 배다리를 놓는 배들은 경강선, 즉 한강의 수로 교통을 담당하는 배들이었고 임금의 행차가 끝나면 이 배들은 뿔뿔이 흩어져 배다리는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이왕 배다리 만드는 것 영구적인 배다리를 만들어도 좋았겠지만 소심한 조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외국 군대나 반란군이 쉽사리 서울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외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길조차 닦지 않았던 나라니 오죽하랴마는. 


정조가 설치한 주교사(舟橋司)는 1882년까지 존속하다가 철폐된다. 이제 배다리를 놓을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배다리 없이, 심지어 배를 타지 않고 한강을 건너는 시대가 들이닥쳤던 것이다. 주교사 철폐 후 7년 뒤, 1889년 고종은 미국 공사로 나갔다 들어온 이하영이 가지고 들어온 장난감 기차에 혹한다. 쇠줄을 이어 궤도를 만들고 태엽 장치로 그 위를 달리는 모형 기차 앞에서 고종은 찬탄을 금치 못했고 몸소 태엽을 감으며 즐거워했다. 1896년 미국인 모스가 인천에서 서울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요청했을 때 고종은 이를 허락하며 장난감 궤도 위를 씩씩하게 달리던 모형 기차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한강주교환어도(소장: 국립고궁박물관)

 




▲ 공사 당시 모습(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이후 모스의 경인선 사업권은 곧 일본에게 넘어갔고 일본은 경인선 공사에 박차를 가하는데 최대의 난공사 구간은 역시 넓디넓은 한강이었다. 일찍이 정조가 건넜던 노량 일대가 선정됐지만 홍수와 혹한 때문에 몇 번씩이나 공사가 중단되는 홍역을 치렀고 40만원의 공사비를 잡아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0년 7월 5일 마침내 한강 철교가 준공됐다. 이는 그야말로 한 시대의 변화였다. 인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경인가도에서 여행객들을 상대로 톡톡히 재미를 보던 오늘날의 서울 오류동 주막거리에 곡소리가 났고 오류동 주모들이 정거장 건설 기념 축하 잔치에 난입하여 잔치에 초청된 기생들의 머리채를 잡는 사건도 있었다. 또 서울 장안의 짚신 장수들은 장사 다 해먹었다며 정거장 앞에 짚신을 쌓아두고 불을 지르며 아이고 데이고 통곡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 향토문화대전 -구로구편 중)



 

▲ 한강철교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20세기가 어슴푸레 밝아오던 즈음, 한강 위에는 한강다리가 처음으로 섰다.






Posted by 국토교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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